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쿠스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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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르크반도 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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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아스와 에벨렌 ===
=== 라디아스와 에벨렌 ===
=== 평의회 련맹 ===
=== 평의회 련맹 ===
=== 세르크 연방 ===
=== 세르크 연방 ===
=== 14월 헌정위기, 독재 시대 ===
=== 12월 헌정위기, 독재 시대 ===
당시 대통령 홍두영과 대법원장 화도는 당시 강력햇던 사법부의 권한을 통해 제도권 정당을 해산하고 사회민주당 정권의 연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1896년 12월이 다가오며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세르크 사회당의 이세와 제일보수당의 티토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비교적 우익 성향을 가진 이세 후보가 결선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취임까지 며칠도 남지 않은 그때, 불가리스 정권과 화도 대법원장은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며 이번 대선의 무효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잇따른 국민의 반발과 공안의 비협조적 태도로 인해 정권 장악 게획은 점점 꼬여가게 된다. 결정적으로 계획에 협조하는 것의 대가로 총참모장직을 보장받았던 티토는 전군영내대기를 발표하였으나 수도방위사령부장이였던 이강은 군부의 정권 장악을 티토에게 설득하였고 이에 넘어가 군부는 총궐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정권 찬탈의 성공 이후 군부내에서는 의견 충돌이 벌어진다. 수도방위사령부장 이강과 당시 총참모장이였던 티토는 민정 이양에 대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며칠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졌으나 티토 총참모장은 패배하며 수도방위사령부장이 대통령직을 승계받게 되었다.
 
이후 이강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신헌법을 제정하며 군부독재가 시작되게 된다.
=== 세르크 혁명, 평의회 공화국을 열다 ===
=== 세르크 혁명, 평의회 공화국을 열다 ===
=== 평의회공화국연방의 탄생 ===
=== 평의회공화국연방의 탄생 ===
==== 입법쿠데타? ====
==== 입법쿠데타? ====
[[분류:세르쿠스]]
[[분류:세르쿠스]]

2024년 5월 5일 (일) 21:45 판

세르쿠스의 역사
History of Ser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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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476
세르크족
설웅 설련 영변 서부 세르크족 오더족
설경 남설주 극래주 읍루 어동
중세
476~1423
세르쿠스 제국 우릴 오더 왕국
ㅤㅤ
우라란트 신성 오더
근세
1423~1670
세르쿠스 공국 오더령 우라란트
근/현대
1670~
세르쿠스 왕국 우라란트국
세르쿠스 제국
라디아스 제국 에벨렌 연합왕국 우라란트 연방 오더 왕국
라디아스 제2 제국 에벨렌 공화국
평의회 연맹
라디아스국
세르크 연방
오더 인민공화국
세르크 연방 세르크 오더 군정청
세르쿠스 공화국
세르쿠스국
세르쿠스국 오더국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
우라란트 소비에트
평의회 공화국 연방

개요

세르쿠스 및 세르크 반도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고대

세르크족의 시작

동이데아 국가의 시초가 되었던 세르크족은 그 기원이 명확치 않으나 오더의 북방족들이 남하하며 기원전 641년 세르니움 지방에 도착하여 그 문화를 형성하였다. 오더의 북방족들은 남서쪽으로 남하하기도 하였는데 우라란트 산맥이란 자연적 장벽이 세르니움 지방으로 향한 북방족들과 그들을 차단하였기에 서부 세르크족으로 분화하였고 이는 우라란트의 기원이 된다.

세르니움 지방에 정착한 세르크족들과는 달리 지금의 세렌 지방에 정착한 세르크족들도 있었다. 또는 세르니움에서 더 남하하여 지금의 리토레 지방에 정착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비슷하면서 다른 문화를 꽃피웠다.

세르크 반도의 고대국가

판도(읍루 및 남설주는 위치가 명확하지 않음)

세르크 반도 각지에 정착한 세르크족은 대략 기원전 580년 세르니움 지방에 설웅, 세렌 지방에 설련, 리토레 지방에 영변국을 세웠다. 설웅과 설련은 상대적으로 문화가 비슷하여 상호간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이에 기원전 548년 설웅과 설련은 서로 통합하여 설경국을 세웠다. 설경국의 초대 왕인 원세왕(圓世王)은 설련국의 공주 아려(娥麗)와 설웅국의 왕 상림(爽林)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세르크 민족의 정신적인 기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왕호인 원세(圓世)는 '둥근 세상'이라는 뜻으로, 하늘과 땅이 둥글며 사람이 그 사이에 서있다는 세르크 민족의 고유의 천하관이 반영되어있다. 한편, 지금의 우라란트 지방에서 갈라져 나와 우라란트 산맥을 넘어간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의 크라이츠와 보스토키아 지방에 정착해 각각 극래주, 남설주라는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우라란트내의 서부 세르크족 또한 읍루라는 고대 국가를 건국했다.

임나도버부설

한편, 비주류 사학계에서는 세르크의 고대 국가 형성이 고대 도버권의 문명인 '토비에 대왕국'의 식민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세르크 반도의 통일

설영전쟁

설경국은 설웅과 설련간의 통합으로 시작해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나갔다. 설경국은 약 기원전 413년 리토레의 강성한 국가였던 영변국과의 전쟁을 치렀다. 그들은 120년 동안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첫 번째(413~394)는 영변이 크게 승리하여 설경은 세르니움 코앞까지 후퇴하였으나 2차 전쟁(364~352)서 승리하여 지금의 파라니움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영변국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어냈다. 3차 전쟁(284~261)은 영변국의 최후의 저항이였는데 이를 위해 영변은 증산이라는 장군에게 영변이 5만명 남짓의 마지막 힘을 다해 구성한 군단을 배속했고 그는 그 군단으로 설경을 침공하였다. 설경국은 9만 2천명이라는 10만명에 가까운 대군을 끌고 와 지금의 리토레 동부에서 대기하였고 지형이 험준했던 리토레 서부로 진격할 가능성은 없었으리라 예상했지만 증산은 리토레 서부의 거대한 강을 그의 군사와 4일 장장 강행군을 통해 동파하였고 지금의 김해시 근교에서 그는 방심한 설경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거꾸로 포위해 5만명 이상의 피해를 입히며 대승하였다. 이에 충격받은 설경국은 그가 진격한 곳을 모두 초토화시키며 영친을 추격했고 이후 대략 10년 이상의 소모전을 통해 증산은 고립되었고 설경군은 지금의 증산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고 지친 영변군은 기원전 263년 전군 항복을 선언하였으며 기원전 261년에 영변은 설경에게 완전히 정복당하였다.

극래주와 남설주는 읍루나 설경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남설주는 넓은 평지를 가지고 있었고 말을 가축으로 쓰는 문화를 가져 자연스럽게 유목 생활이 정착되었다. 남설주의 유목민들은 주변의 부족들을 약탈하였지만 그중 가장 부유했던 극래주로의 침입이 잦았다. 극래주는 바다 인근과 강 인근에 마을과 도시를 세워 해로를 통한 무역이 활발하여 항해술이 발전하였고 현 카날리스 지역과 교류하였다. 또한 남설주의 기마병에 대항하기위해 모든 도시와 마을을 요새화하면서 축성기술이 발전하였고 군수물자를 만드는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기원전 258년 설경국이 양주에 최후통첩을 하였으나 극래주는 거부하고 남설주는 굴복하여 통합되었으며 설경국의 통치에 따르지 않은 다른 부족들 또한 정복당했다. 이후 기원전 257년에 설경이 극래주를 침공하고 3년 후 승리하여 극래주를 병합하였다. 이로써 세르크반도의 대부분은 설경에 통합당하게 되었다.

설경국의 최대영토

기원후 476년까지 설경국은 부흥해왔다. 안으로는 설웅과 설련, 극래주와 같은 여러 도시들이 번성하였고 밖으로는 여러 부족들을 굴복시키며 세르크 반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반도 내의 다양한 문화를 획일화시켜 세르크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켰으며 통치 체제로서 영토를 쪼개 왕족의 친족들과 공신들에게 배분하여 통치하게 하는 봉건체제를 만들어냈고 국내를 안정화시켜 약 250년간의 전성기를 누렸다.

설경국의 몰락

배경

그러나 기원전이 끝나고 기원후가 시작될 때, 설경국은 수십명의 성군이 전성기를 이끌어왔으나 천천히 몰락세를 맞게 된다. 설경국은 성장하는 북방의 오더인들과 서방의 솔란-데르스인들을 꾸준히 토벌해왔는데 세입은 한정되어있는 상황에서 비대한 군대의 유지비는 점점 상승해가고 이에 따라 원정에 필요한 비용 또한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오랜시간 동안 싸워왔던 솔란-데르스인들은 지금의 크림지방을 정복하여 크리미아(Kremi)를 세웠고 설경군의 전술을 파악하여 설경의 원정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솔란-데르스인들의 새로운 전술은 설경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이것은 설경군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남설주와 극래주 지역까지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성군들 또한 서방의 솔란-데르스인들을 통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으나 이것은 솔란-데르스인들의 끝없는 저항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기원후 61년, 새로운 국왕 장양왕이 즉위하여 다시 원정을 실행하기 위해 군대의 편제를 재편하고 여러 개혁을 실행하여 서방의 이민족들에 대한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그는 원정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전사하여 이 원정은 이후 3년만에 종결되며 흐지부지되었다. 그는 왕실 재산마저 팔아가며 토벌에 최선을 다했으나 실패라는 결과는 설경국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연이은 방위 실패는 극심한 치안 불안정과 사회기반 붕괴를 일으켰다. 당연히 군대의 정예도 및 충성도 문제를 야기했다. 여러 군주가 암살당하며 연이은 혼란기가 이어졌고 이는 2세기 동안 수십명의 군주가 즉위하고 퇴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혼란기를 틈탄 북방의 오더인들과 서방의 솔란-데르스인들은 이빨빠진 호랑이를 향해 공격을 시작한다.

솔란인의 동진

기원후 189년, 설경국의 혼란이 가장 거셀 때, 솔란-데르스인들은 남설주와 극래주지역에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당시 설경국의 지방행정부는 부정부패 및 중앙정부의 혼란으로 인해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고 이로인해 여러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당시 극래주의 군관중 하나였던 원광 군관은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극래주의 코앞이였던 지금의 중랑지방에서 대패하면서 솔란-데르스인들이 극래주로 침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요새화된 극래주의 건물들은 저항을 지속했고 3달 이상의 전투 끝에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허나 남설주에 잔존해있는 수많은 솔란-데르스인들은 언제든지 세렌과 세르니움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유목민족이 살던 남설주에 정착한 솔란-데르스인들은 지금까지도 일부 남아있는 보스토키아 지방만의 특색을 남기고 갔다.

기원후 189년에서 190년으로 넘어가던 때, 설경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실상 중앙에서 지방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며 극래주와 설웅 사이의 봉건체제로 지배권을 유지해왔던 지금의 소코비아, 세르노아 지방은 솔란-데르스인들이 점령하여 그들의 약탈을 막을 수 없었다. 이들은 약탈과 파괴를 일삼으며 동진을 계속해왔으며 설웅에 다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때, 솔란-데르스인들의 군대를 이끌던 알라리크 3세는 설경 조정에게 금 및 여러 귀중품, 노예를 상납하면 설웅을 침공하는 것만은 하지 않으리라 선언했고 설경국내에서는 거대한 혼란이 이어졌다. 소문을 들은 설웅 시민들은 설련으로 가기 위한 거대한 피난길을 만들어냈다. 설경국의 혼란을 잠시 잠재운 설경국의 충신 하나인 사선휘는 수도가 약탈당하는 것만을 막기 위해 그의 제안에 승낙하여 했으나, 설경국의 왕 주변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로 처형당하기에 이른다. 충신이자 명장중 하나였던 사선휘의 처형후, 설경국은 제안을 거부하였고 알라리크 3세는 설웅으로 향한다. 그는 설웅을 포위했고 다시 한번 제안하였고 설경국은 협상에 응했고 알라리크 3세가 협상장으로 향하던 중 설경군의 기습에 분노한 그는 설웅으로 군대를 끌고 간다.

설웅의 군대는 저항하였으나 결국 투항하였고 결국 기원후 193년 3월달, 5일간의 대약탈이 이어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추정수치는 대략 40,000 정도이며 이보다 더 많은 민간인이 사망하고 겁탈당했으리라 추측된다. 수십의 선대 왕의 묘지가 파헤쳐졌으며 여러 문화재들은 파괴되어 이로인해 발생한 재산적 피해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는 설경국내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줬고 설경국의 본진이 약탈당하였다는 사실은 곧 위기감을 느끼던 봉건 영주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며 그들은 반란을 준비하게 된다.

군웅할거

그중 가장 먼저 행동한 영변의 정희우란 군관은 설웅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반기를 들 준비를 하였다. 기원후 193년 그는 영변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설경 중앙정부가 사실상 무너진 사이 주변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는 영변의 제후를 폐하고 자신이 새로 독립을 선언하며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정나라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행동한 자는 소코비아의 소기백이라는 제후가 기원후 193년 소나라를 건국하였고 지금의 체틴과 그 인근 지역을 지배했다. 소코비아 북부에는 유한광이라는 제후의 유나라가 세워졌고 지금의 파라니움 서쪽에 무휼이라는 제후의 무나라가 나타났으며 서쪽에는 제후가 약탈의 피해로 사망해 수십의 군관이 투쟁하여 수십의 나라로 쪼개졌고 극래주 또한 제후가 사실상 독립적으로 통치하던 상태였으며 남설주와 소코비아 서부를 비롯한 서쪽에는 솔란-데르스인들 내의 여러 부족들이 7개의 국가를 세우니 그것이 각각 엘라미뉴, 노섬브루스, 필리코테뤼아, 수에빌란드, 오르도비나, 노블레냐, 켄트였다. 그리고 나머지 지역 또한 여러 제후들이 나라를 세우니 설경국은 기원후 260년쯤 되면 설웅과 설련지방 이외에 모든 지역이 떨어져나갔기에 사실상 산소호흡기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렇게 큰 위기가 닥치자 설경국 왕조내의 혼란은 잠재워졌고 새로 즉위한 공민왕은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한번 나서게 되나 전투에서 대패하며 모든 힘을 잃고 그저 설웅의 성곽안에서 고립되어있는 수 밖에 없었다.

기원후 320년대, 세르크반도는 거대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으나 점점 소수의 강대국들만 남아가기 시작했다. 영변 지방의 정나라는 멸망하고 제나라가 들어섰고 소코비아는 소나라가 계속 유지되었으며 설련에는 양나라가 나타났고 파라니움은 서나라가 무나라가 통일하였으나 금방 멸망하고 서나라가 건국되었다. 유나라는 솔란-데르스 칠왕국에 멸망하였다. 극래주에는 연나라가 나타났다. 설웅은 어떻게든 설경의 영토로 유지하고 있었다. 솔란-데르스 칠왕국중에서는 필리코테뤼아가 노블레냐에게, 수에빌란드는 노섬브루스와 엘라미뉴에게, 켄트는 오르도비나가 정복하였다.

기원후 340년대, 솔란-데르스 칠왕국의 노섬브루스는 노블레냐와 오르도비나 연합군에 멸망하였다. 양나라는 서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와 힘을 합쳐 소나라를 멸망시키니 노블레냐, 오르도비나, 양나라, 제나라, 그리고 여러 중소 제후들이 아직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중소 제후들을 멸망시키고 4강체제가 들어섰으나 외부에서 폭풍이 일어날 동안 힘을 비축했던 설웅의 설경은 양나라를 침공하였고 지금의 파라니움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되찾았다. 제나라 또한 리토레 및 소코비아 일부를 설경에 의해 빼앗겼다. 연나라는 솔란-데르스 왕국에게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극래주의 요새가 돌파당하며 멸망당하였다. 노블레냐와 오르도비나 또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원후 370년대, 설경의 저항은 극에 달하여 제나라를 지금의 리토레 남부, 양나라를 설련까지 쫒아냈으며 제후국들을 진압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후 설경은 노블레냐와 오르도비나와 대화를 해나가기 시작하며 점차 통일이 가까워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377년, 설경의 재통일에 다가가던 때, 이 모든 업적을 이룬 정헌왕이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계자는 숭건왕이였는데 그는 첩의 자식이어서 정통성의 문제도 있었으며 능력이 아버지같지 못해 노블레냐와 오르도비나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고 밀려났던 제나라와 양나라 또한 다시 침공해와 파라니움과 소코비아를 잃었다.

기원후 403년, 숭건왕이 퇴위하고 즉위한 인왕은 내부적으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무능한 관료들, 끔찍한 재정 상태와 외부적으로는 위협해오기 시작하는 노블레냐, 오르도비나, 제나라, 양나라와 마주했다. 그는 최대한 노력하여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위협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기원후 447년에 과로로 사망한다.

최후의 순간

그리고 기원후 459년, 노블레냐와 오르도비나는 서로간의 전쟁을 멈추고 노베스 1세의 영도 아래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설웅을 향한 서진을 시작하는데, 기원후 460년에 소코비아를 정복하였고 그들은 먼저 설련으로 향하여 양나라를 멸망시키니 이때가 기원후 465년 이였다. 그들은 마지막 동진을 시작하는데 기원후 469년 제나라를 멸망시키며 설웅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설경의 마지막 왕이였던 충정왕은 설웅의 관문이였던 한봉성에서 전투를 시작하였고 기원후 471년 한봉성이 함락되며 설웅은 열린 문이 되어버렸다. 설웅에서 충정왕은 끝에 끝가지 저항했으나 천년고도인 설웅이 폐허가 되어가는 것을 계속 보고있을 수 없었고 결국 기원후 476년 그의 군대는 항복하였고 충정왕은 폐위되었다. 이로써 설경국은 건국 1,024년만에 멸망하였다. 세르크 반도가 노베스 1세의 치세 아래 통합되었으며 그는 설웅에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선언한다.

중세

세르쿠스 제국

중세의 세르쿠스 제국은 동진한 이민족인 솔란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당초 솔란인은 세르크 반도로 진출한 침략자들이었지만, 94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피를 섞고 동고동락하며 세르크에 정착한 솔란인들 역시 세르크 민족의 역사를 이어적었다. 솔란의 문화와 언어는 세르크 민중들의 삶 사이사이에 깊게 스며들어, 현재까지도 곳곳에서 그 유수가 흘러내리고 있다.

초기

솔란 계통의 왕조가 들어선 세르쿠스 제국의 건국자는 노베스 1세(Noves the First)로, 그의 이름은 중세 솔란어로 "새로움"을 뜻한다. 한자로는 노부사(盧父士)로 음역되었으며, 어원을 고려하여 신왕(新王)으로도 표기되었다. 솔란은 예로부터 태양을 자국의 상징으로 삼아왔다. 세르크인은 솔란을 일국(日國) 혹은 양국(陽國)으로 불러왔으며, 노베스 1세 역시 자신을 솔란과 세르쿠스의 자손이라는 의미인 '양설지손(陽雪之孫)'으로 칭했다. 솔란은 세르크 민족의 '원형 천하관'을 태양의 둥근 모습과 결합시킴으로써 솔란과 세르크의 공존을 도모하였다.

플룬타 1세(Pllunta the First, 浦隆堂(포륭당))는 545년 'Normae Linguae(노르마에 링구에, 어령(語令))를 반포하여 중세 세르크어를 정립하였다. 학자 총설(聰薛)이 정리한 한자 기반의 세르크어 표기법 吏讀(이독)과 기존 민간에서 통용되던 표기법 향토(鄕吐)를 수용하여 표음주의적 문자체계를 확립하였다. 향토에서 쓰이던 문자 토결(吐訣)은 도버로 전래되어 현재의 타곤까지 이어진다.

전성기

안정기

중흥기

침체기

암흑기

말기

세르쿠스 제국 붕괴

근세

오더 지배시기

세르쿠스 독립전쟁

근현대

제2제국

세르크반도 분열

라디아스와 에벨렌

평의회 련맹

세르크 연방

12월 헌정위기, 독재 시대

당시 대통령 홍두영과 대법원장 화도는 당시 강력햇던 사법부의 권한을 통해 제도권 정당을 해산하고 사회민주당 정권의 연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1896년 12월이 다가오며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세르크 사회당의 이세와 제일보수당의 티토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비교적 우익 성향을 가진 이세 후보가 결선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취임까지 며칠도 남지 않은 그때, 불가리스 정권과 화도 대법원장은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며 이번 대선의 무효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잇따른 국민의 반발과 공안의 비협조적 태도로 인해 정권 장악 게획은 점점 꼬여가게 된다. 결정적으로 계획에 협조하는 것의 대가로 총참모장직을 보장받았던 티토는 전군영내대기를 발표하였으나 수도방위사령부장이였던 이강은 군부의 정권 장악을 티토에게 설득하였고 이에 넘어가 군부는 총궐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정권 찬탈의 성공 이후 군부내에서는 의견 충돌이 벌어진다. 수도방위사령부장 이강과 당시 총참모장이였던 티토는 민정 이양에 대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며칠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졌으나 티토 총참모장은 패배하며 수도방위사령부장이 대통령직을 승계받게 되었다.

이후 이강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신헌법을 제정하며 군부독재가 시작되게 된다.

세르크 혁명, 평의회 공화국을 열다

평의회공화국연방의 탄생

입법쿠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