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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페이트 신시가지의 마천루 전경

라리마 지도

세계지도에서의 라리마 지도
라리마 전도

개요

이 문서는 가상 국가인 라리마 제국의 설정상 역사를 서술합니다.

개척 이전

러시아가 도달하기 전 캄차카, 아니안 섬에서 살았던 이텔멘인

러시아제국대영제국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에는 별다른 문명이나 문화가 발생하지 못했다. 셀레스틴에는 기원후 1200년, 러스트라스에는 기원후 1600년부터 하와이에서 폴리네시아인이 당도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들의 문화는 하와이 문화와 다르지 않았다. 캄차카 바로 아래에 있는 아니안 섬에는 오래 전부터 이텔멘인[1] 들이 살고 있었다. 이텔멘인들은 캄차카의 강줄기를 따라 정착 생활을 하다가 아니안 섬에 넘어왔으며, 겨울추위를 피하기 위해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흙을 파고 짚을 덮어 반지하 생활을 하고 여름에는 나무로 지은 고상가옥에서 생활했다. 종교 또한 캄차카 이텔멘인들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안 이텔멘인들은 주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여성들은 과일, 잎 등을 채집해 차를 우려 먹는데 사용했다. 러시아의 도달 당시 아니안 이텔멘인들은 1만명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며, 축치캄차카어족에 속한, 특히 이텔멘어와 매우 가까운 라리마어를 사용했다. 라리마 섬에는 원주민이 거의 살지 않았다. 퉁구스인이 도달했는지는 가설이 분분하며,[2] 라리마 남부에 극소수의 미크로네시아인들이 살았다.

개척기

아니안 섬 탐험 당시 원주민들을 그린 그림과 지도
그 꼬마는 나에게 다가와 '라리만타'라는 이상한 말을 남긴 채 저 멀리 사라졌다.
Этот малыш подошел ко мне и исчез туда, оставив странное слово 'Лариманта'.
비투스 베링의 일기 中

라리마 지역이 처음 발견된 것은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1728년 비투스 베링의 1차 캄차카 탐험 당시 아니안 섬이 발견되었다.비투스 베링은 당시 베링 해협의 옛말인 아니안 해협 의 이름을 따와 아니안 섬이라고 작명했다. 또한 아니안 섬에 베링의 배가 잠시 정박했을 때 한 원주민 아이가 궁금해하며 배에 접근해 지역어[3]로 “안녕” 이라는 뜻의 “라리만타” 라고 말한 것이 현재 라리마의 이름 유래가 되었다. 또한 1741년 베링의 대북방 원정[4] 당시 라리마 제도가 발견되었다.[5] 라리마 제도가 발견되자 소수의 러시아 정착민들이 라리마 지역으로 이주했다. 또한 베링이 죽고 난 후 후속 탐험대에 의해 1757년 러스트라스 제도가 발견되었다. 한편 셀레스틴 섬은 제임스 쿡 선장이 지도하는 3차 항해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아니안 섬의 정착지는 북부 평원에 건설되었고, 라리마 섬의 최초 정착지는 1744년 현재의 멀리니아 지역에 처음 건설되었다. 한편 영국은 셀레스틴 섬을 죄수 수용소로 쓰려고도 검토했으나, 뉴사우스웨일스[6]에 밀리고, 셀레스틴 섬은 방치되다가 러시아인들이 들어오게 된다.

1800년대

1754년에 제작된 지도. 캄차카와 아메리카 사이에 라리마가 묘사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라리마 제도와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 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1800년에는 2000명 가량의 주민이 러시아로부터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후는 캅카스 수준은 아니였지만 따뜻하고 곡물이 자라기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은 부동항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1812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함께 멀리니아, 포스페이트를 도시 지위로 격상시켰으며, 당시 멀리니아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의 본부가 위치했다. 기후가 더웠던 셀레스틴에도 정착촌들과 요새가 세워졌다. 1830년대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라리마 제도를 분리해 러스트라스, 셀레스틴과 함께 라리마를 개별의 주로 만들었고 멀리니아가 주도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는데, 1834년 라리마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 러쉬가 일어나 1840년 라리마의 인구는 무려 800%가 증가해 32,000명이 되었다.[7] 1854년 크림 전쟁의 일부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와 더불어 라리마 또한 영국-프랑스군의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멀리니아와 포스페이트 지역에서 공성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이어졌고 러시아제국군은 203명, 영불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낸 채 러시아가 방어에 성공했다.[8] 같은 시기 러스트라스 군도에서도 해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격퇴에 성공했지만, 이틀 후 러시아제국의 최남단 셀레스틴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방어에 실패하여 섬이 함락되었고, 이후 파리 조약에서 러시아제국은 셀레스틴을 영국에게 내어주어야 했다.[9] 867년 러시아는 아메리카를 미국에게 매각했지만 라리마는 매각하지 않았고, 1889년에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본대가 라리마에 위치한다. 라리마 제도는 골드러쉬와 맞물려 꾸준히 서장했으며 1800년대 태평양 무역에서 많은 수익을 벌어들여 주도 멀리니아는 "태평양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라고 불렸다.[10]

러일전쟁

1904년 멀리니아항에서 출항하는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군함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라리마 또한 전장이 되었다. 러시아제국의 라리마 태평양 함대도 동원되어 1904년 8월 29일 일본의 수도 도쿄를 공격하러 향하고 있었으나 일본 이바라키현 앞바다에서 때마침 라리마를 공격하러온 일본의 함대와 마주쳐 이바라키 해전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으며 라리마 함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의 피해 또한 막심하여 당장 라리마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지만, 1905년 1월 3일 재정비를 마친 일본의 함대와 러시아제국군이 노보이마르마라 해에서 격돌한 노보이마르마라 해전이 일어난다. 러시아제국이 수적으로는 유리했으나 러시아에게 불리했던 기상 상황 등으로 밀리게 되고 일본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다이어스포어 섬을 일주일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울렉시안 해협[11]을 통해 다이어스포어와 마주보고 있던 당시 라리마 제도의 주도 멀리니아는 직접적인 포격을 받았다. 그러나 뒤이어 러시아제국에 의해 1월 11일 다이어스포어는 다시 러시아가 점령하게 되었는데, 1월 8일 이 과정에서 다이어스포어 화산의 용암이 흘러내리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12] 전투가 일어나 양측 총 4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를 1차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라고 한다. 또한 전쟁 후에는 일본인을 사이에서 연해주, 캄차카와 함께 라리마 또한 할양받아야한다는 여론이 잠시 생기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의 전함

라리마 제도는 1차대전 당시에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러시아제국의 서부전선에서는 동맹국과의 끊임없는 전투가 발생했지만, 라리마 제도는 전장에 속하지 않았다. 러시아제국 라리마 태평양 함대는 북대서양에 파견되어 독일군과 몇 차례의 교전을 벌였고, 뉴기니, 미크로네시아, 마셜과 사모아 점령이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라리마 제도 러시아인들이 유럽 전선에서 싸웠으며, 라리마의 자원은 군수품 생산에 활용되었다. 또한 영국과 미국 관료들과의 회담 장소로도 간혹 쓰였다.

러시아 내전, 국부천대

수송선에 쓸 연료를 운반하는 포스페이트항의 열차
제국은 무너졌지만, 제국의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Империя пала, но клетка Империи - нет.
러시아 백군의 장군, 아나톨리 페펠라예프

1차 세계대전에서 온 힘을 다했던 러시아제국이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피로와 그동안의 곪아왔던 사회 문제로 인해 반황제주의자들은 1917년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임시정부를 세운다. 이에 라리마 제도 또한 임시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계속되는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간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내전, 적백내전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백군이 승기를 잡을 듯 하다가, 1919년 12월을 기준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 백군(러시아 공화국)은 수도를 멀리니아로 옮겼으며 러시아 백군 정부는 이곳에서 가동하게 된다. 극동마저 적군의 손에 넘어갈 기미가 보이자 러시아 백군의 주요 인원들은 1919년 9월 9일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 대철수를 진행했다. 이후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러시아 전역에 퍼진 백군 잔여군들을 컨트롤했다. 캄차카 반도를 차지한 적군은 백군의 점령지였던 아니안 섬에 수백 차례 공격을 가하지만 러시아 백군은 7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아니안 섬을 지켰고 이는 17차 아니안 공격[13]을 마지막으로 1923년 9월에 종료되었다.[14] 적군은 라리마 제도에도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다. 또한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1922-1923년 페펠라예프 장군의 군대와 연해주의 백군을 직접적으로 지휘, 지원했으며 이 두 지역이 함락당할 때 수 차례의 대규모 망명이 이루어졌다. 또 라리마 제도에서도 병력을 파견해 마가단을 잠시 점령했으나 한달을 가지 못하고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과 볼셰비키 적군 간의 직접적인 전투는 1926년 '랑겔 섬을 적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끝이 났으며,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볼셰비키를 지원했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왕정주의자, 공화주의자, 자본주의자, 몐셰비키 등의 혼합체였으나 여러 차례의 회의를 통해 망명해 있던 니콜라이 2세의 사촌,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15]을 황제로 올려 러시아제국을 복원시키기로 합의한다.[16] 1925년 7월 18일 키릴 대공이 키릴 1세로 즉위함으로써 러시아제국은 라리마 제도와 아니안 섬, 러스트라스에서 복원되었다. 다만 황제는 실권이 없고 국가는 의원내각제로써 운영되며 철저한 민주주의 체재를 따랐다. 첫 총리는 케렌스키였고 공산권을 경계하던 많은 서구권 국가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았으며 라리마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일종의 체재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17] 또한 1927년 더 좋은 입지를 가진 포스페이트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상술했다시피 라리마 백군은 본토에서의 내전이 끝났을 당시에도 코만도르스키예 제도, 우랑겔 섬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코만도르스키예 제도는 1924년, 우랑겔 섬은 1926년 소련에게 탈환당하고 아니안 섬만 남게 되었다.[18]

각주

  1. 라리마의 이텔멘인들이 라리마어의 화자들이다.
  2. 아니안 섬의 이텔멘인들에게는 퉁구스계 유전자가 간혹 발견된다.
  3. 현재의 라리마어
  4.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Northern_Expedition
  5. 라리마라는 이름은 아니안 섬의 언어에서 유래한지라 처음에는 "극동 남방 도서 지역"을 뜻하는 말로 불리곤 했고, 쿠릴 열도 역시 "라리마"에 속할 때도 있었으나 1900년대에 들어서 라리마 제도를 의미하는 말로 굳어졌다.
  6.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아
  7. 이후 라리마의 인구는 잭백내전 전까지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었다.
  8. 아니안 섬은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같이 함락되었다
  9. 이후 러시아제국은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소실하였다.
  10. 당시 아니안 섬은 라리마 제도가 아니라 캄차카 지방에 속해 있었다
  11. 다이어스포어 섬과 라리마 섬 북부 사이에 있는 해협
  12. 다이어스포어 화산은 하와이식 분화 화산이다
  13. 전간기와 냉전기에 이루어진 공격은 "아니안 N차 위기" 로 불린다
  14. 이후 아니안 섬은 끝까지 남아 라리마의 진먼이 된다
  15.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Duke_Kirill_Vladimirovich_of_Russia
  16. 백군에 가담한 몐셰비키 측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
  17.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만 해도 경제력, 정통성, 인지도, 대외 이미지, 군사력은 라리마(러시아제국)이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8. 코만도르스키예 제도는 현재까지도 영유권 분쟁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