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마의 역사

베릴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2월 10일 (목) 13:50 판
포스페이트 신시가지의 마천루 전경

라리마 지도

세계지도에서의 라리마 지도
라리마 전도

개요

이 문서는 가상 국가인 라리마 제국의 설정상 역사를 서술합니다.

개척 이전

러시아가 도달하기 전 캄차카, 아니안 섬에서 살았던 이텔멘인

러시아제국대영제국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에는 별다른 문명이나 문화가 발생하지 못했다. 셀레스틴에는 기원후 1200년, 러스트라스에는 기원후 1600년부터 하와이에서 폴리네시아인이 당도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들의 문화는 하와이 문화와 다르지 않았다. 캄차카 바로 아래에 있는 아니안 섬에는 오래 전부터 이텔멘인[1] 들이 살고 있었다. 이텔멘인들은 캄차카의 강줄기를 따라 정착 생활을 하다가 아니안 섬에 넘어왔으며, 겨울추위를 피하기 위해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흙을 파고 짚을 덮어 반지하 생활을 하고 여름에는 나무로 지은 고상가옥에서 생활했다. 종교 또한 캄차카 이텔멘인들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안 이텔멘인들은 주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여성들은 과일, 잎 등을 채집해 차를 우려 먹는데 사용했다. 러시아의 도달 당시 아니안 이텔멘인들은 몇천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며, 축치캄차카어족에 속한, 특히 이텔멘어와 매우 가까운 라리마어를 사용했다. 라리마 섬에는 원주민이 거의 살지 않았다. 퉁구스인이 도달했는지는 가설이 분분하며,[2] 라리마 남부에 극소수의 미크로네시아인들이 살았다.

개척기

아니안 섬 탐험 당시 원주민들을 그린 그림과 지도
그 꼬마는 나에게 다가와 '라리만타'라는 이상한 말을 남긴 채 저 멀리 사라졌다.
Этот малыш подошел ко мне и исчез туда, оставив странное слово 'Лариманта'.
비투스 베링의 일기 中

라리마 지역이 처음 발견된 것은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1728년 비투스 베링의 1차 캄차카 탐험 당시 아니안 섬이 발견되었다.비투스 베링은 당시 베링 해협의 옛말인 아니안 해협 의 이름을 따와 아니안 섬이라고 작명했다. 또한 아니안 섬에 베링의 배가 잠시 정박했을 때 한 원주민 아이가 궁금해하며 배에 접근해 지역어[3]로 “안녕” 이라는 뜻의 “라리만타” 라고 말한 것이 현재 라리마의 이름 유래가 되었다. 또한 1741년 베링의 대북방 원정[4] 당시 라리마 제도가 발견되었다.[5] 라리마 제도가 발견되자 소수의 러시아 정착민들이 라리마 지역으로 이주했다. 또한 베링이 죽고 난 후 후속 탐험대에 의해 1757년 러스트라스 제도가 발견되었다. 한편 셀레스틴 섬은 제임스 쿡 선장이 지도하는 3차 항해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아니안 섬의 정착지는 북부 평원에 건설되었고, 라리마 섬의 최초 정착지는 1744년 현재의 멀리니아 지역에 처음 건설되었다. 한편 영국은 셀레스틴 섬을 죄수 수용소로 쓰려고도 검토했으나, 뉴사우스웨일스[6]에 밀리고, 셀레스틴 섬은 방치되다가 러시아인들이 들어오게 된다.

1800년대

1754년에 제작된 지도. 캄차카와 아메리카 사이에 라리마가 묘사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라리마 제도와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 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1800년에는 2000명 가량의 주민이 러시아로부터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후는 캅카스 수준은 아니였지만 따뜻하고 곡물이 자라기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은 부동항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1812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함께 멀리니아, 포스페이트를 도시 지위로 격상시켰으며, 당시 멀리니아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의 본부가 위치했다. 기후가 더웠던 셀레스틴에도 정착촌들과 요새가 세워졌다. 1830년대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라리마 제도를 분리해 러스트라스, 셀레스틴과 함께 라리마를 개별의 주로 만들었고 멀리니아가 주도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는데, 1834년 라리마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 러쉬가 일어나 1840년 라리마의 인구는 무려 800%가 증가해 32,000명이 되었다.[7] 1854년 크림 전쟁의 일부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와 더불어 라리마 또한 영국-프랑스군의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멀리니아와 포스페이트 지역에서 공성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이어졌고 러시아제국군은 203명, 영불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낸 채 러시아가 방어에 성공했다.[8] 같은 시기 러스트라스 군도에서도 해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격퇴에 성공했지만, 이틀 후 러시아제국의 최남단 셀레스틴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방어에 실패하여 섬이 함락되었고, 이후 파리 조약에서 러시아제국은 셀레스틴을 영국에게 내어주어야 했다.[9] 867년 러시아는 아메리카를 미국에게 매각했지만 라리마는 매각하지 않았고, 1889년에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본대가 라리마에 위치한다. 라리마 제도는 골드러쉬와 맞물려 꾸준히 서장했으며 1800년대 태평양 무역에서 많은 수익을 벌어들여 주도 멀리니아는 "태평양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라고 불렸다.[10] 혁명 전까지 라리마 지역은 러시아제국의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다.

러일전쟁

1904년 멀리니아항에서 출항하는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군함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라리마 또한 전장이 되었다. 러시아제국의 라리마 태평양 함대도 동원되어 1904년 8월 29일 일본의 수도 도쿄를 공격하러 향하고 있었으나 일본 이바라키현 앞바다에서 때마침 라리마를 공격하러온 일본의 함대와 마주쳐 이바라키 해전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으며 라리마 함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의 피해 또한 막심하여 당장 라리마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지만, 1905년 1월 3일 재정비를 마친 일본의 함대와 러시아제국군이 노보이마르마라 해에서 격돌한 노보이마르마라 해전이 일어난다. 러시아제국이 수적으로는 유리했으나 러시아에게 불리했던 기상 상황 등으로 밀리게 되고 일본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다이어스포어 섬을 일주일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울렉시안 해협[11]을 통해 다이어스포어와 마주보고 있던 당시 라리마 제도의 주도 멀리니아는 직접적인 포격을 받았다. 그러나 뒤이어 러시아제국에 의해 1월 11일 다이어스포어는 다시 러시아가 점령하게 되었는데, 1월 8일 이 과정에서 다이어스포어 화산의 용암이 흘러내리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12] 전투가 일어나 양측 총 4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를 1차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라고 한다. 또한 전쟁 후에는 일본인을 사이에서 연해주, 캄차카와 함께 라리마 또한 할양받아야한다는 여론이 잠시 생기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의 전함

라리마 제도는 1차대전 당시에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러시아제국의 서부전선에서는 동맹국과의 끊임없는 전투가 발생했지만, 라리마 제도는 전장에 속하지 않았다. 러시아제국 라리마 태평양 함대는 북대서양에 파견되어 독일군과 몇 차례의 교전을 벌였고, 뉴기니, 미크로네시아, 마셜과 사모아 점령이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라리마 제도 러시아인들이 유럽 전선에서 싸웠으며, 라리마의 자원은 군수품 생산에 활용되었다. 또한 영국과 미국 관료들과의 회담 장소로도 간혹 쓰였다.

러시아 내전, 국부천대

수송선에 쓸 연료를 운반하는 포스페이트항의 열차
제국은 무너졌지만, 제국의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Империя пала, но клетка Империи - нет.
러시아 백군의 장군, 아나톨리 페펠라예프

1차 세계대전에서 온 힘을 다했던 러시아제국이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피로와 그동안의 곪아왔던 사회 문제로 인해 반황제주의자들은 1917년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임시정부를 세운다. 이에 라리마 제도 또한 임시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계속되는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간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내전, 적백내전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백군이 승기를 잡을 듯 하다가, 1919년 12월을 기준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 백군(러시아 공화국)은 수도를 멀리니아로 옮겼으며 러시아 백군 정부는 이곳에서 가동하게 된다. 극동마저 적군의 손에 넘어갈 기미가 보이자 러시아 백군의 주요 인원들은 1919년 9월 9일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 대철수를 진행했다. 이후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러시아 전역에 퍼진 백군 잔여군들을 컨트롤했다. 캄차카 반도를 차지한 적군은 백군의 점령지였던 아니안 섬에 수백 차례 공격을 가하지만 러시아 백군은 7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아니안 섬을 지켰고 이는 17차 아니안 공격[13]을 마지막으로 1923년 9월에 종료되었다.[14] 적군은 라리마 제도에도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다. 또한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1922-1923년 페펠라예프 장군의 군대와 연해주의 백군을 직접적으로 지휘, 지원했으며 이 두 지역이 함락당할 때 수 차례의 대규모 망명이 이루어졌다. 또 라리마 제도에서도 병력을 파견해 마가단을 잠시 점령했으나 한달을 가지 못하고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과 볼셰비키 적군 간의 직접적인 전투는 1926년 '랑겔 섬을 적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끝이 났으며,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볼셰비키를 지원했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왕정주의자, 공화주의자, 자본주의자, 몐셰비키 등의 혼합체였으나 여러 차례의 회의를 통해 망명해 있던 니콜라이 2세의 사촌,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15]을 황제로 올려 러시아제국을 복원시키기로 합의한다.[16] 1925년 7월 18일 키릴 대공이 키릴 1세로 즉위함으로써 러시아제국은 라리마 제도와 아니안 섬, 러스트라스에서 복원되었다. 다만 황제는 실권이 없고 국가는 의원내각제로써 운영되며 철저한 민주주의 체재를 따랐다. 첫 총리는 케렌스키였고 공산권을 경계하던 많은 서구권 국가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았으며 라리마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일종의 체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17] 또한 1927년 더 좋은 입지를 가진 포스페이트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상술했다시피 라리마 백군은 본토에서의 내전이 끝났을 당시에도 코만도르스키예 제도, 우랑겔 섬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코만도르스키예 제도는 1924년, 우랑겔 섬은 1926년 소련에게 탈환당하고 아니안 섬만 남게 되었다.[18]

전간기

포스페이트의 1929년 모습
황제 만세! 민주주의 만세!
Да здравствует император! Да здравствует демократия!
시위대

라리마에 정착한 러시아제국은 라리마 지역을 빠르게 안정화시켰다. 러시아제국의 극동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던 라리마의 기반을 바탕으로 본토를 갖고 있었을 때보다 가파른 성장을 이어나갔다. 적백내전을 거쳐 완전히 입헌군주화된 러시아제국은 기존의 개혁파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고,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라리마는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라리마 러시아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전간지 태평양 중계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소련과의 체제경쟁도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아니안 일대에서는 끊임없는 대치상황이 일어났으며 이때는 모든 면에서 둘의 수준이 아직 어느정도 동등했고 본토수복을 진지하게 고려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를 라리마 러시아도 피할 수 없어서, 1931년에 가면 경제가 완전히 곤두박질쳐버린다. 이때 정치계에서는 호황기로 인해 조용하던 공화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는 듯 했으나, 1935년 라리마 러시아에 남아있던 몐세비키가 소련과 협력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 정부에 의해 발각되자 공화주의자들은 여론의 규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몐셰비키는 정치계애서 더이상 손을 댈 수 없게 되었다. 라리마 러시아는 1938년에 되어서야 대공황의 여파에서 겨우 벗어났고, 대공황 중 서방국가들이 앓는 동안 소련은 가파르게 성장해 이미 경제 부분에서는 라리마 러시아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한편 세계정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폴란드가 분할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을 심히 경계하던 라리마 러시아도 미국, 네덜란드, 영국, 중국과 함께 ABCD 포위망에 참여했다.

태평양 전쟁

칼세르 지방[19]에서 진격하는 일본군

1941년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석유와 자원이 있었던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대비하고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곳에 위치한 라리마 제도 또한 필히 점령해야 했다. 라리마 제도를 점령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라리마 제도는 일본 본토를 노릴 수 있었다. 라리마 러시아제국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네덜란드, 영국, 중국 등과 함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 준비를 했다.

1941-1942년

아니안 지역을 공습하는 미쓰비시 G3M 폭격기

아니안 섬

12월 26일, 일본 폭격기가 당시 상당수의 항공기와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아니안 지역의 주도 게오르기-표트르그라드를 폭격하여 아니안 공습이 일어난다. 홋카이도에서 출격한 폭격기는 26일 새벽에 아니안의 공항, 전투기 격납고, 부대와 석유 저장통 등을 폭격했다. 뒤이어 라리마 러시아 국적의 폭격기가 이륙해 항공전을 벌여 일본군 폭격기 3대를 격추하고, 더이상의 폭격이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니안 공습으로 인해 아니안 지역의 제공권을 내줌과 동시에 상당량의 항공 전력이 손실되었다. 이어서 1942년 1월 6일 일본군은 아니안 지역에 상륙을 감행했고 아니안 섬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라리마 제도

라리마 제도의 상황도 아니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안 공습이 진행된 5시간 후에 일본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폭격기가 중추 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포스페이트항에 폭격을 감행했다.이후에도 멀리니아, 플레로보 등에 폭격이 이어지며 라리마의 항공 전력을 무력화했다. 일본군의 제공권, 제해권 장악 후 2월 22일 라리마 제도를 점령하는 세키가하라 작전 이 실행되어 러일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방어가 가장 허술했던 다이어스포어 북부 지역과 칼세르 남부 샬레하르트에 일본군 해병대가 상륙했다. 하지만 러일전쟁 때와는 달리 다이어스포어 방위군은 물론 멀리니아에서 빠르게 4개 전투사단이 도착해 일본군의 진격을 어느정도 저지시켰지만, 칼세르 지역에서의 상황은 일본군이 지역 방위군을 궤멸시키면서 더더욱 나빠졌다. 칼세르의 일본군은 2월 28일 라리마 섬의 정중앙 라리마 고원까지 속전속결로 진격했고, 토리아 남부의 세니딘 반도[20] 와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도 상륙이 들어왔다. 라리마 러시아는 상황이 악화되자 라리마 강, 라리마 고원과 포스페이트 북부를 중심으로 방어을 만들고 멀리니아 지역 또한 계속 저항하였다. 방어선 구축 이후에는 영국, 호주, 미국 또한 라리마 러시아를 적극 지원했으며 라리마 러시아의 존재는 일본의 태평양 진출, 보급에 큰 지속적으로 큰 혼선을 주었다. 한편 일본 제국은 라리마 지역에 당시 황제였던 블라디미르 3세의 사촌동생 이고르 대공을 왕으로 앉히고 러시아왕국 이라는 괴뢰국을 설립했다. 라리마 강과 라리마 고원의 경우에는 자연지물이 막고 있어 쉽사리 뚫리지 않았지만, 포스페이트 북부는 드넓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포스페이트 북부 전선에는 양 측이 밀고 밀리다가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호전이 재현되기도 했다. 1942년에만 포스페이트 북부에서 30만명이 죽었다.

러스트라스와 셀레스틴

러스트라스와 셀레스틴에서도 전투가 일어났다. 2월 1일 러스트라스에서 일본군이 상륙을 시도해 5개 섬 중 2개 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1942년 2월 5일에는 영국령 셀레스틴에 상륙시도가 있었지만 저지당했다. 곧이어 2월 8일 연합군이 러스트라스 또한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1943-1945년

볼쇼이 전투 도중 진격하는 연합군

아니안 지역

미군이 1943년 8월에 이르러 아니안 섬 옆의 알류샨 열도의 섬을을 전부 탈환했지만 아니안 섬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아니안 섬은 1943년 9월 라리마 제도의 전세가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자 재탈환되었는데, 당시 아니안 섬을 넘보고 있었던 소련이 라리마 러시아가 아니안 섬을 탈환하자 전함을 보내 여기는 자기 땅이라며 훼방을 늘어놓았다. 양측은 서로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땅을 사수한 것 뿐이라며 날을 세우기도 해 같은 연합군이었지만 적국 관계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라리마 러시아는 후에 소련의 남사할린쿠릴 열도 점령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으며, 소련 정부는 라리마의 재수복은 백군 반군에 의해서가 아닌 소비에트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항의했다.

라리마 제도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었다. 일본군의 진격 또한 주춤하게 되었지만 라리마에서만큼은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 방어선을 뚫으려 했고, 1943년 1월 1일 오스토르브 섬[21]이 일본군에게 함락된다. 그러나 전선은 교착 상태에 있었고, 양측의 피해 또한 너무 막심했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라리마 지역을 차지해야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라리마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1943년 5월 2일 라리마의 주요 시설이 있는 볼쇼이 시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면서 라리마 강 방어선이 뚫린다. 뒤이어 뵬쇼이 시 좌측의 모프 시 또한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황궁과 정부청사가 있는 볼쇼이 시는 포위되어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세로 뵬쇼이 시 또한 일본군에게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볼쇼이 시가전 진행 당시 황궁에 폭탄이 떨어져 차르 블라디미르 3세가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라리마 러시아군은 4만명의 사상을 감수하고 일본군 점령지를 뚫어내 포스페이트 북부에 있었던 연합군 점령지와 닿게 되었다. 뒤이어는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라리마 러시아군과 미군은 울렉시안 해협[22] 의 주요 거점에 상륙하여 포위당한 멀리니아와도 전선을 이었다. 1943년 11월 13일에는 미메타이트 지역이 완전히 연합군의 수중 아래에 들어갔고 남은 것은 칼세르 남부와 토리아, 우라니아 뿐이었다. 다이어스포어는 1943년 8월 연합군의 반격으로 재탈환했는데, 40년 전 러일전쟁 당시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가 일어난 다이어스포어 고지에서 한번 더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고 라리마 러시아군은 2차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에서는 1차 다이어스포어 고지 전투의 사상자의 3배 가까이 사상자를 낸 끝에 다이어스포어가 탈환되었다. 1944년이 되자 라리마 러시아군은 러일전쟁부터 이어진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계획했고 작전의 이름은 쓰시마 해전에서 시작된 복수라는 의미를 담아 쓰시마 작전 으로 명명되었다. 2월 22일, 일본의 라리마 침략 2년이 되는 말에 우라니아, 세니딘 반도와 부속도서 34곳에 라리마 러시아군이 상륙을 진행했으며 20만에 달하는 병력이 라리마 강을 넘어 진격했고 수많은 전투기가 일본군의 기지에 생화학무기와 폭탄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이 상황에서 임시로 후퇴해야 했지만 오세아니아의 섬들이 미군에게 점령당하는 와중에 라리마를 잃을 순 없다고 잘못 판단하여 진격을 시도했고 대부분이 궤멸당했다. 라리마군은 빠르게 진격했지만 그 와중에 포로 잡은 일본군을 전부 학살하고 시체를 일본군 진지에 던지는 등의 잔혹한 공격 수법도 사용해 비난받기도 했다.1944년 7월 마지막 일본군 점령지가 함락됨에 따라 라리마 제도의 전투는 끝이 났고, 라리마 제도에서만 라리마인 70만명이 사망했다.

러스트라스와 셀레스틴

셀레스틴에서는 1943년 12월 영국군과 일본군 간의 해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영국군이 열세인 듯 보이다가 라리마 러시아군과 미군의 합세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태평양전쟁의 종전

라리마 러시아의 영토에서 일본군이 추방당하자 라리마 러시아는 방어한느 쪽에서 공격한느 쪽으로 상황을 변환한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라리마는 이오지마 등을 탈환하기 전까지 일본의 군사기지를 폭격한느 역할을 해주었으며, 연합국은 일본 본토로 여러 차례의 공습을 퍼부었다. 라리마 제도가 없었다면 태평양전쟁은 2-3개월 더 길어졌을 것이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히로히토가 옥음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면서 태평양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라리마 러시아는 승전국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피해가 심했던 국가였다. 수도 포스페이트를 포함해 수많은 옛 건물들과 기반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농지는 생화학무기와 폭탄으로 엉망이 되어 이를 제거하는데 큰 힘이 들었다. 또한 태평양전쟁을 기점으로 라리마 러시아와 소련의 경제 격차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면서 체제 경쟁에서 패배하였다. 태평양전쟁의 진행 후 유럽의 마셜 플랜과 같이 라리마 또한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냉전

1940-1950년대

1950년대의 포스페이트 항구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었다. 동유럽 지역에서는 철의 장막이 씌워졌으며 동아시아에서는 국공내전의 재발발과 한반도와 독일의 분단이 이루어졌다. 트루먼 독트린의 선언과 함께 유럽 국가들과 같이 라리마 러시아도 미국으로부터 재건을 지원받아 빠른 속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소련에서는 여전히 라리마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냉전의 폭풍 속에서 라리마 러시아가 타오르는 떡밥이 될 것은 뻔했다. 종전 이후, 특히 캄차카에 붙어있는 아니안 섬에 대한 주장이 매우 거세졌다. 소련은 라리마 러시아의 아니안 섬에 시도때도 없이 함대를 끌고 와 무력시위를 벌이곤 했고 라리마는 때마다 경고사격을 하며 굉장히 강경하게 대응했다. 양측 모두 자신들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던지라 대화는 당연히 통하지도 않았다. 결국 소련은 1948년 6월 25일 독일에서의 베를린 봉쇄 다음날에 태평양 함대를 동원해 아니안 섬을 해상봉쇄했다. 베를린 봉쇄와 아니안 봉쇄[23]가 시작되자 미영프 3국은 크게 당황했지만 베를린 공수와 마찬가지로 아니안 공수작전 또한 실행되어 라리마 섬, 앵커리지와 홋카이도에서 이륙한 미국과 라리마 러시아의 항공기가 아니안 섬에 물자를 실어날랐다. 총 7만 1283회의 항공기 수송이 진행되었으며 [24] 결국 소련은 베를린 봉쇄 해제와 같은 날인 다음해 5월 12일에 아니안 지역에 대한 해상봉쇄를 풀 수밖에 없었으며 아니안 해상봉쇄의 결과로 라리마 러시아 정치계에서는 반공 강경파들이 정권을 잡았고, 아니안 지역에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이 주둔하는 결과를 불렀다. 이에 더해 아니안 봉쇄로 인해 1950년 에치슨 라인에서는 아니안 섬을 포함한 라리마의 전 영토가 선 안쪽에 포함되어 있었고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라리마 러시아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으며 1949년에는 대만이 국부천대를 감행하면서 라리마 러시아와 같은 케이스가 생기게 되었다.

1950년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 안보리는 남한에 병력을 급파한다. 라리마 러시아도 한반도의 5000명 규모의 병력을 파견해 전쟁을 도왔다. 1950년대 라리마 러시아에서는 반공주의 우익 정당, 러시아 군주제 연합이 집권했고, 노시안 지역과 포스페이트 북부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외교적으로 일본과 독일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지만, 공산권 국가들에게는 국가인정을 받지 못했다.[25] 1950년대에 라리마 러시아군는 계속 증강되었고, 라리마 러시아 또한 베이비붐을 맞아 전쟁으로 잃은 인구가 금세 회복됨을 넘어서 가파른 속도로 증가했다. 1952년 세베로쿠릴스크 지진의 여파로 라리마 러시아의 아니안 지역이 초토화되어 많은 피해가 있었다.

1960-1970년대

1970년대 포스페이트 지하철

1960년대

1559년 쿠바 혁명이 일어나고 쿠바에 공산정권이 세워졌다. 3년 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는 아나디르 계획의 실행으로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합의했으며, 이는 미국에게 있어 크나큰 위기 소식이었다. 쿠바의 미사일 배치가 확인되자 미국은 쿠바를 봉쇄했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이를 무시하며 핵잠수함을 동원해 선박을 쿠바로 진입시키자, 미국은 라리마 아니안 지역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한다.[26] 아니안 지역에 배치된 미사일은 소련의 극동 군사도시와 비밀도시를 모두 타격할 수 있었고, 소련 정부는 격분했으며 1962년 10월 24일 소련 함대가 2차 아니안 해상봉쇄를 시작했다.[27] 이에 라리마 러시아 정부는 아니안의 군함을 보내 소련의 함대와 대치하게 하였다. 이에 미국은 데프콘 2를 발령했고 라리마 러시아군 역시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라리마의 극단주의자들은 당장이라도 소련을 침공할 것만 같이 본토 수복론을 주장했다. 상황이 커지자 흐루쇼프는 이탈리아, 터키, 라리마의 미사일을 철수하면 자신도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하겠다 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주피터 미사일을 3국에서 철수했다. 당연히 라리마 러시아 측에서는 미사일 철수에 관해 극구 반대했지만 미사일은 철수된다. 소련 또한 해상봉쇄를 해제했다. 이는 라리마의 독자적 미사일 개발과 비밀리에 이루어진 핵개발의 시작이 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반공주의 정당이 집권했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한 미국에 대한 실망이 겹쳐 1960년대 후반에는 최초로 진보 정당인 진보당 이 집권했다.1960년대는 라리마 러시아가 가장 가파른 성장을 이뤄낸 시기이기도 하고 라리마 러시아에서는 유럽과 어느정도 비슷한 기후로 인해 밀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는데, 1960년대에 들어 라리마 러시아의 기후에 최적화된 밀이 개발되었다. 라리마의 주요 고속도로와 포스페이트의 지하철은 1960년대에 개통되었으며 교통 인프라가 크게 좋아졌다. 이미 체제 경쟁에서 진 상황에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 1950~1980년대에 독립한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상대로 소련과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1970년대

1971년 대만이 유엔에서 퇴출되었다. 대만은 국부천대 이후로 점점 많은 국가들에게 단교당하고 있었는데, 1971년 알바니아가 발의한 대만 퇴출 의결안이 가결됨에 따라 대만이 쫓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대만이 축출되자 라리마 러시아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차하면 자신들도 쫓겨날 수 있었고 그 상대는 당시의 후진국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초강대국 소련이었다. 당시 집권당인 진보당은 진보파였지만 러시아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무리라며 반대하고 있었지만, 당시 진행되던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라리마 러시아만 극단적인 적대를 유지하는 것도 무리수였다. 그렇게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상황에 1972년 5월 라리마 러시아 국적의 순찰함이 그것도 실수로 소련의 영해를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나고,[28] 단 라리마 러시아는 즉시 유감을 표했지만, 소련 정부는 이를 꼬투리 삼아 아니안 섬을 또 봉쇄하고 3차 아니안 위기가 발발했다. 소련도 이번에는 자신에게 있어 앓는 이였던 라리마 러시아를 작정하고 매장하기로 했는지, 3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라리마와 외교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아니안 봉쇄는 23일만에 해제되었지만 냉각된 관계와 외교전은 오히려 더 치열해졌고 회담은 매번 결렬되었다.[29]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달아 소련 정부가 1972년 12월 유엔 안보리에서 라리마 러시아 퇴출을 시도하기까지 이른다. 당시 유엔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공, 소련이었고 비상임이사국은 기니, 인도, 파나마, 수단, 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 벨기에, 이탈리아, 일본, 소말리아였는데 이중, 기니, 인도, 유고슬라비아, 수단,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소말리아, 프랑스, 아르헨티나가 찬성해 라리마 러시아는 대만과 똑같이 유엔에서 퇴출될 뻔 했으나 상대국인 소련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이 시장 교류를 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고 데탕트 시기라 할지라도 적국은 적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겨우 실행되지 않았다. 라리마 러시아 퇴출 시도는 라리마 러시아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고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여론에 자리잡았고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정치인이 동의할 정도였다. 이에 나온 대안이 국명 변경 이었으며 라리마 러시아 정치계에서도 많은 논의가 이어졌다. 국민 또한 대부분 찬성했다. 마침내 1973년 6월 15일 진보당을 중심으로 개헌이 이루어졌고[30] 국명은 러시아제국에서 라리마제국으로 변환이 이루어졌으며, 국기 또한 후의 투표를 통해 러시아제국기에서 라리마 삼색기로 바뀌었다. 1917년 러시아제국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철회되었다. 국명 변경은 서방국에서도 환영했으며 라리마제국은 그동안 소홀하게 했던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당장의 외교적 성과로 1973년 라리마제국은 유고슬라비아, 몽골과 수교를 이루어내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가 개선되었다.소련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되었지만, 양측이 대화를 거부했기에 성과는 없었다. 국명 변경은 단지 국가의 이름을 바꾸는 것 뿐이며 새로운 국가가 되거나 정통성 계승 의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라리마 정부가 밝히기도 하였기에 소련 입장에서는 여전히 분개할 대상이었다. 또한 1978년 영국에서 독립한 러시아계 주민들이 다수였던 셀레스틴자유 연합 을 이루며 현재의 영토가 확립되었다. 1970년대의 여담으로, 1971년 미메타이트의 한 광산에서 팩톨라이트(Pectolite)의 하늘색 변종이 발견되어 국가의 이름을 따 "라리마(Larimar)"라고 명명되었고,[31]라리마는 1979년 OECD에 가입하였다.

1980-1990년대

80년만에 적백내전의 종식을 알리는 두 국가정상

1980년대

1980년대는 라리마제국에 있어서 외교적인 성과가 많았던 시기이다. 나-소 관계의 경우 소련의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얼어붙었던 외교상황이 조금씩 녹으면서 평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내부적인 상황을 먼저 설명하자면 대규모의 행정구역의 개편이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고, 노시안 신도시의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1985년에 라리마는 대만과의 관계를 끊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으며, 특히 1989년부터는, 유럽의 동구권 국가들이 단체로 무너지기 시작하며 라리마의 외교부도 바쁘게 돌아갔다.

1990년대

1991년 크리스마스, 라리마제국의 오랜 적이자 세계 역사에 한 시대를 장식했던 소비에트 연방 이 한순간에 붕괴되었다. 라리마는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동구권 국가들과 1993년까지 관계 정상화를 완료했으며, 북한과도 수교를 맺었다.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와는 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1993년과 1995년 각각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포스페이트네서 양자간 회담이 개최되었고, 아니안 해협의 문제와 이산가족들에 관한 논의, 관계 정상화와 협력에 관한 도모가 이어졌다. 그에 따른 결실로 양국은 마침내 제네바에서 열린 3차 회담에서 서로에 대한 국가인정과 수교를 체결하면서 길고 길었던 "적백내전" 은 끝나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1998년 니콜라이 2세의 유해에서 DNA를 감식할 때, 라리마의 황제 블라디미르 3세의 유전정보가 활용되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콜라이 2세의 안장식에는 블라디미르 3세가 직접 찾아와 지켜보았다.

2000년대 이후

라리마 강과 포스페이트의 마천루의 야경, 오늘날

2000년이 되어 새천년이 시작하고 21세기가 밝았다. 그러나 옐친 재임 시절에 최고에 다다랐던 라리마-러시아 관계, 양명관계[32] 는 푸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한다. 푸틴 대통령은 대러시아스러운 정책을 폈고,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러시아가 다시 팽창을 원한다는 것을 라리마 국민들에게 알린 계기가 되었으며 양명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서방시장에 의존도가 높았던 라리마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발발로 인해 극단적인 경제침체를 겪으면서 라리마의 2000년대는 조금 어두웠다. 2014년이 되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점령하고 투표를 통해 합병해버리자 라리마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편에 서서 러시아를 가장 강하게 규탄했다. 라리마는 러시아와 2014년을 기점으로 다시 사실상의 적대관계 수준으로 변화하였다. 2014년을 기점으로 주둔 라리마 미군은 축소에서 증가 방향으로 바뀌었고 라리마군 또한 증강되었다. 2020년 코로나 19가 전세계로 확산하면서 라리마제국도 마찬가지로 경제침체를 앓았지만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역을 진행했으며 백신을 가장 먼저 들여온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과의 관계는 2021년 후쿠시마 원전 방류 이슈[33] 당시 살짝 냉각되었지만 금세 다시 좋아졌으며, 2010년대 들어 새로운 항로로 주목받는 북극항로 개척에 선두에 선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각주

  1. 라리마의 이텔멘인들이 라리마어의 화자들이다.
  2. 아니안 섬의 이텔멘인들에게는 퉁구스계 유전자가 간혹 발견된다.
  3. 현재의 라리마어
  4.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Northern_Expedition
  5. 라리마라는 이름은 아니안 섬의 언어에서 유래한지라 처음에는 "극동 남방 도서 지역"을 뜻하는 말로 불리곤 했고, 쿠릴 열도 역시 "라리마"에 속할 때도 있었으나 1900년대에 들어서 라리마 제도를 의미하는 말로 굳어졌다.
  6.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아
  7. 이후 라리마의 인구는 잭백내전 전까지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었다.
  8. 아니안 섬은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같이 함락되었다
  9. 이후 러시아제국은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소실하였다.
  10. 당시 아니안 섬은 라리마 제도가 아니라 캄차카 지방에 속해 있었다.
  11. 다이어스포어 섬과 라리마 섬 북부 사이에 있는 해협
  12. 다이어스포어 화산은 하와이식 분화 화산이다
  13. 전간기와 냉전기에 이루어진 공격은 "아니안 N차 위기" 로 불린다
  14. 이후 아니안 섬은 끝까지 남아 라리마의 진먼이 된다
  15. https://en.wikipedia.org/wiki/Grand_Duke_Kirill_Vladimirovich_of_Russia
  16. 백군에 가담한 몐셰비키 측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
  17.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만 해도 경제력, 정통성, 인지도, 대외 이미지, 군사력은 라리마(러시아제국)이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8. 코만도르스키예 제도는 현재까지도 영유권 분쟁지역이다.
  19. 라리마 제도 표트르 섬의 동부지방
  20. 토리아 지역의 서남쪽으로 튀어나온 반도
  21. 포스페이트 남부에 있는 섬
  22. 다이어스포어 섬과 라리마 섬 북부 사이에 있는 해협
  23. 또는 아니안 1차 위기
  24. 아니안 지역은 서방국 진영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한번에 많은 물자를 수송했다.
  25. 이는 소련의 "하나의 러시아"스러운 압박으로 인해서다
  26. 961년 이미 아니안에는 이탈리아, 터키와 같이 미사일이 설치된 이력이 있었다.
  27. 또는, 아니안 2차 위기
  28. 당시 소련과 라리마는 1920년대부터 50년째 정기적으로 순찰함을 보내 서로의 영해 코앞까지 보내는 등의 영유권 주장 행위를 했는데, 라리마 국적의 배가 실수로 소련 영해를 침범한 것.
  29. 3차 아니안 위기를 단지 순찰함 하나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2차 아니안 위기를 비롯한 냉전 전기의에 쌓였던 국가간의 감정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30. 진보당이 주축이지만, 입헌민주당이나 군주제 연합 또한 그리 반대하지 않았다.
  31. 현실에서는 1974년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발견되었다.
  32. 兩溟關係, 양쪽 해안의 관계라는 뜻으로 양안관계와 같은 의미이다. 명(溟)자는 현대 와서는 해안의 의미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33. 직격으로 맞는 위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