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철도주식회사 (서태평양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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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철도주식회사

西北鐵道株式會社

Seobuk Railway Co., Ltd.
서북의 발·한만의 다리 서북철도주식회사
국가
대한연방공화국
설립
1910년 4월 15일
영업개시
1914년 10월 20일
창업주
이용익
본사 소재지
평양부 낙랑구 왕검대로 81(정백동)
대표자
허이명
업종명
운송업
상장여부
상장기업(평도증권거래소)
기업규모
대기업
매출액
12억 2677만원 (2020년 12월/운송수입)
5611만원 (2020년 12월/기타수입)
영업이익
2억 2,109만원 (2020년 12월)
순이익
1억 8,310만원 (2020년 12월)
그룹
SB그룹
최대주주
(주)SB (지분 68.22%)

개요

대한연방공화국의 민간철도기업. 한국 제3도시이자 조선 제2도시인 평양시에 거점을 두고 있으며, 한국 최대의 민간철도기업으로 손꼽힌다. 약칭은 '서철'. 그러나 회사는 물론 이용객들도 약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서북철도'라는 풀네임으로 부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북으로는 의주시, 서로는 삼화시, 동으로는 강동시, 남으로는 해주시한주시에 이르는 총연장 712㎞의 방대한 노선망을 갖추고 있다. 심지어 동아시아 민철업체들 중에서는 매우 드문 200㎞/h급 고속철도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만주 민간철도업체들과 연계한 화물열차 운행도 활발하다. 이를 바탕으로 SB그룹이 서한만 연안지역에서 건설, 유통, 버스, 택시, 통신, 스포츠는 물론 광업, 식품, 중공업에까지 진출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한 1등공신이며, 동시에 조선 서북권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축이기도 하다. 서북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SB그룹은 평양부와 평안도 지역에 본사를 둔 기업들 중 5위 안에 드는 대형 기업집단이다.

조선 최대의 민철기업이라는 점에서 종종 만주의 남만주철도, 일본의 킨테츠, 이어의 IR 등과도 비견된다. 그러나 서북철도가 여타 민철기업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활발한 간척사업과 도시건설을 통해 사실상 서한만 연안 도시권을 스스로 건설해냈다는 점이다. 다른 민철기업들도 역세권 개발을 통해 승객을 확보하고 부대사업을 영위하는 경우는 많지만, 서북철도의 주요 노선 연선은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넓은 갯벌이 펼쳐져있던 지역으로 전통적인 경의축선 회랑지대에서 국철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새로운 교통축과 도시권을 구축하려 한 결과 현재는 오히려 개발 여건이 좋은 드넓은 매립지 위에 국철 경의선 연선보다도 번화한 도시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풍경을 보이고 있다.

역사

1910년 4월 15일, 전 궁내부 내장원경을 역임한 사업가 이용익의 주도로 평양에서 설립되었다. 이용익은 내장원경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활발했던 황실의 철도 건설 투자에 깊이 관여했는데, 퇴임 후 설립한 서북개발주식회사가 평양 남부 토성, 낙랑 지역 매립 및 개발권을 획득하자 이를 기반으로 당시 건설중이던 보산제철소와 낙랑을 연계하는 철도사업을 구상했던 것이다. 1914년 10월 20일 최초의 노선인 보산궤도선(대동강-보산)이 영업을 개시했으며, 1차대전 직후인 1919년에는 보산궤도선을 연장하여 성암을 거쳐 삼화항에 이르는 총연장 52.1㎞의 대동강궤도선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1차대전 직후인 1921년 대동강궤도선을 연장하여 동대원, 문수, 능라도를 거쳐 서포에서 종착하는 평양동부순환선 사업을 구상하였으나 동평양 개발사업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던 평양부청에 의해 반려되었다. 이에 1922년 보통강전기궤도와 합작으로 보통강선(보통강-간리) 연장에 착수, 1926년 낙랑궤도선(봉수-낙랑)을 개통하였다. 이와 함께 1923년 6월 10일 낙랑역에 남평양 최초의 백화점인 서북백화점을 열었고, 1926년 낙랑궤도선의 개통과 함께 두로도에 서북대공원을 개장하였다.

서북백화점을 비롯한 연선 개발사업으로 풍부한 자금력을 갖춘 서북철도는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자 자금난에 빠진 서북권 민철회사들을 하나둘 인수하면서 공격적인 노선망 확장에 돌입했다. 우선 1930년 보통강전기궤도를 인수, 보통강선과 낙랑궤도선을 통합하여 서북선으로 개칭하고 1931년 간리-영유 구간을 개통하였으며, 1932년 대동강궤도선의 지선인 삼화온천선(강선-삼화온천)을 개통하고 서북호텔(現 SB삼화리조트)을 개장하였다. 같은 해 자회사인 해서궤도주식회사가 해주-신천간 해서선을 개통하였으며, 이어 1934년 황해철도주식회사와 합작으로 장장 10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삼화철교를 개통, 대동강선이 해주까지 연장됨에 따라 서북남부선으로 개칭되었다.

당초 서북남부선은 당시까지 평양 방면 국철노선이 없던 해서권 최대도시 해주 지역에 평양 방면 철도노선을 공급하여 상당한 수익을 낼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하필 이 시기 제1차 만주전쟁에 이은 만주의 분단으로 한만간 주 교통축이 관북축으로 옮겨간 탓에 고전적인 경의축은 상당한 침체를 겪었다.[1] 자연히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경의축 민철업체들 역시 대공황까지 겹쳐 큰 타격을 받았는데, 낙랑지구 및 낙랑역세권 개발, 삼화온천 사업 등으로 안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했던 서북철도는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해주 진출의 파트너였던 황해철도는 결국 1937년 파산하고 서북남부선의 황해철도 구간(해주-재령)과 황해북부선 구간(사리원-장연)은 국유화되었다. 서북남부선 역시 해주까지의 직통운행이 재령까지로 단축되었고, 서북철도는 운행구간이 단축된것도 모자라 재령역에 별도의 플랫폼과 회차시설을 설치하는 뼈아픈 지출을 감내해야 했다.

사실 서북철도는 이 때 마음만 먹으면 황해철도를 병합하고 서북남부선 전체를 손에 넣는것도 가능했으나, 당시 사장이었던 이종호[2]가 공영당 정권에 비협조적이었던 탓에 정부가 황해철도의 국유화를 강행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관서 경제계는 제1차 만주전쟁 이후 중단된 남만주와의 경제교류가 재개되기를 기대하면서 공영당 정권을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입장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서북철도를 이끌던 이종호는 특이하게도 일본제국의 패망을 점치며 향후 남만주와의 교류는 일본과의 화의가 아닌 서방 주도의 방식으로 재개될것이라는 생각으로 공영당 정권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3] 이 때문에 서북철도는 1942년 3월 혁명 직전까지 3일에 한 번 꼴로 세무조사를 받는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제1금융권에서의 자금조달에도 큰 제약을 받았으나, 역으로 3월 혁명으로 공영당 정권이 몰락하고 대한연방공화국이 수립되자 관서 경제계가 된서리를 맞는 속에서 이른바 구국기업으로 선전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서 경제계의 수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대우와는 별개로 1942년 1월부터 8월까지 내내 한일간 최전선으로 전장터가 된 서북권은 엄청난 인명·재산피해를 입었고, 서북철도 역시 영유읍이 수복된 1942년 8월 27일 당시 북부선에서 운행 가능한 구간이 대동강-토성 구간뿐일 정도로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서북철도는 이를 기회로 삼아 당시까지 노면전차 사양으로 건설되어 2량 운행이 한계였던 북부선 설비를 낙랑철교를 포함하여 대폭 뜯어고쳐 1945년 5월 낙랑역 기준 10량 대응에 150㎞/h급 운행이 가능한 신규 선로로 재개통하였다. 이어 1948년에는 토성철교를 포함한 남부선을 동일 사양으로 개량, 재개통하는 동시에 기존에 삼화시 동전리로 우회하던 남부선 삼화철교를 서쪽으로 이설, 도지리-각후산 사이의 신삼화철교를 개통하고 본선을 안악, 신천 방면으로 연장하여 신천온천에 서북신천호텔(現 SB신천리조트)을 개장하였다. 남부선 개량사업은 1950년 1월 16일 신천-해주 구간이 개통되면서 마무리되었고, 비슷한 시기 평양 남부권의 도시개발을 노리고 낙랑-대동강 구간 선로를 이설, 연장하여 1950년 4월 10일 낙랑-사동간 서북철도 동부선이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0년대~40년대 전반기에 걸친 관서권 경제의 경색을 해소시켰고, 한만간 국제간선인 경의축의 물동량은 기존 경의선 철도 및 경의가도만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평양 도시권의 확대로 막대한 자금력을 확보한 서북철도는 1951년 1월 2일 시무식에서 공식적으로 '신경의선' 전략을 선포하고, 그 해 4월 북부선 영유-누천 구간을 연장한 데 이어 9월에는 다사철도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다사도선을 북부선 구간으로 편입하였다. 1954년 12월 10일 다사도항-영미 구간과 용암포-신의주 구간이 개통되고, 1955년 3월 10일 서북대령강철교와 서북청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1926년 낙랑궤도선 개통 이후 29년만에 서북북부선 전국간이 완성되었다.

  1. 1930년 평양과 금주의 인구는 각각 210만, 185만이었으나, 1940년에는 평양이 218만인데 비해 금주는 222만명을 기록하여 한때 조선 제2도시의 지위가 역전되었다. 그리고 1930년 86만명이던 함흥 인구는 1940년 137만명을 기록하며 만주 분단의 수혜(?)를 톡톡히 입었다.
  2. 창업주 이용익의 손자.
  3. 창업주이자 이종호의 조부인 이용익이 강경 반일주의자였던 것도 있지만, 일본 민철업체들과 자주 교류하면서 일본 정부와 사회의 비상식적인 모습에 학을 뗀 것도 컸다. 실제로 일본과 교류가 잦았던 당시 대형 민철기업들은 전반적으로 공영당 정권에 시큰둥하거나 서북철도처럼 매우 비협조적인 경우가 상당했다. 서북철도 외에는 영남 최대 민철업체인 가야철도 대표 안희제가 대표적. 이는 전전(戰前) 한국에서 다이도큐나 킨테츠처럼 정부가 밀어주는 초대형 사철이 탄생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밀어줄만한 대형사철들은 죄다 정권에 비협조적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