대한제국 (The Eternal Empire)/역사

개요

대한제국 (The Eternal Empire)의 역사를 작성한 문서

개화기

제국의 제1대 황제이자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 문조 이영
1776년 영조가 사망하고 장조가 즉위한다.그는 아버지의 탕평책을 포함한 개혁책을 이어갔다.또한 그는 무인의 기질또한 어느정도 있었고 여러 군제개혁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뒤 1800년 장조가 사망하고 정조가 즉위한다. 그또한 여러 개혁정책을 시행하며 20년간 조선을 이끌며 여러 개혁정책을 이끈 뒤 사망한다.
1820년 순조가 즉위하나 그는 선대 3명의 국왕들에 비해 무능했고 지방에선 세도가를 중심으로 부정부패가 들끓기 시작한다.
그러다 1825년 순조가 재위 5년만에 돌연 사망한다.그의 아들인 문조는 15세였기에 순원왕후의 대리청정이 진행되며 외척을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려한다.
그러나 문조는 어리지만 영리했다.그는 즉위 다음해에 친정을 선포하고,세도가를 사소한 부패,무능까지 잡아내어 세도가를 숙청한다.
물론 외척도 다수있었기에 그의 어머니인 순원왕후는 반발하였다.그러나 얼마후 순원왕후는 한발 물러선다.[1]
병술정국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세도가는 완전히 힘을 잃고 몰락했으며 문조는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1832년 영국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무력으로 통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의 해안은 장조시절부터 포로 무장해왔고 함선에 포격을 가하고,이에 상선은 퇴각한다.
그러나 1834년,돌아온것은 인천앞바다의 함대였다.(계사양요)
조선은 초기 소규모공격은 막아내었으나,이후 대대적인 공세에 인천을 빼앗기고 부평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는다.
문조는 충격을 받는다.자신의 개혁에도 그의 왕국은 약하고 조그마한 소국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말이다.
오랑캐라하던 양이들에게 패배한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들과 교역이 시작되고 아편전쟁으로 청마저 서양 오랑캐들에게 패배한것을 보곤 문조는 이를 보고서 양이의 기술을 받아들인다면 조선또한 강대해지리라 생각했고 서양기술을 받아들이고 군사적,행정적개혁을 단행한다.
그러던 1855년 간도의 청나라인들이 조선인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청은 안그래도염군의난으로 난장판이었기에 조선은 배상과 사대관계철폐를 요구한다.
하지만 청은 조선을 깔보고있었고 조청전쟁이 일어난다.하지만 조선은 예상과달리 강력했다.내부마저 혼란속이었던 청군은 패배했고,청은 물러난다.
이후 1857년 문조는 환구단을 짓고 연호를 건원으로 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호랑이의 사냥

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만주의 정복자 철종 이하

하지만 소년이던 문조는 늙어갔다.
국가를 위해 살던 그는 1868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문제는 그에게 후사가 없었고 문조는 죽기전 이하응을 후계자로 임명하니 그가 철종 이었다.그때 청은 염군의 난도 진압한후,한국이 황실 정통성에 혼란이 생긴틈에 군신관계의 재개및 칭제건원의 취소를 요구하고 이를 한국이 거절하자 재차 한국을 침공하니 한청전쟁이 발발한다.(1873년)
제국은 한때 의주,나진등 국경에서 밀려 위기를 겪었으나 청은 얼마안가 심각한 보급난에 빠지고 반격한 제국군에 재차 패배한 청은 남만주를 대한에 내주고 만다.[2]
그 다음 일본이 남아있었다.당시 지방 번들의 반란으로 혼란인 상황이었기에 한국은 반란제압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파견,일본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이후 1883년 류큐또한 반란진압후 종속국화하고 철종은 1898년 성장하는 국가의 안에서 세상을 떠난다.
1898년 고종이 즉위한다.그후 얼마안되어 1899년 의화단전쟁에 개입해서 청나라에게 만주서부일대[3]를 얻어낸다.
하지만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였다.이는 1903년 한러전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에서 러시아의 극동군은 한국의 육군에 무참히 찢겨나가고 결국 북만주와 연해주가 한국에 넘어간다. 이 이후 한국은 열강으로 대우받게되고 이전에 체결된 모든 불평등조약들도 사라지게된다. 견제자마저 없게되자 1910년 한국은 종속화하던 일본을 합병한다.

폭풍속으로

제국의 제10-14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중원의 정복자 이범석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이 혼란해지자 내몽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던 1914년 7월,유럽에서 대전쟁이 일어난다,그틈에 한국은 협상국에 가담하여 독일령 칭다오,태평양을 손에 넣는다.
이과정에서 영-한관계가 악화되며 이후에 있을 화염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적군이 우세하자,한국은 적군과 협상,백군이 점령하던 외만주북부[4]를 점령한다.(공청 조약)
제국은 성장해가고 고종사후 순종대에 융희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민주화정책까지 제국에는 희망찬미래가 예상되었다.'그날 전까지는'
1929년 10월 24일 머나먼 땅에서의 주식 대폭락은 그 모든것을 앗아갔다.이에 한국의 경제도 파탄나기 시작한다.기업들이 무너지고,길거리엔 실업자들과 노숙자들이 넘치고,한강과 대동강,낙동강에 사람들은 몸을 내던졌다.
당시 조완구 총리가 상황통제를 시도하나,1930년 순종사망,1932년 강조암살사건으로 민주주의는 종말을 맞이한다. 이사건으로 국내는 혼란에 빠지고 그사이 이범석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난다.(3.15쿠데타)즉시 내각을 해산하고 군사정부를 수립하고,국내의 좌익부터 시작하여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세력까지 숙청하고 제국연합회를 창당한다.이쯤되었을때 국내의 혼란이 잠식된것'처럼'보였기에 국민들도 군사정부에 순응하게된다.
이후 군부는 외부로 눈을 돌린다.당시 중국은 수많은 세력들로 분열되어있었고 대한제국은 이틈을타 중원을 장악하는 대 계획을 세운다.그리고 1936년 중국을 침공,동아대전이 일어난다.연합전선이 형성되긴하나 단합이 되지않고 결국11년간의 전쟁은 대한의 신질서아래 끝을 맻는다.

재로 뒤덮힌 대지에서

이범석 내각

이범석의 정식 초상화(1949년)
중국 정복외에도 이범석이 한국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많다.

우선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던 기존 문자체계를 완전히 한글로 대체하며 문맹률을 대폭 낮추었고
이는 제국내의 여타민족들의 동화에도 도움이 되었다.
승전후에 대한제국의 점령지에 맞춰 군의 배치를 재편하고 이후의 중원지역의 국가 수립에도 영향을 끼친다.이후 1950년,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퇴임하며 후임인 김성주에게 넘기게된다.







김성주 내각

제15대 총리대신 김성주
1950년 취임이후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고 강압적인 정책을 벌이며 나아갔으나 국가 유신회내부에서도 반발이 발생하기에 이르고
내각내의 대신들 마저 사퇴하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1954년 4년의 짧은 임기를 끝으로 사임하고
국가유신회내의 개혁파에게 권력이 넘어가게된다.










손원일 내각

제16-17대 총리대신이자 개혁가 손원일

1954년 국가유신회 개혁파의 수장인 손원일이 집권했다.
우선 손원일총리는 왜국 총독부를 해체하고 동한열도 전역을 내지로 편입시켰다,
상당히 동화가 진행된 상태에서 외지로 분류되어 생기는 차별,제약등이 상당하다 판단하여
취임후 단 3주만에 이를 실행할것임을 공표한다.또한 본토 전역에서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고
수십년에 걸친 내지전역의 동화의 마침표를 찍게되었다.
중원지역의 군정을 종료하고 중원지역에 청국,명국,섬서국,후이국,오민국,양광국,호남국,사천국,운남국을 수립하였다.
물론 현재에 와서야 이런정책들이 호평을 받고있지만 당시에는 내지의 불만을 불러왔고
1960년 국가유신회의 압력으로 사임하고 후임으로 박정희가 취임하게 된다.





박정희 내각

제18-21대 총리대신이자 강철의 총리 박정희

1960년 국가유신회의 중도파이자 젊은피 박정희가 취임하였다.
쫓겨난 개혁가의 뒤로 중도파로서 왔기에 사람들은이제 개혁이 다시 백지화되거나 할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이전의 개혁의 철폐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박정희의 임기를 대표하는것은 권위적 개발독재였다.
촌락지역을 새마을운동으로 근대화시키고,조계지 지역을 한국화하거나,외지에 대규모 공업지대를 조성하는등으로 이시기 한국은 10%대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물론 그 이전총리들의 시대에도 그랬듯 반대파는 남산으로 가는게 일상이었고 이때에 정부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개인주의라며 비판하며 자신들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늘 예찬하였고,그러는 동안 1974년 기나긴 군부독재가 끝을 마주하는 해가 찾아온다.







3.2쿠데타와 혁명

진달래 혁명을 상징하는 사진중 하나 '아! 나의 조국'

1974년 1월 22일 설날을 맞아 박정희는 국립중앙극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때 온나라를 뒤집을 총성이 울려 퍼졌다.박정희는 그자리에서 쓰러지고 범인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강본무로 당시 최대 극좌 조직이던 적군파의 일원이었다.
박정희는 결국 사망했고 그다음 총리로는 개혁파의 노장 김원봉이 취임했다.
그러나 당시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으니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였다.
1974년 3월 2일,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3.2사태)총리를 사임하게하고 전두환을 총리로 선출시킨다.
하지만 더이상 국민들은 군대에게 억압받길 원치 않았다.수도 한성을 시작으로 부산,평양,심양,장춘,강호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심지어 당시 황제였던 의종 이건이 군부를 지지하자 시위대의 구호에는 반황실의 구호마저 들어가기에 이른다.
이미 국민의 신망을 잃은 정권이었음에도 전두환은 전국에 계엄을 선포할 작정이었고,이에 군부내에서도 불만이 발생하며,
1974년 4월 13일 새벽장태완 당시 제1군 사령관과 이우친왕[5]을 중심으로 역쿠데타가 진행되었다.
그날 전두환등 하나회는 구속되었고,의종 이건은 퇴위를 선언했으며,시위대는 광화문광장에서 만세를 불렀으니 이것이 현대의 제국을 꽃피운 진달래혁명이 되겠다.

현대

장태완의 임시내각이 혁명직후 수립되었고,민주적인 개헌및 빠른시일내 민주적총선을 개시하겠다 하였고,여러 민주화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1974년 10월 29일,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이듬해인 1975년 1월 22일 새로운 총선이 실시되었다.

김영삼 내각

김대중 내각

이회창 내각

단임 총리들의 시대

노회찬 내각

현재

  1. 문조가 설득을 위해 순원왕후를 찾아갔다고하나 어떤말이 오갔는지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않았다.
  2. 만주 전체를 장악하려했으나 러시아의 개입으로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간다.
  3. 현 금조남북도,적통남북도일대
  4. 현 공백남북도 일대
  5. 이후 성조 이우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