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혼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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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국
大混國
대혼세국
大混勢國
A.D 3430년 - 현재
수도 신일 성계 제 5행성 해무 길량궁도
최대 도시 대고마성
대수령
A.D 3430년 ~ A.D 3491년 용계남
A.D 3496년 ~ 고두원
신일성계 발견 A.D 2610년
상고그룹의 해무행성 이주 시작. A.D 2660년
대고선국 건국 A.D 2705년
무신사화 A.D 3048년
모상덕 총리 당선 A.D 3420년
모상덕 재선 A.D 3423년
대혼전쟁 A.D 3424년 ~ A.D 3428년
황실폐지 및 대혼세국 건국 A.D 3430년
초대수령 용계남 사망. A.D 3491년
고역의 행군 A.D 3491년 ~ A.D 3496년
2대수령 고두원 취임 A.D 3497년
인문 환경
인구


민족 구성 대혼인, 비혼인
기대 수명 250
공용어 한국어
국민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지역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수
공용 문자 한글, 한자
종교 국가무신론, 반종교주의
군대 대혼세군
세부 군대 육군 혼표군
해군 혼천군
행정구역
행정
구역
32개
20개
직할시 7개
교화구 4게
정치
정치 체제 명목상 :공화정, 이원집정부제
사실상 : 권위주의, 대수령중심제, 병영국가
입법부 국가의회(국회)
국가
원수
대수령 고두원
정부
요인
이종욱 국무상
경제
경제 체제 국가자본주의
화폐 공식 화폐
코드와 단위
단위 법정연호 서력(AD), 혼세(A.D 3430년 기년)
시간대 YYYY-MM-DD


개요

대혼국은 전쟁발전론을 신봉하며, 최고권력자인 대수령의 독재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병영국가이다. 본래 상고그룹의 오너 일가들이 황실로써 군림한 대고선국이라는 군주정 국가였으나, 당시 특수작전군 사령관이었던 용계남에 의해 군주정이 폐지되고 자신이 대수령에 오르면서 현재의 대혼세국이 되었다.

황실을 폐지한 3430년 이후 대고선국의 후신을 자처하는 신주국과는 주적으로, 전쟁중이다.

역사

상고 그룹의 개척

해무 행성의 모습

대혼국의 역사는 상고 그룹이라는 재벌출신 메가콥에서 시작되었다. 2370년, 동양계 사업가 고승유가 설립한 상고상사는 무역회사로 시작해 25세기 초반에 국제연합과 외우주 식민지의 분쟁으로 발발한 개척인류 독립전쟁 때 방위산업과 용병업을 통해 큰 수익을 냈다. 개척인류 독립전쟁이 종전되었을 시점엔 상고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메가콥이 되었고, 국제연합으로부터 돌깁한 외우주 식민지들의 전국시대와 2차 개척인류 독립전쟁을 이용해 다시 성장하였다.

그러나 2차 개척인류 독립전쟁 종전 이후 지구권에서 방위산업과 용병업 수요가 줄어들자, 상고그룹은 다른 계열 산업 육성 및 외계문명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2610년, 이 과정에서 지구권과 외우주를 연결하는 거점을 찾던 중, 지구와 흡사한 기후/환경을 가진 성계 신일을 발견했다. 상고 그룹은 그 행성의 이름을 ‘해무’로 명명하고 본격적인 개발에 앞서 행성 환경 세부조정과 인프라 구축을 위해 선발대를 파견했다.

2660년, 50년에 걸친 사전작업이 끝나자 상고그룹은 오너 일가와 정사원을 시작으로 이주를 진행했다. 동시에 회사의 자산, 인력, 설비를 해무로 옮기면서 해무 행성은 상고그룹의 왕국이나 다름 없어졌다. 경제와 인프라는 상고그룹에 의해 독점되었고, 지구권과 외우주 사이의 중계무역을 통해 상고그룹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

2700년, 개척인류연맹이 국제연합에 가입하자 연맹 내 반대파와 지구권으로의 종속을 우려한 외우주 독립국들의 반발로 지구권 통합전쟁이 발발했다. 2705년, 상고그룹은 전쟁이 격화되어 해무의 독립을 제재할 수 없다고 판단, 오너 일가의 고선혁을 초대 황제로 내세워 해무 행성을 ‘대고선국’이라는 국가로 독립시켰다.

고씨 왕조

상고그룹의 예상대로, 지구인류권 국가연합은 지구권 통합전쟁으로 인해 지구권과의 수교 및 통상, 중립 유지를 조건으로 대고선국의 독립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고선혁은 상고그룹의 대리자로써 지구권 통합전쟁을 계기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지구권 통합전쟁 종전 이후, 상고그룹은 오너 일가의 혈통인 고씨 왕조를 앞세워 대고선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다. 상고그룹은 황실의 자산이라는 명목으로 그 이권을 보장받았고, 상고그룹은 곧 대고선국의 황실이었다.

패럴스페이스 드라이브의 개발과 2차 외우주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대고선국은 상고그룹의 투자 아래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진행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2841년에 즉위한 4대 황제 성종 고둔 이었다. 상고그룹의 기술을 활용해 행성들을 개척하고, 상고그룹의 무기로 다른 세력들을 정복하며 재위 기간동안 많은 영토를 확장했다.

대고선국의 번영은 곧 상고그룹의 이윤이었고, 경제적으로 상고그룹에 의해 종속되었을지언정 황실의 권위를 통해 여론을 무마시켰다. 전제군주정과 기업국가를 합친 대고선국 체제는 수백년동안 공고화되었다.

그럼에도 상고그룹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어왔다. 3048년, 권력욕 때문에 상고그룹의 이권을 강탈하고자 했던 성화대군 고유는 자신의 형인 16대 황제 계종 고형 사후 즉위한 17대 황제 광종 고현으로부터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 이를 위해 상고그룹의 독점에 불만을 품은 소장파와 황실 인사들을 포섭,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상고그룹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17대 황제 광종 고현은 황실과 상고그룹에 반대하는 소장파들을 숙청하는 무신사화를 일으켜 상고그룹의 지배는 공고해졌다.

대고선국 황제는 상고그룹의 최고경영자를 겸하기 시작했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는 상고그룹이 독점했다. 대고선국의 신민은 곧 상고그룹의 직원이자 자산이었으며, 대고선국의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상고그룹의 정직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1차산업에서 4차산업에 이르는 모든 업종의 산업은 상고그룹의 계열사 소속으로, 상고그룹은 대고선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상고그룹은 더 많은 이윤을 원했고, 내수만으로 부족한 시장을 키우기 위해 내수시장 확대와 해외시장 창출이라는 투트랙 전략을 택했다.

이는 대고선국의 대외전략으로도 이어졌다. 대고선국은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통해 주변국 정복과 신영토 개척을 진행함과 동시에, 수출주도형 산업노선을 채택해 다양한 상품을 해외에 판매했다. 수백년간 이어진 확장과 전쟁을 통해 내수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해외시장을 창출하면서 대고선국은 급격히 성장했다.

그러나 대고선국이 창출해낸 수익 대부분은 상고그룹의 이윤으로 전환되었고, 대부분 대고선국 신민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데 필요한 영역으로의 재투자로 이어졌다.

상고그룹 오너 일가인 황족, 상고그룹 정직원인 귀족, 상고그룹 정직원이 아닌 평민으로 나뉜 계급구조는 빈부격차와 함께 공고해졌다. 부의 균형이 불균형해지고, 평민들은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노동자와 병사로써 소모되는 삶을 강요받았다.

모상덕 내각

모상덕 수상의 취임 연설

대고선국 내부의 빈부격차와 공고화된 신분제도는 수백년간 이어져왔으나, 34세기에 들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업과두정이었던 스탈리온 성주국에서 기업으로 인한 빈부격차와 개척지 분배 문제로 포퓰리스트들이 득세해 내전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대고선국에도 상고그룹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35세기, 철저한 독점체제로 대고선국의 이권을 보장받은 상고그룹은 자사와 유착한 권문세족들을 통해 세도정치를 주도했고, 부정부패와 더불어 상고그룹의 착취가 노골화되자 상고그룹으로부터 이권을 환수받고 분배와 사회개혁을 진행해야 한다는 세력이 성장했다.

3420년, 법학자 출신의 자유주의자였던 모상덕 대고선국의 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모상덕은 황실에 의해 유명무실화된 의회를 정상화하고, 사회/경제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상고그룹과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였던 스탈리온 성주국이 모상덕 총리의 정책에 반발하여 경제제재를 가했고, 상고그룹도 경제 문제의 원인을 모상덕 총리에게 돌리며 방해공작을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다각화를 통해 여러 국가와 접촉하며 활로를 뚫은 모상덕 내각은 3423년 총선에서 승리하였다. 이에, 상고그룹은 무력으로 모상덕 내각을 몰아내기로 결정, 아직 자사의 영향력이 강한 군부를 포섭해 쿠데타를 준비했다.

대혼전쟁

쿠데타를 결정한 군부 인사들은 요인확보와 거점 장악을 위해 특수작전군을 포섭해야 한다고 판단, 특수작전군 사령관 용계남 대장에게 접근했다. 용계남 대장은 확답을 늦추며 그들의 의중을 떠 보았고, 그들이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용계남 대장은 군부의 쿠데타를 신호로 상고그룹이 산하 계열사의 병력과 판매품으로 위장한 병기들로 개입할 것을 알아채고는 쿠데타가 시작되면 이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 자신 휘하의 특수작전군을 통해 군부와 상고 그룹을 상대로 선제 공격을 구상했다.

3424년, 용계남 대장 휘하의 특수작전군이 쿠데타군으로 위장하여 군부를 습격했다. 군부는 예정보다 이른 쿠데타에 당황하였으나, 용계남 대장이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생각해 안심하였다. 그러나 용계남 대장은 그 직후 쿠데타에 가담한 인사들을 처형하고, 군부를 장악했다. 그 후 자신에게 불복하는 대고선국 국군 부대들을 급습하며 '대혼전쟁'이라는 내전이 벌어졌다. 한편, 상고그룹의 병력과 병기들은 반기업 테러리스트로 위장한 특수부대와 용병들에 의해 습격당하면서 대고선국에 대한 개입이 봉쇄되었다.

대고선국 군부는 용계남의 역쿠데타로 지휘부가 제압당하자, 각 지방의 주둔 병력이 군벌화되었다. 대고선국의 영토는 다양한 군벌 세력들에 의해 나뉘었으며, 용계남이 장악한 영역은 수도성 해무와 그 일대 성역뿐이었다. 그러나 용계남 대장은 산하 특수작전군과 충성파 중 정예도가 높은 병력을 집중 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 여러 군벌들을 속전속결로 각개격파 했으며, 무력으로 완전히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군벌들에게는 회유와 협박을 병행하며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했다.

3428년, 용계남 대장은 내전으로 단련된 정예병과 특수작전군을 토대로 자신 직속의 최정예 부대 ‘봉침’을 창설하며 대고선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3430년, 모상덕 총리대신이 관저에서 피살되자 용계남 대장은 이를 황실의 공작으로 공표하고, 마지막 황제인 양종 고연을 폐위시켰다. 황실은 폐지되어 모든 특권과 자산을 압류당했으며, 황제를 비롯한 황실의 직계는 대고선국 전역에 생중계되는 공개처형으로 몰살당했다. 대고선국 황실이 몰살당한 후, 용계남은 공화정인 '대혼세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대수령의 직위에 올랐다.

용계남 시대

대혼세국 초대 대수령 용계남

초대 대수령이 된 용계남은 체제 공고화를 위해 상고그룹, 주요 가문, 의회, 관료계 등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진행했다.

대혼전쟁과 색출작업을 거치며 수 많은 정치인, 관료, 기업가, 종교인과 그 가족들은 모든 권리와 자산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황실처럼 처형당하거나 수용소형에 처해졌다. 대혼세국의 각 지역이 대혼전쟁으로 파괴되면서, 수백년 동안 대고선국을 좀먹어온 부정부패, 부조리, 불합리는 ‘해결’되었다.

용계남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막론한 다방면적 숙청 이후, 대혼세국 국가 재건과 신체제의 이념을 제창하는 것에 집중했다. 국가 재건에 필요한 노동력은 수용소에 투옥된 자들을 노예 노동이나 다름 없는 강제노역으로 충당했고, 그들로부터 압류한 자산으로 재건 비용을 충당했다. 동시에 물질적 재건의 성과를 홍보하며, 대수령 지도하의 통합된 단일체제 구축을 위한 사상적 기반을 준비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투쟁이며, 이러한 투쟁으로부터 살아남아 승리하기 위해서는 대수령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 통합된 단일체제 구축을 표방하는 '대혼주의'를 대혼세국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대혼주의를 통해 대수령의 영도아레 하나로 섞인 '대혼인'과 그렇지 않은 '비혼인'으로 국민을 구분했다. 대혼인은 곧 대혼세국의 시민권을 의미했고, 비혼인은 대혼주의를 거부하거나, 대혼주의에 의해 제거 대상으로 여겨진 부류, 외국인을 의미했다.

3458년이 되자, 양국 모두 대혼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나 재건과 국력신장을 마친 상태였고, 양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신혼전쟁'이라고 불리는 대혼세국과 신주국간 전쟁의 시작이었다. 1차 신혼전쟁은 총 10년동안 이루어졌으며, 대혼세국의 성장을 경계한 스탈리온 성주국과 여러 국가들이 신주국을 지원했다. 반면, 대혼세국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자력으로 이를 상대해야 했다.

초기에는 해외의 지원에 힘입은 신주국이 우세를 점했지만, 신주국 이상의 체급을 갖춘 대혼세국이 역전하기 시작하며 10년에 걸친 소모전을 강요했다. 그러나 대혼세국도 신주국을 후원하는 여러 기업과 용병들에 의해 신주국 본토 진공이 돈좌되면서 일진 일퇴가 반복된 끝에 3468년에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대혼세국과 신주국은 국경에서의 국지전과 무력충돌을 이어나갔다.

대고행

3494년, 초대 대수령 용계남이 사망하자 대혼세국은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국가의 모든 권력이 대수령에게 독점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최고권력자의 부재는 대혼전쟁과 같은 분열의 반복을 우려했다. 초대 대수령 용계남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고, 차기 대수령이 되기 위해 야심을 가진 여러 인사들이 각축전을 벌였다. 대수령의 부재로 인한 국가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도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정부수반인 국무상과 국회, 군부 인사들로 이루어졌다. 과도위원회는 대혼세국의 무정부상태 해결과 차기 대수령 선출을 맡기로 했지만, 대수령 선출은 난항을 겪었다.

용계남 사후를 틈타 대수령 체제 붕괴를 노리는 신주국, 스탈리온 성주국을 비롯한 외국의 개입으로 일부 인사들이 포섭되어 쿠데타를 획책하고, 대혼세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이나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가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이 때 혼란을 수습하고 주도권을 잡은 것은 고두원이었다.

고두원은 초대 대수령 용계남의 유지를 이어 내실을 다진 다음, 적극적인 대외확장과 정복전쟁을 통한 팽창을 주장했다. 이는 대혼세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이자, 대혼세국을 위협하는 세력들의 제거라는 명목으로 각광받았다. 고두원은 이를 이용해 스탈리온 성주국을 비롯한 '외부의 적'을 내세워 내부의 모든 반대 움직임과 소요사태를 짓밟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국경방어를 위해 편성된 고두원 산하 병력과 국지전을 통해 얻은 신영토에서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빠르게 실권을 장악한 고두원이었지만, 고두원은 바로 대수령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과도위원장이라는 임시 직책을 유지한 채, 용계남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며 자신이 대수령에 취임함과 동시에 대외팽창을 준비할 수 있도록 국내 기틀을 정비하기 위함이었다.

고두원 시대

3497년, 3년간의 과도위원회 시절을 끝낸 고두원은 용계남의 뒤를 이은 2대 대수령에 취임했다.

고두원은 취임 직후 3년간의 전쟁 준비를 마친 뒤, 대외팽창의 일환으로 주변국에 대한 정복전쟁에 나섰다. 3500년에 시작해 11년에 걸친 시간 동안 4개 국가를 정복한 다음, 그 영토에는 4개의 교화구를 설치했다. 교화구는 명목상의 자치권을 부여받은 식민지나 다름 없었으며,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대혼세국은 군소 행성국가와 성계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새로운 성계를 개척하며 여러 방향으로 확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대혼세국의 주적 신주국 역시 주변 성계들을 흡수하며 적극적인 신영토 개척을 진행했다.

원래부터 무력충돌과 국경분쟁을 벌여온 대혼세국과 신주국의 갈등은 양국의 점유권이 모호한 개척지에서 더 노골적으로 비화되었다. 대혼세국은 군 전역자들을 개척민으로 내보내고 무장을 허용했으며, 신주국은 개척민과 용병들을 내세웠다. 양국의 개척민 민병대들이 행성 표면에서 벌이는 전투는 실효지배를 위해 배치된 정규군 부대의 충돌로 이어졌다.

만성적인 국경전투는 신주국의 황제가 참변을 당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정치

대혼세국은 명목상 이원집정부제에 의거한 공화정이나, 실질적으로는 대수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 대수령 중심제다. 대수령 중심제에서 대수령은 국가원수이자 최고권력자로, 군 통수권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였고, 국가권력의 대부분이 대수령에게 집중되었다. 삼권분립은 대수령의 효과적인 통치 운영을 위한 하위 분류에 불과하며, 정부기관에 대한 인사권, 임명권, 거부권 역시 대수령이 독점하고 있다.

대혼세국은 철저한 중앙집권을 지향하며, 국무위원회 산하 기술관료들이 국가운영의 실무를 맡고 있다. 대혼세국의 관료제는 대수령에서 시작해 일선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상명하복 구조로 이루어졌다. 대수령이 바로 아래에 있는 입법, 행정, 사법 부서에 권한을 부여하면 각 부서는 하위 부서에 적당한 권한을 분할하고, 하위 부서는 주어진 권한을 활용해 대수령의 지시를 수행한다. 하위 부서가 상위 부서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의견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결정권은 상위 부서에 있으며, 무엇보다 해당 의견에 대한 대수령의 의중이 가장 우선시된다.

대혼세국의 모든 정부부처와 국가기관은 대수령의 의중을 수행하기 위한 장치이며, 그 인사들 역시 대수령의 일개 부속품이다.

대수령

대수령은 대혼세국의 국가원수다. 대수령은 군 통수권과 지휘권, 국가의회에서 가결된 법안의 재가권, 국무위원회 수반 국무상 예하 국무위원과 국가법원 판사의 임명권, 주요 정부기관에 대한 인사권, 정책 및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보유하고 있다. 대수령은 입법, 행정, 사법보다 상위의 직책이며 초법적인 권력을 가진다. 또한, 대수령은 국가원수로써의 직책 뿐 아니라 군의 최고사령관으로써의 직책도 겸해 군권을 장악했다.

대수령에게는 의회의 법안이나 국무위원회를 통한 정책수행 외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수단인 '교시'를 내릴 수 있다. 교시란 행정명령에 해당되는 국가원수의 지시사항으로, 대수령의 교시는 대혼세국의 국정활동과 자원분배에 있어 가장 최우선순위에 배당된다.

대수령의 임기는 자의로 사임하거나 사망하지 않는 이상 영구히 보장되는 종신직이다. 대수령의 사임,유고 등으로 대수령 직책이 공석이 될 경우, 사전에 대수령이 정해둔 승계 서열을 통해 가장 높은 순위에 있는 인물이 대수령의 직위를 물려받아 차기 대수령이 된다. 만약 승계서열이 정해지지 않거나, 동일한 승계 서열이 다수 있을 경우에는 선출회의를 거쳐 차기 대수령을 선출한다. 승계 서열을 정하는 과정과 선출회의가 있을 때 까지 다양한 밑작업과 암투가 벌어지며, 이 모든것에서 살아남은자가 대수령의 자리에 오른다.

국가의회

국회라고도 불리는 국가의회는 대혼세국의 입법기관이자 의회의 역할을 맡는다. 국가의회는 단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소선거구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의원을 선출한다. 국가의회의원의 임기는 5년으로, 5년마다 1번씩 국가의회 총선을 실시한다. 만 18세 이상의 대혼세국 시민권을 보유한 '대혼인'이라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지고 있으며, 총선은 직접선거로 진행된다.

명목상 국무상을 비롯한 국무위원과 주요 정부인사 임명에 국가의회의 동의가 있어야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유명무실하다.

국무위원회

국무위원회는 대혼세국의 행정부로, 정부수반인 국무상은 내각의 총리에 해당되는 직위로써 국무위원장을 겸한다. 국무상은 대수령에 의해 임명되며, 장관급에 해당되는 국무위원회 위원을 비롯한 주요 정부부서 인사들에 대한 임명권과 정책활동 집행에 필요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국가법원

국가법원은 대혼세국의 사법기관이다. 지방법원, 고등법원, 최고법원 등 산하에 각 법원을 두고 있는 재판소와 검찰수사를 담당하는 감찰소로 구성되었다. 대혼세국의 형법은 속지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범법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온정도 불허하는 엄벌주의를 채택했다. 법 집행 과정에서 인권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고, 사형과 같은 극형도 거리낌없다.

경제

대혼세국의 전신인 대고선국은 메가코퍼레이션 상고 그룹이 황실로써 국가 전체를 소유한 기업국가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용계남이 대고선국을 전복시키고 대혼세국을 세우면서, 용계남은 상고그룹의 자산을 압류한 뒤 국가 주도하의 계획경제를 진행했다.

경제제도

대혼세국의 경제제도는 국가자본주의와 개발독재에 입각하였다.

주요산업

대혼세국의 공업단지

대혼세국의 산업은 전쟁경제 유지를 위해 최적화되었다. 대혼세국의 주요산업은 군수공업 및 중공업에 집중된 것 처럼 보이지만, 농업과 소비재 경공업 역시 '보급물자'의 일환으로 중시된다.

농업의 경우 정부차원에서 농민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중장비 대여를 비롯한 현대화 지원을 통해 육성/보호받아왔으며, 정부에서 농산물을 구매한 뒤 부담없는 가격으로 공급한다. 곡물 외의 어육류와 과채류를 공급하기 위해 배양육과 수경재배 플랜트를 통한 '공장식 농업' 역시 대혼세국 농업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러한 식량생산체계를 바탕으로 대혼세국은 식량자급을 이루어냈다.

대혼세국의 차량, 항공기, 우주선, 로봇을 비롯한 공산품은 군수공업과 연관성이 높은 만큼, 군용장비 사양의 성능과 생산성이 민수용에도 적용되었다. 그래서 대혼세국 제품은 은하계 시장에서 신뢰성과 내구도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사회

수용소

대혼세국 형무소.

대혼국에는 다양한 종류의 수용소가 있다. 대혼전쟁 이후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구체제 인사들의 숙청을 위해 설립한 것이 그 시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형무소, 대혼세국 체제 및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여겨지는 인물들을 수감하는 정치범 수용소, 존재의 물리적, 정신적, 사상적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멸살 수용소 등이 있다.

수용소 수감자들은 생존 및 노동에 필요한 식사와 물자만을 배급받으며 무급여 강제노동, 인체실험, 세뇌교육 등의 대상이 된다.

정치혐오

대혼국은 의회로 대표되는 정치권과 관료층에 대한 혐오를 대대적으로 조장했고, 대수령과 그의 지지기반인 군부의 영웅화를 병행해 여론 스스로가 대수령을 찬양하고 받아들이도록 조정했다.

반종교주의

“신은 더 이상 너희들의 편이 아니다.”

대혼국은 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며, 반종교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초대 대수령 용계남은 대고선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종교계의 부패, 비리를 명분삼아 종교란 기득권의 권력에 야합하여 이를 정당화하는 사기이기에 최우선 말살대상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대혼전쟁 이후 모든 종교인은 즉결처분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종교시설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대혼국에서 종교인의 입국은 금지되며, 적발 시 내국인은 즉결처분 혹은 노역형, 외국인은 국외추방당한다.

종교인들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있고, 평신도 / 종교인 / 핵심 간부 / 교주 순으로 금액과 포상이 높아진다. 교육 및 언론, 문화매체 역시 종교의 폐해와 권력과의 야합/유착을 다루어 종교에 대한 적개심을 배양한다.

문화

대혼세국은 문화적으로 한,중,일을 비롯한 동북아시아권이 혼재된 양상이다. 그러나 사회 공통적으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계이다.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한글/한자를 병행하지만 한글에 우선권이 있다. 인물 작명 및 한자를 읽는 법도 한국식 한자 독음을 채택했다. 그나마 일본계가 독자적인 발음과 가나문자 등을 보전하고 있으며, 이런 케이스는 소수민족 같은 분류로 여겨진다. 한자 작명이 아닌 이름은 한국이름으로도 쓰이는 것으로 정해야 한다.

군사

대혼세국은 군국주의 병영국가로써, 그 중심에는 대혼세국의 군대인 대혼세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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