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아름다운 나라 배너}} {{역대 태국 대통령}}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fff; color:#000; border:2px solid #040047; max-width:450px; float:right;" ! c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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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봉건주의를 탈피시키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지킨데다 각종 위대한 체제 개혁을 이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어쨌거나 군사독재와 쿠데타를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독재자일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태국 내에서 공존한다. | |||
다만 부정적인 평가는 주류가 아닌데, 공화정을 출범시킨 현 체제의 효시인데다 항일 운동 및 여러 사회·체제 개혁을 이뤄낸 공이 워낙 큰지라 위인으로 대우하는 여론이 거의 대부분이다. 특히 짜끄리 왕조를 종식시킨 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왕조를 열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공화정을 출범시켜 왕정 시절 못 다한 개혁을 완수했다는 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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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쁘리디 파놈용]]과는 영원한 정치적 동지였으며, 쁠랙 피분송크람 역시 그의 사상에 감명받아 시암 혁명을 통한 급진적 체제 변혁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공화국 설립 이후로도 쁠랙 피분송크람은 쁘리디 파놈용을 총리로 임명하여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 쁘리디 파놈용의 사회주의 정책에 경도된 쁠랙 피분송크람은 군사 쿠데타와 군국주의를 통해 이상을 급진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그 결과 좌익 파시즘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 타이 운동]]을 쁘리디 파놈용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 인민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쁘리디 파놈용]]과는 영원한 정치적 동지였으며, 쁠랙 피분송크람 역시 그의 사상에 감명받아 시암 혁명을 통한 급진적 체제 변혁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공화국 설립 이후로도 쁠랙 피분송크람은 쁘리디 파놈용을 총리로 임명하여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 쁘리디 파놈용의 사회주의 정책에 경도된 쁠랙 피분송크람은 군사 쿠데타와 군국주의를 통해 이상을 급진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그 결과 좌익 파시즘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 타이 운동]]을 쁘리디 파놈용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 ||
[[9.16 | [[9.16 쿠데타]]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쁠랙 피분송크람은 1964년 현지에서 사망하였으나 쁘리디 파놈용은 1975년 당시 태국 대통령이던 [[타놈 끼띠카쫀]]의 배려로 태국으로 귀국하여 1983년까지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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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7일 (금) 03: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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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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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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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제1-2대 대통령 쁠랙 피분송크람 |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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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7월 14일 | ||||||||||||||||||||
시암 논타부리 | |||||||||||||||||||||
사망 | 1964년 6월 11일 (66세) | ||||||||||||||||||||
스위스 베른 | |||||||||||||||||||||
국적 | 태국 | ||||||||||||||||||||
재임 기간 | 태국 제1대 대통령 | ||||||||||||||||||||
1948년 4월 8일 ~ 1953년 4월 7일 | |||||||||||||||||||||
태국 제2대 대통령 | |||||||||||||||||||||
1953년 4월 8일 ~ 1957년 9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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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태국의 제1-2대 대통령. 시암 혁명을 주도한 인물로서 좌익 파시즘적 사상을 추종하며 군사 독재를 행함과 동시에 태국의 왕정을 종식시키고 공화정을 출범시킨 등의 행보로 인하여 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생애
평가
태국의 봉건주의를 탈피시키고 일제로부터 나라를 지킨데다 각종 위대한 체제 개혁을 이뤄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어쨌거나 군사독재와 쿠데타를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독재자일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태국 내에서 공존한다.
다만 부정적인 평가는 주류가 아닌데, 공화정을 출범시킨 현 체제의 효시인데다 항일 운동 및 여러 사회·체제 개혁을 이뤄낸 공이 워낙 큰지라 위인으로 대우하는 여론이 거의 대부분이다. 특히 짜끄리 왕조를 종식시킨 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왕조를 열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공화정을 출범시켜 왕정 시절 못 다한 개혁을 완수했다는 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다른 정치인과의 관계
쁘리디 파놈용
인민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쁘리디 파놈용과는 영원한 정치적 동지였으며, 쁠랙 피분송크람 역시 그의 사상에 감명받아 시암 혁명을 통한 급진적 체제 변혁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공화국 설립 이후로도 쁠랙 피분송크람은 쁘리디 파놈용을 총리로 임명하여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 쁘리디 파놈용의 사회주의 정책에 경도된 쁠랙 피분송크람은 군사 쿠데타와 군국주의를 통해 이상을 급진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그 결과 좌익 파시즘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 타이 운동을 쁘리디 파놈용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9.16 쿠데타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쁠랙 피분송크람은 1964년 현지에서 사망하였으나 쁘리디 파놈용은 1975년 당시 태국 대통령이던 타놈 끼띠카쫀의 배려로 태국으로 귀국하여 1983년까지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48 | 제1대 태국 대통령 선거 | 태국 | 인민당 | 14,058,530 (74.6%) | 당선 (1위) | 초선 |
1953 | 제2대 태국 대통령 선거 | 13,191,650 (70.0%)[1] | 재선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인민당 | 1932 - 1942 | 정계 입문 입당 |
무소속 | 1942 | 일본군에 의한 강제 해산 |
자유 타이 운동 | 1942 - 1945 | 창당 |
무소속 | 1945 - 1947 | 해산 |
인민당 | 1947 - 1957 | 재창당 |
무소속 | 1957 - 1964 | 9.16 쿠데타로 인한 정계 은퇴 사망 |
어록
제1차 시암 혁명을 성공시키고 나서 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