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테 (시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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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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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그라이펜 왕조 12대 황제
샤를로테
Charlotte
이름 유제니 샤를로테 빅토리아 아말리아 (Eugene Charlotte Victoria Amalia)
출생 1690년 9월 8일
프라이베르크 왕국 체르스터 궁
사망 1727년 4월 17일 (36세)
비안텐 공국 가우다우 성
재위 시에나 황제
1712년 5월 11일 ~ 1712년 8월 20일 (102일)
배우자 5대 라벤나 공작 루도비코
(1707년 결혼 / 1712년 이혼)
자녀 클라우디아, 마리우스
아버지 카를에두아르트
어머니 루켄발데의 마리아

개요

시에나 제국 황제, 프라이베르크 왕국 여왕, 비안텐 공국 여공작. 그라이펜 왕조의 마지막 황제. 재위 102일만에 팔젠 왕국의 프란츠 5세에게 축출되었다.

생애

어린시절과 치세

아버지 카를에두아르트와 어머니 루켄발데의 마리아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루켄발데 공작 가문은 프리드리히 3세의 에트루스 왕국 정복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초대 루켄발데 공작에 봉해진 알브레히트가 시조로, 어머니 마리아 황후는 그의 7대손이자 외가쪽으로 울첸 후작 가문을 통해 전기 시에나 제국의 마그나페루스 왕조의 핏줄도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상당히 고귀한 핏줄을 타고 났지만 샤를로테가 여자의 몸이었던 탓에 카를에두아르트는 그녀를 프라이베르크 왕국과 비안텐 공국의 추정상속인으로 삼으면서 주위 국가들과 정치적 협상을 통해 샤를로테가 태어나기 전 정한 왕국의 여계 계승 제도를 인정받으려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790년대 말엽 상당수의 국가는 샤를로테의 프라이베르크 왕위 계승을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교황청에서는 샤를로테의 시에나 제위 계승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교황의 권위가 바닥난지 오래인 상황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않고도 실질적으로 황제 역할을 했던 이들은 많았기에 샤를로트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라이펜 가문과 제위를 번갈아가며 차지했던 팔젠 왕국의 아르텐 가문이 이를 반대했던 것이었다. 사실 아르텐 가와 그라이펜 가는 사돈도 맺는 등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카를 6세 황제 당시 시에나의 제후국들이 황제가 인가한 도시에서만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했고 인가 도시는 상당수 친 그라이펜 가문이었기에 나머지 제후국들에서 반발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카를 6세의 법률은 제후국들을 견제하려는 목적보다 점차 성장하는 상공업자 계급, 즉 부르주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친 프라이베르크 왕국 제후국들과 나머지 제후국들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 샤를로트의 성장은 이런 불안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카를에두아르트는 샤를로트에게 최대한 튼튼한 기반을 만들어주기 위해 강한 세력을 이끄는 부마를 구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에트루스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라벤나 공작 루도비코가 1707년 아내와 사별하면서 카를에두아르트는 바로 혼인을 추진하였고 루도비코는 이를 승낙했다. 하지만 루도비코는 카를에두아르트보다 고작 3살 어린 47살이었고 뚱뚱한데다 지독한 근시였다. 이듬해 딸 클라우디아를 출산했지만 이후 부부 사이는 완전히 틀어졌다. 내심 손자를 원했던 카를에두아르트는 크게 상심했지만 더이상 샤를로테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1710년 샤를로테는 3살 많은 콜마르 후작 루트비히를 만나 그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루트비히가 아버지 카를에두아르트의 이복동생으로 삼촌이었던데다가 본처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륜행각은 안그래도 불안하던 그녀의 입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프란츠 5세는 공공연하게 그녀를 차기 황제로 인정할 수 없으며 자신의 제위 계승권을 주장하곤 했다. 제국에 감도는 전운에 카를에두아르트는 군을 정비하고 물자를 비축하였으나 1712년 낙마사고로 급서한다. 샤를로테는 명목상 제위를 이어받았지만 루트비히의 아이를 임신한 몸이었던데다 비협조적인 궁정 대신들로 인해 프라이베르크 왕위 계승 전쟁 발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그와중에 출산한 아이를 루트비히에게 빼앗기기까지 했다. 이런 혼란속에 결국 팔젠 왕국군에게 수도가 점령당했고 퇴위하게 되었다. 뒤늦게 루켄발데와 울첸 공국등이 군사를 일으켜 지원에 나섰으나 결국 1년만에 진압되어 전쟁은 끝이 났다.

말년

모든 영지의 통치권을 빼앗긴 이후에는 비안텐 공국에 위치한 첼른 하우스에 연금된 신세가 되었다. 프란츠 2세는 콜마르 후작 루트비히를 비안텐 공작으로 옹립했다가 샤를로테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1] 4개월만인 1713년 1월 다시 쫓아내 그라이펜 왕조 7대 황제 알베르트의 증손자 하인리히를 다시 공작으로 내세웠다.

비록 폐위되었지만 샤를로테는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하려 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전 남편 라벤나 공작 루도비코를 통하여 에트루스 왕국에 티롤 지방을 할양할테니 여전히 팔젠 왕국군과 싸우고 있던 하벤 백작과 루켄발데, 울름 공국 연합군에게 원군을 보내달라는 서신을 보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루도비코는 이 편지를 하인리히에게 넘겼고 샤를로테는 첼른 하우스에서도 쫓겨나 가우다우 성에 유폐되었다. 하인리히는 가우다우 성을 철저하게 봉쇄했으며 그녀가 먹는 음식까지 통제했다.

1713년 중순 연합군이 팔젠 왕국에게 분쇄된 이후에도 샤를로테는 수도사처럼 기도하며 스스로 엄하고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1720년에는 공국 정부가 어머니 마리아 태후를 접견하는 것을 허락하여 모녀는 꽤나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딸인 클라우디아는 사망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1726년에는 하인리히의 아내 엘리자베트가 죽자 그와의 혼담이 생기기도 했지만 샤를로테가 완강히 거부해 무산되었다.

1727년 4월 13일, 샤를로테는 갑작스레 몸져 누웠다. 위독하다는 소식에 어머니 마리아 태후는 급히 가우다우 성으로 행차했는데 수개월 전만 해도 아름다웠던 용모가 완전히 망가져 어머니보다 더 나이들어보였고 머리털과 치아도 다 빠져 일부만 남아있는 비참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으나 시에나 황제 프란츠 2세와 황태자 프란츠, 보에나 대공 막시밀리안 2세 등 유력 인사들이 참석했다. 유해는 태어난 곳인 체르스터 궁의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끔찍한 모습으로 사망한 것 때문에 그녀 사후 독살설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당장 어머니 마리아 황태후조차 독살된 것 같다며 절규했고 공국 정부가 그녀의 유해를 급히 매장하려 하는 등 의심스러운 정황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1727년 시점에서는 샤를로테를 독살할 이유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독살 주체와 그 사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다만 가장 유력한 것은 비안텐 공작 하인리히가 혼담을 거절당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그녀를 독살했다는 가설이다.

그녀 사후 콜마르 후작 루트비히는 죄책감을 느꼈는지 뒤늦게 마리우스를 자신과 샤를로테 사이의 아이로 인정했고 몇년 지나지 않은 1731년 병사했다. 샤를로테가 죽기 전에는 1713년 병사한 자신의 본처 힐다의 소생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던 그였지만 그 사실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후 마리우스는 여러 정치적 이해 관계를 잘 이용하여 어머니의 영지 대부분을 되찾아 그라이펜 가문을 중흥시키는데 성공한다.

가족관계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샤를로테 카를에두아르트 카를 6세 알프레트
로렌의 막달레네
보에나의 시빌 15대 보에나 공작 구스타프
보른홀름의 크리스티나
루켄발데의 마리아 7대 루켄발데 공작 프리드리히 6대 루켄발데 공작 빌헬름
울름의 조피
울첸의 안나마리아 12대 울첸 후작 안드레스
포젠의 빅토리아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5대 라벤나 공작 루도비코
(Ludovico, 5th Duke of Lavenna)
1녀 슈베린 백작부인 클라우디아
(Claudia, Countess of Schwerin)
1708년 1월 20일 1801년 12월 17일 19대 슈베린 백작 에마누엘
슬하 2남 3녀
4대 콜마르 후작 루트비히
(Ludwig, 4st Marquess of Kolmar)
1남 프라이베르크 국왕 마리우스
(Marius, König von Freiberg)
1712년 7월 13일 1768년 3월 23일 당뉴의 마리루이즈
슬하 2남 1녀

여담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빼어난 미모와 여러 영지덕에 온갖 왕국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훗날 그녀를 쫓아내는 팔젠 국왕 프란츠 5세조차 카를에두아르트에게 자신의 아들 카를과의 혼인을 제의하기도 했다. 물론 아르텐 가문에게 제위를 다시 넘기기 싫었던 카를에두아르트 때문에 최종적으로 무산됐다.

프라이베르크 왕위 계승 전쟁 당시 그녀의 편에 서서 팔젠 왕국과 싸우던 울첸의 공자 마티아스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처음 공주를 만났을 때는 그 용모의 아름다움에 빠져 황홀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눈을 감아도 그녀 밖에 떠오르지 않아 두려웠다. 그래서 다시는 그녀를 대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마티아스는 이후 샤를로테를 알현할 때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부관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1. 억지 명분인 것 같지만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