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침략

830년경 발해 강역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로부터 태어나 80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함은 이에 걸맞는 칭호였으며 발해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역강국이었다. 발해의 10대 국왕 선왕은 발해의 영토 북동부의 부락들을 편입시키고 안정화했는데, 이를 이은 11대 휘왕(대이진)은 아무르 강 삼각주까지 강역을 확대하고 수산자원을 얻기 위하여 오호츠크해로 영역을 확대했는데, 발해의 사할린과 홋카이도 진출은 그 계획 중 하나였다. 800년부터 900년까지 사할린의 서부에 2개, 동부에 3개의 섬이 세워졌으며 홋카이도에는 6개의 성이 있었다. 사할린과 홋카이도의 수산자원은 상경용천부로 공급되었다. 발해는 이 두 섬을 거쳐 일본과 교류하는 길을 내려고도 했으나 기후가 험난하고 개발이 전혀 되어있지 않아 성사되지는 못했다. 두 섬은 발해의 지배권에서 최변방이었다. 920년들어, 새로 부상한 거란은 발해를 전방향에서 압박하기 시작했다. 925년에는 요동반도를 거란에게 강탈당하고, 1년 뒤 상경용천부는 926년 요 태조의 급습으로 인해 함락당해버려 발해 전체가 요나라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발해의 세자 중왕(대광현)은 남아있던 각료들과 군사를 이끌고 항전을 선택했다. 하지만 발해의 장령부를 제외한 서부, 남부 지역은 이미 요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대광현의 군사는 계속 둥북쪽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발해의 신하들은 차라리 거란과 화친하자고도 했지만 중왕은 이를 거절했다. 927년 2월 아무르강 하류까지 내몰린 대광현은 사할린 섬으로의 후퇴를 결정했는데, 당시는 막 봄이 시작될 시점이어서 얼어있는 타타르 해협이 녹기 직전이었다. 중왕은 사람을 보내어 거란 군대의 규모를 살피게 하였는데, 숫자부터 발해의 남은 군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발해의 왕 중왕은 타타르 해협의 얼음이 녹기 전에 빨리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해협을 건너라.
중왕

​이후 발해의 유민과 군사들은 타타르해협을 건넜는데, 다행히 횡단하는 날짜에 추위가 지속된 덕에 발해인들은 해협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다. 중왕과 발해인들은 해협의 건너편에 있는 성으로 가 임시적으로 조정을 설치했다. 겨울이 끝나면 거란의 군대가 해협으로 올 것이 분명했던 상황이기에, 중왕은 다시 유민들을 데리고 더 남동쪽으로 떨어진 성으로 가 조정을 설치했는데, 성의 이름을 구천성(救天)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왕은 해협 건너에 있는 성을 폐쇄하고 불태울 것을 지시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봄이 되자 거란 군사들이 해협으로 와 폐허가 된 성을 보고 사할린의 발해인들이 전부 아사했으리라 추측하고 중왕의 무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라고 기록한 뒤 철군하여 발해는 무사할 수 있었다.

홋카이도로의 천도와 정착

상신성 유적

당장의 안전은 확보했지만 사할린 섬은 기후가 너무 추워 발해의 새 수도로는 부적합했다. 이에 930년 중왕은 보다 남쪽의 홋카이도 중부의 상신성(다키카와시)으로의 천도를 행했고 최종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중왕은 발해의 남은 유민들을 홋카이도로 이주시켜 농업에 종사하게 했으며 국가적인 기관을 설치하여 아이누인들을 나라의 백성으로 동화시키는 등 성군의 면모를 보인다. 또한 사할린 북쪽을 통해 발해에 오고자 하는 유민들(이들은 주로 북부 말갈인들이었다)을 받아들이도록 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성립했다. 중왕은 이후 10년간 통치를 이어가다가 940년 사망했으며, 그는 현재까지도 발해의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0세기의 평화

940년 그를 이어 즉위한 발해의 새로운 왕은 중왕의 이들 장왕이었다. 10세기의 발해는 독신세를 거두어 부족해진 인구를 늘리도록 하고, 그 인구에 걸맞는 규모의 식량 수급을 위하여 혼슈 북부의 에미시 아이누들을 정벌하여 일본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쿠릴 열도의 이투루프 섬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또한 대륙부의 여진들과도 관계를 돈독하게 하여 요나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지 못하게 했고, 여진 족장과의 통혼도 이루어졌다. 또한 발해의 가장 큰 교류 대상은 일본이었고 무역의 규모과 상호 신뢰는 돈독했다. 고려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이는 고구려에 대한 계승을 두고 두 국가의 주장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남만주에서 발해부흥운동이 벌어지는 동안에 발해는 그들을 전면적으로 지원했지만 고려가 끼어들어 외교적 악화가 초래되고는 했다. 중화권의 국가들과도 기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언어는 좀차 발해어가 ㅇ\주류로 쓰이게 되나, 부유한 고구려인과 가난한 말갈인의 갈등이 심화되어갔다.

대정승 고사해

고사해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