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시대

모니터링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24일 (토) 01: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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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시대(Era of Light)는 "남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했다면?"을 가정한 현대사를 다루는 세계관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남베트남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는 공산주의가 대두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히피, 반전주의 운동, 민권 운동, 이민자 문제 등이 전세계적인 반미 담론으로 조합되지 못했으며 원래라면 서유럽과 1세계를 뒤흔든 자유화의 물결 68운동은 각국이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해 이뤄졌고, 결국 적절한 타협에서 끝났다. LBJ의 위대한 사회는 방해받지 않고 타협 없이 완성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봄은 미국과 서방의 지원으로 무르익었다.

1968년 발발한 체코슬로바키아 전쟁은 소련의 선제공격으로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지만, LBJ는 유럽에서의 핵 투발에 대한 거부감과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에 핵 사용이 아닌 전통적 방법의 전술과 전략을 요구했다. 소련 역시 덜컥 미군을 공격하긴 했지만 핵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일단 전장이 소련의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전후 피해는 소련의 전부 감당해야 했으며, 전쟁의 명분 또한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전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각각 NATO와 WTO군을 물리고 미군-체코슬로바키아군과 소련군만으로 교전을 시작한다. 소련은 전쟁 초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는데, 이 조치가 가뜩이나 체코의 내정에 간섭한 것에 뿔이 나있던 시민들을 자극해 소련 점령지하 저항군에 들어가게 했으며, 소련은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해 민족주의를 부추겨 체코슬로바키아를 내부로부터 무너트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슬로비카아 위성국의 출현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분할해 체코는 자유국가로, 슬로바키아는 이전처럼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는 것을 소련이 먼저 미국에 제안했다는 것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의해 밝혀지면서 오히려 슬로바키아인들은 괴뢰정부의 타도에 앞장섰다. 1970년대 초반에 오면서 전쟁은 체코슬로바키아군, 소련 치하 저항군 대 소련군으로 구성된 슬로바키아군으로 자연스럽게 양상이 바뀌었다. 미군은 체코 지역에 60만 명의 병력을 주둔 중이긴 했지만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고 폭격으로 인한 기반시설의 파괴를 복구하거나 시민들의 구호에 힘쓰는 등 부차적인 지원을 맡았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전선에서 직접 싸웠으며, 미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무제한적인 무기를 공급해주었다. 소련 역시 68년의 선제공격 이후 직접 소련군을 파병하는 것을 꺼려 슬로바키아군을 통해 대리전을 시작했다. 미국은 길고 지리적으로 불리한 싸움에서 명분을 잃지 않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1975년 경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고 루체른 협정을 통해 WTO에서 탈퇴하고 중립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방만한 재정지출이 사라지자, 브레튼우즈 체제의 수명은 더 길어졌다. 미국은 1달러의 가치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고, 1973년 산유국들이 단결하여 석유 감산을 시도하고, 미국과 그 동맹국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내렸을 때 미국은 제재에 동참한 산유국들을 적색국가로 지정해 어떤 국가나 기업, 개인이라도 해당 국가들과 거래하면 미국에서 추방, 외교관계의 단절, 금수조치로 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결국 미국의 발표 일주일만에 이란, 쿠웨이트, 카타르가 금수조치를 해제하고 원유를 원래대로 증산하기 시작했다.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는 금수조치는 해제했지만 감산 기조는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중동 국가간의 석유 채굴 기조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서 사우디와 이라크의 손해가 커지자 이라크가 대열에서 이탈해 증산 기조로 돌아섰으며, 3개월 동안 국제원유시장 지분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사우디아라비아는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원유를 대폭 증산하여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1] 이 당시 레이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를 조금 더 비싸게 삼과 동시에 점유율을 높여주는 조건으로 달러-석유 독점거래 정책을 추진, 언젠가 발생할지 모를 석유위기를 봉쇄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집권초반의 위기를 잘 넘겼으며, 70년대 미국과 서방은 유례없는 호황을 맞는다. 특히 석유위기 당시 미국과 서유럽을 잠식했던 일본 제품이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좌초되면서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더 길게 이어졌다. 레이건의 대소련 강경책 역시 1976년 대선 이후 소련 내부의 권력지형이 변하면서 유화 기조로 점차 선회하였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1976년 전략무기제한협정과 1979년의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그램이었다. 한편 1970년대 말에 와서 미국은 이미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건은 1979년 런던에서 대처와 먼저 브레튼우즈 체제의 폐기에 대한 대화를 나눴으며, 1980년 초 브레튼우즈 체제에 서명했던 모든 44개국 대표단을 불러모아 미국 달러가 35:1을 유지하지 않고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치가 결정될 것이라고 전했다. 킹스턴 체제라고 불리는 지금의 변동환율제의 시작은 말이 협상이지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당일 전 세계적인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레이건 쇼크라고도 불리나, 얼마지나지 않아 미국 달러와 석유 사이의 독점적인 거래 관계가 있음이 알려지면서 미국 화폐의 신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 않았다.

소련은 체코에서의 후퇴 이후 미국과 전면적인 힘대결을 요구하는 보수파와 브레즈네프가 실각, 암투를 통해 안드로포프를 비롯한 개혁을 지지하는 온건파가 부상한다. 소련은 80년대 초 조지 H.W. 부시의 동방정책과 데탕트 분위기에 힘입어 군사적, 문화적 대결을 종식시키기 위해 대결의 중심이었던 유럽에서 승부수를 던져 독일의 평화통일을 제안, 1983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1983년 말에는 미국-소련 간 자유로운 무역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1984년 유리 안드로포프가 사망하고 체르넨코 체제가 들어서면서 미소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소련은 일방적으로 자유로운 무역을 중단했으며, 독일-체코슬로바키아와 맞닿은 국경에 WTO군을 다시 배치하는 등 부시 정부 내내 완회되어온 군사적 긴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 소련 선수단이 입장하는 것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며 이러한 군사적 긴장은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다. 부시는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던 2월에서 7월 사이의 5개월동안 급격한 지지율의 폭락을 겪었었기 때문에, 한시름 놓게 되었다.

미국 공화당은 조지 H.W.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레이건의 신보수주의가 위축되며 당의 주류가 온건파로 다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1985년 체르넨코가 병사하고 고르바쵸프가 다시 개방기조로 돌아서면서 85년 무역의 자유가 회복되었으며, 86년에는 여행과 체류의 자유, 전신의 자유가 보장되며 미소 대결 국면은 거의 종식되었다. 1987년 중거리 핵전력 조약이 발효, 이후 1988년 부시와 고르바쵸프가 만나 NATO와 WTO의 단계적 통합을 발표하며 집단안보를 실현할 것이라는 선언이 나오면서 냉전은 완전히 끝난다.

주요 사건

  •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JFK vs. 리처드 닉슨
    • 1963년 11월 3일 응오딘지엠 대통령을 암살 후 미군이 철수[2][3]
    • 1963년 11월 22일 JFK 암살, LBJ 취임
    • LBJ는 잔여 임기동안 JFK의 정책들을 실현
  •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LBJ vs. 베리 골드워터
    • 1964년 3월 브라질 쿠데타 발생[4]
    • 1964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
    • 1967년 6월 3차 중동전쟁 발발
    • 1968년 8월 LBJ가 프라하의 봄에 소련의 개입을 경고하는 서신을 보냄
    •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가 체코를 침공함 (체코슬로바키아 전쟁)
    • 1968년 8월 21일 독일 주둔 미군이 둡체크의 요청으로 체코에 진입함
    • 1968년 8월 23일 UN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병이 거부됨 (거부: 소련)
    • 1968년 8월 25일 소련 전략로켓군의 선제공격로 미군 300여 명이 사망함
    • 1968년 8월 27일 미국 의회에서 프라하 결의안이 통과됨
    • 1968년 9월 1일 30만 명의 추가 파병이 결정됨
    • 1968년 11월 LBJ가 재선에 성공함

각주

  1. 이 때를 계기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를 무기로 쓰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야마니 석유장관의 경질이었다.
  2.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은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서 발생할 혼란에 대해 미국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3. LBJ는 이 결정에 반대했지만, JFK가 맥나마라를 신뢰했기 때문에 철수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4. 미국 국무부에서 지원(친미쿠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