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The Eternal Empire)/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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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 한국은 열강으로 대우받게되고 이전에 체결된 모든 불평등조약들도 사라지게된다.<br>
이 이후 한국은 열강으로 대우받게되고 이전에 체결된 모든 불평등조약들도 사라지게된다.<br>
견제자마저 없게되자 1910년 한국은 종속화하던 일본을 합병한다.
견제자마저 없게되자 1910년 한국은 종속화하던 일본을 합병한다.
==폭풍속으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이 혼란해지자 내몽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br>
그러던 1914년 7월,유럽에서 대전쟁이 일어난다,그틈에 한국은 협상국에 가담하여 독일령 칭다오,태평양을 손에 넣는다.<br>
이과정에서 영-한관계가 악화되며 이후에 있을 화염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다.<br>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적군이 우세하자,한국은 적군과 협상,백군이 점령하던 외만주북부<ref>현 해자도,유백도,공묘도 일대</ref>를 점령한다.(공청 조약)<br>
제국은 성장해가고 고종사후 순종대에 융희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민주화정책까지 제국에는 희망찬미래가 예상되었다.'그날 전까지는'<br>
1929년 10월 24일 머나먼 땅에서의 주식 대폭락은 그 모든것을 앗아갔다.이에 한국의 경제도 파탄나기 시작한다.기업들이 무너지고,길거리엔 실업자들과 노숙자들이 넘치고,한강과 대동강,낙동강에 사람들은 몸을 내던졌다.<br>
당시 조완구 총리가 상황통제를 시도하나,1930년 순종사망,1932년 의종암살사건으로 민주주의는 종말을 맞이한다. 황태자인 이건또한 사망하며 국내는 혼란에 빠지고 그사이 이범석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난다.국내상황을 빠르게 수습하며 지지를 얻는다.<br>
이후 군부는 외부로 눈을 돌린다.당시 중국은 우페이푸의 북양정부,장쭤린의 난징정부,장제스의 광저우정부,천중밍의 충칭정부,마오쩌둥의 란저우인민정부같은 5개의 정부를 포함한 수많은 군벌들로 분열되어있었고 대한제국은 이틈을타 중원을 장악하는 대 계획을 세운다.그리고 1936년 중국을 침공,동아대전이 일어난다.연합전선이 형성되긴하나,정부선언세력만해도 5개인마당에 단합이 될리 없었고 단합이 제대로 된시점인 1943년은 한국을 막기엔 너무도 늦어있었다.이미 미국과도 협의가 완료되었고 1947년 거얼무조약으로 중원은 대한의 신질서하에 있게된다.
==재로 뒤덮힌 대지에서==
그사이 유럽에서도 대전쟁이 일어나 있었고 미국이 참전하지않으며 연합국은 현실보다 몇년은 더 전쟁을 해대었고,결국 1950년 전쟁이 끝나나,유럽전역이 초토화되었으며 죽은자가 1~2억명이며<ref>심지어 통계도 정확치 못할정도로 혼란스럽고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이또한 정확치않다.</ref>식민지들도 무너진다.한국은 그때 서양열강들의 중국 조계지들을 점령하고 대동아의 진정한 해방을 선언한다.그리고 여러 사회적 변화를 꾀하며 개혁을 시행한다.<ref>물론 민주화정책따윈 없었다.</ref>그리고 1961년 이범석은 건강악화를 이유로 박정희에게 권력을 넘긴다.그도 이범석의 정책을 이어받아 경제를 성장시켰다.그러나 그동안 국민들의 불만은 지속되어갔고 1974년 '그날'이 찾아온다.
==아름다울 제국==
1974년 1월 22일 설날을 맞아 박정희는 한성 광화문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있었다.그러던 그날 대한의 역사를 가를 총성이 울려퍼졌다.병원으로 이송되나 얼마안가 사망하고,권력은 황제에게 임시로 넘어간다.성조황제는 이제 민중에게 권력을 넘길것임을 밝힌다.국민들은 기대했으나 2월 26일 전두환을 위시한쿠데타는 이런 기대를 무참히 깨뜨린다.
[[분류:The Eternal Empire]]
[[분류:The Eternal Empire]]

2022년 12월 22일 (목) 23:33 판

개요

대한제국 (The Eternal Empire)의 역사를 작성한 문서

개화기

1776년 영조가 사망하고 장조가 즉위한다.그는 아버지의 탕평책을 포함한 개혁책을 이어갔다.또한 그는 무인의 기질또한 어느정도 있었고 여러 군제개혁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뒤 1800년 장조가 사망하고 정조가 즉위한다. 그또한 여러 개혁정책을 시행하며 20년간 조선을 이끌며 여러 개혁정책을 이끈 뒤 사망한다.
1820년 순조가 즉위하나 그는 선대 3명의 국왕들에 비해 무능했고 지방에선 세도가를 중심으로 부정부패가 들끓기 시작한다.
그러다 1825년 순조가 재위 5년만에 돌연 사망한다.그의 아들인 문조는 15세였기에 순원왕후의 대리청정이 진행되며 외척을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려한다.
그러나 문조는 어리지만 영리했다.그는 즉위 다음해에 친정을 선포하고,세도가를 사소한 부패,무능까지 잡아내어 세도가를 숙청한다.
물론 외척도 다수있었기에 그의 어머니인 순원왕후는 반발하였다.그러나 얼마후 순원왕후는 한발 물러선다.[1]
병술정국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세도가는 완전히 힘을 잃고 몰락했으며 문조는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1832년 영국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무력으로 통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의 해안은 장조시절부터 포로 무장해왔고 함선에 포격을 가하고,이에 상선은 퇴각한다.
그러나 1834년,돌아온것은 인천앞바다의 함대였다.(계사양요)
조선은 초기 소규모공격은 막아내었으나,이후 대대적인 공세에 인천을 빼앗기고 부평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는다.
문조는 충격을 받는다.개혁에도 그의 왕국은 약한 소국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는 영국에게서 프랑스에게서 근대적 문물을 접하고,그는 조선이 이를 받는다면 더이상 이전의 소국이 아니리라 생각했다.그리고아편전쟁에서 청이 무너지자 그런신념은 확고해진다.
그러던 1855년 간도의 청나라인들이 조선인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청은 안그래도염군의난으로 난장판이었기에 조선은 배상과 사대관계철폐를 요구한다.
하지만 청은 조선을 깔보고있었고 조청전쟁이 일어난다.하지만 조선은 예상과달리 강력했다.내부마저 혼란속이었던 청군은 패배했고,청은 물러난다.
이후 1857년 문조는 환구단을 짓고 연호를 건흥으로 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호랑이의 사냥

하지만 소년이던 문조는 늙어갔다.
국가를 위해 살던 그는 1862년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거기다 뒤를 이은 헌종은 재위 6년만인 1868년 간암으로 급사한다.
문제는 그에게 후사가 없었고 헌종은 죽기전 이하응을 후계자로 임명하니 그가 철종 이었다.그때 청은 염군의 난도 진압한후,한국이 황실 정통성에 혼란이 생긴틈에 재차 한국을 침공하니 한청전쟁이 발발한다.(1873년)
제국은 한때 의주등 국경에서 밀려 위기를 겪었으나 청은 얼마안가 심각한 보급난에 빠지고 반격한 제국군에 재차 패배한 청은 남만주를 대한에 내주고 만다.[2]
그 다음 일본이 남아있었다.당시 지방 번들의 반란으로 혼란인 상황이었기에 한국은 반란제압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파견,일본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이후 1883년 류큐또한 반란진압후 종속국화하고 철종은 1898년 성장하는 국가의 안에서 세상을 떠난다.
1898년 고종이 즉위한다.그후 얼마안되어 1899년 의화단전쟁에 개입해서 청나라에게 만주서부일대[3]를 얻어낸다.
하지만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였다.이는 1903년 한러전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에서 러시아군은 한국의 육군에 무참히 찢겨나가고 결국 북만주와 연해주가 한국에 넘어간다.
이 이후 한국은 열강으로 대우받게되고 이전에 체결된 모든 불평등조약들도 사라지게된다.
견제자마저 없게되자 1910년 한국은 종속화하던 일본을 합병한다.

폭풍속으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이 혼란해지자 내몽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던 1914년 7월,유럽에서 대전쟁이 일어난다,그틈에 한국은 협상국에 가담하여 독일령 칭다오,태평양을 손에 넣는다.
이과정에서 영-한관계가 악화되며 이후에 있을 화염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적군이 우세하자,한국은 적군과 협상,백군이 점령하던 외만주북부[4]를 점령한다.(공청 조약)
제국은 성장해가고 고종사후 순종대에 융희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민주화정책까지 제국에는 희망찬미래가 예상되었다.'그날 전까지는'
1929년 10월 24일 머나먼 땅에서의 주식 대폭락은 그 모든것을 앗아갔다.이에 한국의 경제도 파탄나기 시작한다.기업들이 무너지고,길거리엔 실업자들과 노숙자들이 넘치고,한강과 대동강,낙동강에 사람들은 몸을 내던졌다.
당시 조완구 총리가 상황통제를 시도하나,1930년 순종사망,1932년 의종암살사건으로 민주주의는 종말을 맞이한다. 황태자인 이건또한 사망하며 국내는 혼란에 빠지고 그사이 이범석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난다.국내상황을 빠르게 수습하며 지지를 얻는다.
이후 군부는 외부로 눈을 돌린다.당시 중국은 우페이푸의 북양정부,장쭤린의 난징정부,장제스의 광저우정부,천중밍의 충칭정부,마오쩌둥의 란저우인민정부같은 5개의 정부를 포함한 수많은 군벌들로 분열되어있었고 대한제국은 이틈을타 중원을 장악하는 대 계획을 세운다.그리고 1936년 중국을 침공,동아대전이 일어난다.연합전선이 형성되긴하나,정부선언세력만해도 5개인마당에 단합이 될리 없었고 단합이 제대로 된시점인 1943년은 한국을 막기엔 너무도 늦어있었다.이미 미국과도 협의가 완료되었고 1947년 거얼무조약으로 중원은 대한의 신질서하에 있게된다.

재로 뒤덮힌 대지에서

그사이 유럽에서도 대전쟁이 일어나 있었고 미국이 참전하지않으며 연합국은 현실보다 몇년은 더 전쟁을 해대었고,결국 1950년 전쟁이 끝나나,유럽전역이 초토화되었으며 죽은자가 1~2억명이며[5]식민지들도 무너진다.한국은 그때 서양열강들의 중국 조계지들을 점령하고 대동아의 진정한 해방을 선언한다.그리고 여러 사회적 변화를 꾀하며 개혁을 시행한다.[6]그리고 1961년 이범석은 건강악화를 이유로 박정희에게 권력을 넘긴다.그도 이범석의 정책을 이어받아 경제를 성장시켰다.그러나 그동안 국민들의 불만은 지속되어갔고 1974년 '그날'이 찾아온다.

아름다울 제국

1974년 1월 22일 설날을 맞아 박정희는 한성 광화문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있었다.그러던 그날 대한의 역사를 가를 총성이 울려퍼졌다.병원으로 이송되나 얼마안가 사망하고,권력은 황제에게 임시로 넘어간다.성조황제는 이제 민중에게 권력을 넘길것임을 밝힌다.국민들은 기대했으나 2월 26일 전두환을 위시한쿠데타는 이런 기대를 무참히 깨뜨린다.

  1. 문조가 설득을 위해 순원왕후를 찾아갔다고하나 어떤말이 오갔는지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않았다.
  2. 만주 전체를 장악하려했으나 러시아의 개입으로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간다.
  3. 현 금조도,적통도일대
  4. 현 해자도,유백도,공묘도 일대
  5. 심지어 통계도 정확치 못할정도로 혼란스럽고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이또한 정확치않다.
  6. 물론 민주화정책따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