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려국
大美麗國 | Kingdom of Formosa
국기 국장
상징
국가 미려취청
국목
모란
국화
매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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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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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주개척 1452년 11월 30일
  • 조선령 신주 1455년 6월 24일
  • 미려왕국 독립 1640년 5월 20일
  • 칭제건원 1872년 10월 25일
  • 일본령 미려 1905년 12월 7일
  • 독립 1945년 10월 25일
  • 대미려국 제1왕국 1949년 5월 20일
  • 중화민국 정부망명 1949년 12월 27일
  • 미려공화국 1972년 3월 2일
  • 대미려국 제2왕국 1992년 5월 27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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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신주특급시
최대 도시
신주특급시
면적
37,006km²
내수면 비율
2.8%
접경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필리핀 (해상 국경)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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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23,893,188명 | 세계 57위
밀도
645.7명/km²명/km2
인종
미려인 80%
한족 8.3%
한국인 3.7%
미려신주민 3.1%
일본인 2.5%
미려원주민 2.4%
출산율
1.48명 / 세계 175위
공용어
미려어 (사실상 미려 한국어)
국민어
한국어, 표준중국어, 객가어, 미려 제어
지역어
마조어, 민남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정체자), 로마자
종교
국교
국교 없음(정교분리)
분포
무종교 40.7%, 불교 22.5%, 도교 19.4%, 개신교 9.2%, 가톨릭 5.8%, 이슬람교 1.1%, 기타 1.3%
군대
미려 국방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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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 행정구역
1특급시
광역급 행정구역
6직할시, 3특수시, 13현
기초급 행정구역
170개구, 198개 시/군/향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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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다당제
민주주의 지수
8.94점, 완전한 민주주의 (2020년)
(167개국 중 11위, 아시아 1위)
국가 원수 (군왕)
태화군왕 이혁
정부
요인
총리대신
채영문
의정원장
유석곤
대법원장
허종혁
여당
민주진보당
원내 야당
자유국민당, 미려민중당, 시대의힘, 국가발전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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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1조 2500억
1인당 GDP
$50,223
GDP
(명목)
전체 GDP
$8,200억
1인당 GDP
$34,319
무역
수입
$15,998,398
수출
$19,072,988
외환 보유고
$4조 6,900억 / 세계 14위
신용 등급
무디스 Aa2
S&P AA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미려 원 (FM\)
ISO 4217
FMW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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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태화(泰和)
시간대
미려 표준시(UTC+8)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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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1957년 수교 (대한민국)
1995년 수교(북한)
UN 가입
1959년 가입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광화문 빌딩 6층)
ccTLD
.fm, .美麗
국가 코드
158, FM, FOM
전화 코드
+87
여행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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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여행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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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미려국(大美麗國)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미려도와 팽호 열도 등 기타 부속 도서를 통치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국가 상징

국기

미려동심기
美麗同心旗
지위 공식 국기
채택일 1948년 12월 9일
근거 법령 국기와 국장에 관한 법률
비율 2:3

국장

황실 상징

국가

연호

역사

선사

최초의 인류 흔적은 3만 년 전 쯤에 나타난다. 이들은 흑인 계통의 네그리토로 추정되며 이후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8000년 전에 유라시아 동남쪽에서 미려도로 이동해 왔다. 네그리토 종족들은 이후로 서서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종족들에게 점차적으로 동화되었고, 마지막 네그리토 종족은 사이시얏족 거주지 근처에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살고 있었다. 이들 원주민들은 미려도 해역의 풍부한 어장을 바탕으로 어업에 종사하며 생활하였다.

고대~중세

고대에는 미려 원주민의 영역이였다. 당시 오나라가 종종 이주(夷洲)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 때 위온과 제갈직을 시켜 백성을 징발해 오기도 했다. 이후 송나라부터 원나라 시대 때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해양무역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 미려도는 류큐국 서쪽에 있어 소류큐국(小琉球國)이라고 불렸으며, 명목상으로는 중국의 영토로 분류되었으나 미려 원주민들의 저항과 습격으로 인하여 거주민의 이주나 개척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당시 미려도는 명나라나 일본, 류큐 등 인근 국가들도 거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미개척지였다.

조선령 신주

과인의 모후께서는 돌아가실 때 사당(沙糖)을 너무나도 드시고 싶다고 하였으나, 결국 제 때에 구하지 못하여 영전에 바칠 수 밖에 없게 되어 매우 원통하였다. 이처럼 우리 조선땅에 나지 않는 물자가 많아 곤란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이제 과인의 아우 수양대군을 멀리 남방의 섬으로 보내, 남방에서 나는 물자를 구하여 보내도록 할 것이다.
조선 문종의 미려도 개척 선언 칙령

1452년 조선의 문종이 수양대군을 대표로 하여 여러 왕족과 한명희, 신숙주, 정인지, 홍윤성 등 문신·무신으로 구성된 남방개척단을 파견해 미려도 개척에 나선 것이 본격적인 미려도 개척의 시초이며, 이후 1455년 정식으로 조선령 신주(新州)로 편입되었고 수양대군은 신주 병마절도사로 봉해졌다. 이후 신주는 정적이나 죄수를 유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계가 대거 유입되었다. 또한 당시 조선은 조선령 신주의 개척과 지배권을 명나라에게 인정받기 위해 서성부원군 한확 등을 통하여 허가를 구했는데, 미려도는 명나라에서도 잘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세외(世外)의 땅이었기 때문에 큰 상관 없이 조선의 개척을 용인하였다.

수양대군은 조선계 개척민들과 함께 신주 개척지(現 신주특급시)를 개발하였으며, 신주 개척지는 여러 개의 고을과 진채로 구성된 정착지가 되었다. 그 뒤 수양대군의 자손이 병마절도사직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이들은 미려 원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영토를 넓히는 한편 개간과 축성을 통하여 미려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후 15세기 말 미려도 남부에서 미려 원주민들이 조선계에 대항하여 연합해 세운 다두 왕국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들은 파포라족을 중심으로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을 결성하였다. 이때부터 조선령 신주의 조선계와 다두 왕국의 미려 원주민은 남북으로 갈라져 미려도를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

미려왕국

16세기 중후반부터는 명목상으로는 조선의 속주이나 사실상 독립국처럼 병마절도사가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640년 조선이 일본, 청나라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혼란스러울 당시 수양대군의 9대손이였던 황림대군 이행은 조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어 국호를 미려왕국이라 한 후 청나라에 입조하여 정식으로 국왕직을 책봉받았다. 또한 청나라에 반기를 든 정성공 세력을 퇴치하는데 기여하여 청나라로부터 신임을 얻었고, 청나라로부터 미려도와 그 주변 제도의 통치권을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미려는 조선과는 달리 친청 노선을 채택하는 등 실리적인 외교를 선택하여 독립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어 17세기 말인 1670년에는 사록사 전투에서 승리하며 다두 왕국을 멸망시키며 미려도 통일까지 완수하게 된다. 이후로도 다두 왕국 잔당과 원주민 저항 세력은 군발적인 투쟁을 계속하게 되나 미려왕국의 유화책으로 원주민들은 분열되었고, 1732년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까지 진압된다.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서양과 무역을 통해 동아시아 해양 무역 거점지로 성장하였으며,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였다. 특히 포르투갈,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는데, 영어 국호인 포르모사(Formosa) 역시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는 아편 전쟁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내부 부정부패로 인하여 혼란기가 찾아왔는데, 혼란기 속 1859년 즉위한 정조정조 개혁을 통해 정치·경제·군사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부정부패를 일소하고자 하였다. 또한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간신을 척결하고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여론이 관리와 군인, 식자층 사이에서 부상하였고 이들은 국왕을 도와 개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려왕국은 근대 국가로 어느정도 변모하는데 성공하였고, 1872년에는 메이지 유신의 자극을 받아 미려제국을 건국한 후 칭제건원을 선언하였다. 이후 청나라,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열강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하며 최대한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지만, 청일전쟁으로 인하여 청나라는 미려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하고 물러나게 된다. 또한 영국과 미국 역시 미려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하였으며,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도 이를 인정하게 되면서 1905년 미려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고 만다.

일제강점기

이후 구 미려 황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으며, 1923년에는 미려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미려 임시정부는 국내에서 공작이나 의거를 전개하는 한편 미국, 중국 등지에서도 외교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연합국 편에 서며 미려독립군이 연합국과 함께 인도, 동남아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려의 독립이 결정되었으며,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하였다.

대미려국 제1왕국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하여 미려는 독립하였고,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미군정을 겪게 된다. 미군정은 국민들에게서 지지를 받는 구 미려 황실을 다시 군주로 추대하여 미려를 독립시키기로 하였고, 그 결과 1949년 5월 20일 '대미려국(대미려국 제1왕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1949년 국공내전 패전으로 인하여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당군 잔당이 미려로 대거 망명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국민당군 잔당이 점유하고 있던 금문도 등 일부 제도를 획득하였으며 국민당군 망명 인사를 받아들임으로서 국방 전력이 향상되기도 하였다.

이후 미려는 냉전 시기 자유전선의 최전방으로서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릴 정도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미려공화국

1965년 좌파가 선거에서 압승하자 우파 세력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장철성 장군을 위시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독재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1972년 왕실이 반군부 민주화 세력을 지원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자 장철성 장군은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 미려공화국을 선언하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 시기 미려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였으나 1977년 2.28 사건, 1979년 미려도 잡지 사건 등으로 인하여 민주주의는 크게 쇠퇴하였다.

이후 1984년 장철성이 사망한 뒤 미려 국민들은 군부체제의 종식 및 민주화를 요구하게 되었는데, 장철성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장정권은 이러한 민주화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민주진보당의 창당을 승인하고 구왕가의 궁궐 거주를 승인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며 어느정도 민주화에 기여하게 된다. 다만 장정권 역시 군부 독재 체제에 기반을 둔 인물이였기에 한계점 역시 뚜렷하였는데, 실제 이 당시에도 1986년 신주역 시위 등 산발적인 민주화 요구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대미려국 제2왕국

장정권은 1987년 3월 3.3 선언을 통하여 민주화를 추진하고 군부는 다시 국방 업무로 복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1987년 7월 계엄령이 종식되었고, 1988년에는 민주적인 의회 선거가 재개되었으며 1989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치루어졌다. 1988년 총선과 1989년 대선에서는 민주진보당을 위시로 한 개혁세력이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은 1965년 이전의 민주적인 입헌군주 의원내각제로 체제를 회귀시키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1992년 민주적인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명시한 신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대미려국 제2왕국이 들어서게 된다. 이후 왕실이 복귀하였고 미려는 다시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현재 미려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경제적 선진국이자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였다.

인문환경

인구

인구는 2020년 기준 23,893,188명이며, 인구밀도 순위가 도시 국가를 제외하고 세계 2위일 만큼 매우 높다. 1위는 방글라데시인데 방글라데시는 국토 대부분이 평야 지대인 반면, 미려는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지이기 때문에 가용 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전세계 최고이다.

인종 분포는 2020년 조사 결과 미려인 80%, 한족 8.3%, 한국인 3.7%, 미려신주민 3.1%, 일본인 2.5%, 미려원주민 2.4%이다. 국민 절대다수가 19세기 이전 조선에서 이주한 미려인이며, 이들은 한국계이지만 한국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 외 명말청초 혼란기나 국공내전 등 중국 대륙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한족이 이주하였기에 한족의 비율도 8%로 높은 편이다. 그 외 국공내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망명한 중화민국 정부나 국민당군 잔당들도 상당한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 1945년 이후 이주한 한국인도 약 4%를 차지하며, 1990년대 이후 동남아에서 이주한 미려신주민 역시 3%를 차지한다. 또한 일제시대부터 꾸준히 일본인이 이주해왔기에 일본인도 2.5%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의 2.4%는 조선계가 미려도에 진출하기 전부터 살고 있었던 다양한 미려원주민들이며, 이들은 동부 지역에서 높은 인구밀도를 보인다.

대부분의 인구가 평야 지대인 서부에 몰려 있어 상당히 편중된 인구분포와 높은 인구밀도를 보인다. 동부는 해발 3,000m급 산이 수두룩하여 평야가 좁아 교통이 불편하기에 거주 인구가 150만 명이 채 안 된다. 그래서 도서부를 제외한 2,0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모두 서부에 몰려 있다.

언어

미려어가 주류를 이루고, 그 외 중국어나 일본어가 소수민족 사이에서 통용되며 그 외에도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 다양한 원주민 원어들이 존재한다.

미려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어(國語)라고 불린다. 기본 문자는 한글을 사용하고 있다. 미려 개척이 한글 창제 초창기에 시작된 것인 만큼 미려어는 조선 본토의 한글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물론 미려와 조선은 교류를 통하여 어느정도 한글 체계를 통일하였으며, 한반도의 한국어와 이질적으로 변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의사소통에서 잦은 혼선이 일어나자 1885년 한글 체계에 관한 미려-조선간 협정이 체결되었고, 1887년에는 한글표준화 조약을 체결하며 언어 표준화에 노력하였다. 현재의 미려어와 한국어의 차이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수준의 차이가 되었다.

중국어는 중국계 미려인 사이에서 사용되는데, 이 역시 표준중국어와 미려식 중국어로 나뉘어진다. 한자는 전통 한자인 정체자를 사용하고 있다. 발음 기호의 경우 중국 대륙에서는 한어병음을 사용하지만 미려에선 중국인들이 주음부호를 사용한다. 그 외 객가어, 민남어 등 중국 방언도 중국계 미려인 일부가 사용한다.

미려원주민들도 민족마다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 언어들을 미려 제어라고 총칭한다. 미려 제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다. 다만 미려인 사회가 주류이기에 절대다수가 미려어를 구사한다.

정치

미려는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였다. 국왕은 내각총리의 요구로 의회를 해산하거나 총선을 실시, 법안을 승인하는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상징적인 것이고, 실제 국정은 총리가 맡아서 한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의원정수는 300석이다. 총리는 총선 후 의회에서 선출되며 국왕은 선출된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임기를 시작한다.

국왕

미려의 국왕은 군왕(君王)이라고 칭한다. 현재 미려의 국왕은 2017년 즉위한 제20대 군왕 태화군왕이다.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국가원수는 국왕이지만 정부수반은 총리대신이다. 그러나 국왕의 영향력은 막강하며 정치적으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근대화를 주도하였으며 민주화에 기여한 만큼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며,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사회적 구심점으로서 왕실의 입지는 확고하다. 미려의 국왕은 의정원 해산과 총리, 장관들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무대신은 내각에서 지명한 사람을 형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총리도 선출된 당선자에 대해 '국민의 선택을 존중한다'라는 형식으로 임명한다.

총리

미려의 총리는 정부의 수반이자 내각의 수장으로서 실질적인 실권자이다. 내각제이기에 총리는 의회에서 선출되며 당선자를 국왕이 수반으로서 승인하는 형식으로 취임한다. 법적으로는 국왕의 최고신하이지만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실권을 행사한다는 식으로 국정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