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전쟁 (빌레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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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유례가 없는 참사에 꼭지가 돌아버린 한국은 이 참사의 주동자들을 찾아내 아예 씨를 말려버리려고 했다.  
이러한 유례가 없는 참사에 꼭지가 돌아버린 한국은 이 참사의 주동자들을 찾아내 아예 씨를 말려버리려고 했다.  


[[한성테러]]의 주동자가 만주 생디칼리스트 민족주의자. 즉 만주반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한국 내부의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여론은 이 사건을 제 2의 부산공습으로 간주하였고 그 즉시 정부가 만주의 대한 어떠한 조치라도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요구에 야당과 여당 모두가 내각에게 만주의 대한 지금 당장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고, 만주 주둔군의 증강, 즉 만주의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황제의 인가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한성테러]]의 주동자가 만주 생디칼리스트 민족주의자. 즉 만주반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한국 내부의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여론은 이 사건을 제 2의 부산공습으로 간주하였고 그 즉시 정부가 만주의 대한 어떠한 조치라도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요구에 야당과 여당 모두가 의정부에 만주의 대한 지금 당장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고, 만주 주둔군의 증강, 즉 만주의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황제의 인가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허나, 이러한 만주 개입론은 만주국과의 그 어떠한 상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는데, [[한성테러]]의 여파로 꼭지가 돌아버린 한국을 말릴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 내각의 외교 정책을 비난하던 미국조차 [[한성테러]]를 명분으로 한 한국의 주전론의 대하여 큰 반발을 할 수 없었다.
허나, 이러한 만주 개입론은 만주국과의 그 어떠한 상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는데, [[한성테러]]의 여파로 꼭지가 돌아버린 한국을 말릴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 의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난하던 미국조차 [[한성테러]]를 명분으로 한 한국의 주전론의 대하여 큰 반발을 할 수 없었다.


[[한성테러]]라는 명분과 라이히스팍트 소속이며, 유엔 상임이사국인 한국의 외교적 지위로 인하여 한국의 만주 개입에 국제사회가 사실상 용인하는 분위기로 흘러갈 때 청나라가 이에 반발하며 한국과 청이 외교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한성테러]]라는 명분과 라이히스팍트 소속이며, 유엔 상임이사국인 한국의 외교적 지위로 인하여 한국의 만주 개입에 국제사회가 사실상 용인하는 분위기로 흘러갈 때 청나라가 이에 반발하며 한국과 청이 외교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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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한성테러]]는 청 조차도 예상치 못한,만주반군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대참사였는데 청의 예상보다 대한제국이 더욱 강경하게 나서기 시작하며 세계 여론이 대한제국에게 기울기 시작하자 정세가 이리 흐르기 시작한다면 만주에서의 입장이 불리해질 것이라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와 함께, 당시 대한제국군은 이제 한물 갔으며 발전된 청군의 역량이 대한제국군과 비벼볼 수 있으리라 여긴 청군 장교들의 인식까지 겹치어 중국인들은 만주의 대한 개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성테러]]는 청 조차도 예상치 못한,만주반군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대참사였는데 청의 예상보다 대한제국이 더욱 강경하게 나서기 시작하며 세계 여론이 대한제국에게 기울기 시작하자 정세가 이리 흐르기 시작한다면 만주에서의 입장이 불리해질 것이라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와 함께, 당시 대한제국군은 이제 한물 갔으며 발전된 청군의 역량이 대한제국군과 비벼볼 수 있으리라 여긴 청군 장교들의 인식까지 겹치어 중국인들은 만주의 대한 개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한제국은 애당초 만주국을 사실상 한국의 본토로 여기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대만주 외교정책은 늘 종속국을 대하듯이 여겨져왔고, 이러한 관계를 개선 시키고자 이전 내각에서 진행되었던 [[만주합의]]는 오일쇼크와 함께 박정희 내각이 들어서며 곧바로 파기되었다.  
한편, 대한제국은 애당초 만주국을 사실상 한국의 본토로 여기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대만주 외교정책은 늘 종속국을 대하듯이 여겨져왔고, 이러한 관계를 개선 시키고자 이전 의정부에서 진행되었던 [[만주합의]]는 오일쇼크와 함께 박정희 의정부가 들어서며 곧바로 파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 [[만주합의]]의 파기로 만주반군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한국 내부에선 계속해서 만주의 대한 개입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도 만주의 대한 개입은 부담스러운 것이었는데. 막대한 군비는 둘째치더라도 표면적으로 독립국인 만주국의 대하여 일련의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 [[만주합의]]의 파기로 만주반군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한국 내부에선 계속해서 만주의 대한 개입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도 만주의 대한 개입은 부담스러운 것이었는데. 막대한 군비는 둘째치더라도 표면적으로 독립국인 만주국의 대하여 일련의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2023년 5월 20일 (토) 01:05 기준 최신판



만주전쟁
满洲战争
ᠮᠠᠨᠵᡠ ᡩᠠᡳᠨ
날짜 1985년 2월 17일~1989년 11월 6일
장소 만주국 전역 및 청과 남만주 일부
원인 박정희 의정부의 만주합의 파기
만주 내셔널리즘
청나라의 만주반군 지원
결과 대한제국의 사실상 승리
만주국의 자주국화
영향 박정희 의정부 붕괴
88혁명의 발발
국민당 장기집권
교전국
대한제국
만주국
청나라
만주 국민군
전만주자유인민해방군
병력
대한제국군 122만명
만주군 55만명
청군 266만명
만주반군 약 156만명
피해규모
대한제국군
31,227명 전사
17만 2561명 부상
만주군
12만 4712명 전사
37만 8446명 부상
청군
24만 4554명 전사
62만 2213명 부상
만주반군
58만 5861명 전사
102만 1301명 부상
지휘관

개요

만주전쟁은 한성테러 이후 한국군이 만주국의 만주반군 토벌을 위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청의 후원을 받는 만주반군이 내전을 일으키면서,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만주국에서 친한파와 만주파간이 치룬 내전이었다.

특히나 이 전쟁은 대한제국과 청이 만주의 영향권을 두고 전면으로 충돌하여 대리전을 치룬 것으로도 유명한데, 양국이 수백만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것을 넘어서서 본토타격과 해전까지 치뤘을만큼 일본전쟁 이후로 동북아시아가 가장 위험했던 시기로써, 언제든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산재해있었다.

전쟁은 많은 군사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대한제국군이 한물 갔으리라고 과소평가하고 있던 청군은 대한제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육해공군 모든 곳에서 아직까지도 많은 격차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한제국군은 자신들의 군사력이 아직 건재하며 막강하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줄 수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군의 약한 부분이 끝끝내 발을 잡아 만주반군의 게릴라와 오합지졸인 만주군까지 겹쳐 전쟁의 최종승리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만주전쟁이 드러낸 한국군과 청군의 실정은, 양쪽 모두가 군제개혁을 시작했다.

전쟁의 장기화로 피로가 누적된 양국은 1989년 11월 6일 합이빈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끝맺음 했는데, 이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칭타오, 대만을 비롯한 지금껏 주장해오던 영토들과 전쟁의 본 목적이던 만주마저 사실상 포기하는 내용이 담기자 청나라 내부에서 크나큰 정치적 파동이 발생. 청의 중국 통일 이후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국민당이 제1당으로 등극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대한제국은 승리했음에도 만주의 대한 상당수의 권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대한제국이 만주국의 대한 외교를 기본부터 바꿔야했음을 강요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만주국이 이제 자주국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전쟁은 88혁명이 발생되는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며,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배경

한성테러제2차 벨트크리그 이후 한국 본토가 공격 받은 최초의 일이자, 막대한 사망자를 발생 시킨 테러였다. 심지어 테러의 대상이 되었던 63 빌딩은 2차 벨트크리그 승전 5주년을 기념하여 건설 된 건물이었기에 한국인들이 이 테러로 입은 충격은 실로 막대하였다.

이러한 유례가 없는 참사에 꼭지가 돌아버린 한국은 이 참사의 주동자들을 찾아내 아예 씨를 말려버리려고 했다.

한성테러의 주동자가 만주 생디칼리스트 민족주의자. 즉 만주반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한국 내부의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여론은 이 사건을 제 2의 부산공습으로 간주하였고 그 즉시 정부가 만주의 대한 어떠한 조치라도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요구에 야당과 여당 모두가 의정부에 만주의 대한 지금 당장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고, 만주 주둔군의 증강, 즉 만주의 대한 직접적인 개입은 황제의 인가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허나, 이러한 만주 개입론은 만주국과의 그 어떠한 상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는데, 한성테러의 여파로 꼭지가 돌아버린 한국을 말릴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 의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난하던 미국조차 한성테러를 명분으로 한 한국의 주전론의 대하여 큰 반발을 할 수 없었다.

한성테러라는 명분과 라이히스팍트 소속이며, 유엔 상임이사국인 한국의 외교적 지위로 인하여 한국의 만주 개입에 국제사회가 사실상 용인하는 분위기로 흘러갈 때 청나라가 이에 반발하며 한국과 청이 외교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청은 만주가 한국의 영향권에 있는 것이 늘 맘에 들지 않았다. 중국인들 대다수가 중국의 진정한 통일은 만주까지 수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 여겼고,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청관계가 결단나기 시작하자 청은 만주반군의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성테러는 청 조차도 예상치 못한,만주반군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대참사였는데 청의 예상보다 대한제국이 더욱 강경하게 나서기 시작하며 세계 여론이 대한제국에게 기울기 시작하자 정세가 이리 흐르기 시작한다면 만주에서의 입장이 불리해질 것이라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와 함께, 당시 대한제국군은 이제 한물 갔으며 발전된 청군의 역량이 대한제국군과 비벼볼 수 있으리라 여긴 청군 장교들의 인식까지 겹치어 중국인들은 만주의 대한 개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한제국은 애당초 만주국을 사실상 한국의 본토로 여기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대만주 외교정책은 늘 종속국을 대하듯이 여겨져왔고, 이러한 관계를 개선 시키고자 이전 의정부에서 진행되었던 만주합의는 오일쇼크와 함께 박정희 의정부가 들어서며 곧바로 파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 만주합의의 파기로 만주반군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한국 내부에선 계속해서 만주의 대한 개입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도 만주의 대한 개입은 부담스러운 것이었는데. 막대한 군비는 둘째치더라도 표면적으로 독립국인 만주국의 대하여 일련의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 한성테러가 일어나자 한국은 곧바로 만주의 대한 전면적인 개입을 단행하였다. 국제사회 또한 암묵적으로 한국의 개입을 인정하자 기세가 등등해진 한국군은 수개월 안으로 만주반군을 아예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의 외교적 반발은 대한제국에게 전혀 알빠가 아니었다. 청의 외교적 반발에도 한국이 만주의 대한 군사행동을 지속하자, 만주합의 파기 이후 한국의 불만도가 증가하던 만주파들은 이 시점을 계기로 결단을 내릴 것으로 결정. 만주군의 많은 장교들과 병사들이 만주 국민국의 건국을 선언하며 각 지역의 유격조직들이 이에 가담하면서 내전이 발발. 이 내전에 한국군과 청군이 뛰어들면서 만주전쟁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