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쿠스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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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크 반도 각지에 정착한 세르크족은 대략 기원전 580년 세르니움 지방에 설웅, 세렌 지방에 설련, 리토레 지방에 영변국을 세웠다. 설웅과 설련은 상대적으로 문화가 비슷하여 상호간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이에 기원전 548년 설웅과 설련은 서로 통합하여 설경국을 세웠다.
세르크 반도 각지에 정착한 세르크족은 대략 기원전 580년 세르니움 지방에 설웅, 세렌 지방에 설련, 리토레 지방에 영변국을 세웠다. 설웅과 설련은 상대적으로 문화가 비슷하여 상호간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이에 기원전 548년 설웅과 설련은 서로 통합하여 설경국을 세웠다.
한편, 지금의 우라란트 지방에서 갈라져 나와 우라란트 산맥을 넘어간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의 크라이츠와 보스토키아 지방에 정착해 각각 극래주, 남설주라는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우라란트내의 서부 세르크족 또한 읍루라는 고대 국가를 건국했다.
설경국의 초대 왕인 원세왕(圓世王)은 설련국의 공주 아려(娥麗)와 설웅국의 왕 상림(爽林)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세르크 민족의 정신적인 기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왕호인 원세(圓世)는 '둥근 세상'이라는 뜻으로, 하늘과 땅이 둥글며 사람이 그 사이에 서있다는 세르크 민족의 고유의 천하관이 반영되어있다. 한편, 지금의 우라란트 지방에서 갈라져 나와 우라란트 산맥을 넘어간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의 크라이츠와 보스토키아 지방에 정착해 각각 극래주, 남설주라는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우라란트내의 서부 세르크족 또한 읍루라는 고대 국가를 건국했다.
==== 임나도버부설 ====
==== 임나도버부설 ====
한편, 비주류 사학계에서는 세르크의 고대 국가 형성이 고대 도버권의 문명인 '토비에 대왕국'의 식민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 비주류 사학계에서는 세르크의 고대 국가 형성이 고대 도버권의 문명인 '토비에 대왕국'의 식민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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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국은 설웅과 설련간의 통합으로 시작해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나갔다. 설경국은 약 기원전 413년 리토레의 강성한 국가였던 영변국과의 전쟁을 치렀다. 그들은 120년 동안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첫번째(413~394)는 영변이 크게 승리하여 설경은 세르니움 코 앞까지 후퇴하였으나 2차 전쟁(364~352)서 승리하여 지금의 파라니움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영변국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어냈다.  
설경국은 설웅과 설련간의 통합으로 시작해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나갔다. 설경국은 약 기원전 413년 리토레의 강성한 국가였던 영변국과의 전쟁을 치렀다. 그들은 120년 동안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첫 번째(413~394)는 영변이 크게 승리하여 설경은 세르니움 코앞까지 후퇴하였으나 2차 전쟁(364~352)서 승리하여 지금의 파라니움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영변국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어냈다.  
3차 전쟁(284~261)은 영변국의 최후의 저항이였는데 이를 위해 영변은 증산이라는 장군에게 영변이 5만명 남짓의 마지막 힘을 다해 구성한 군단을 배속했고 그는 그 군단으로 설경을 침공하였다. 설경국은 9만 2천명이라는 10만명에 가까운 대군을 끌고 와 지금의 리토레 동부에서 대기하였고 지형이 험준했던 리토레 서부로 진격할 가능성은 없었으리라 예상했지만 증산은 리토레 서부의 거대한 강을 그의 군사와 4일 장장 강행군을 통해 동파하였고 지금의 김해시 근교에서 그는 방심한 설경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거꾸로 포위해 5만명 이상의 피해를 입히며 대승하였다. 이에 충격받은 설경국은 그가 진격한 곳을 모두 초토화시키며 영친을 추격했고 이후 대략 10년 이상의 소모전을 통해 증산은 고립되었고 설경군은 지금의 증산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고 지친 영변군은 기원전 263년 전군 항복을 선언하였으며 기원전 261년에 영변은 설경에게 완전히 정복당하였다.
3차 전쟁(284~261)은 영변국의 최후의 저항이였는데 이를 위해 영변은 증산이라는 장군에게 영변이 5만명 남짓의 마지막 힘을 다해 구성한 군단을 배속했고 그는 그 군단으로 설경을 침공하였다. 설경국은 9만 2천명이라는 10만명에 가까운 대군을 끌고 와 지금의 리토레 동부에서 대기하였고 지형이 험준했던 리토레 서부로 진격할 가능성은 없었으리라 예상했지만 증산은 리토레 서부의 거대한 강을 그의 군사와 4일 장장 강행군을 통해 동파하였고 지금의 김해시 근교에서 그는 방심한 설경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거꾸로 포위해 5만명 이상의 피해를 입히며 대승하였다. 이에 충격받은 설경국은 그가 진격한 곳을 모두 초토화시키며 영친을 추격했고 이후 대략 10년 이상의 소모전을 통해 증산은 고립되었고 설경군은 지금의 증산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고 지친 영변군은 기원전 263년 전군 항복을 선언하였으며 기원전 261년에 영변은 설경에게 완전히 정복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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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476년까지 설경국은 부흥해왔다. 안으로는 세르니움과 세렌, 크라이츠와 같은 여러 도시들이 번성하였고 밖으로는 여러 부족들을 굴복시키며 세르크 반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반도내의 다양한 문화를 획일화시켜 세르크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켰으며 통치체제로서 영토를 쪼개 왕족의 친족들과 공신들에게 배분하여 통치하게 하는 봉건체제를 만들어냈고 국내를 안정화시켜 약 25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기원후 476년까지 설경국은 부흥해왔다. 안으로는 세르니움과 세렌, 크라이츠와 같은 여러 도시들이 번성하였고 밖으로는 여러 부족들을 굴복시키며 세르크 반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반도 내의 다양한 문화를 획일화시켜 세르크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켰으며 통치 체제로서 영토를 쪼개 왕족의 친족들과 공신들에게 배분하여 통치하게 하는 봉건체제를 만들어냈고 국내를 안정화시켜 약 250년간의 전성기를 누렸다.
=== 설경국의 몰락 ===
=== 설경국의 몰락 ===
그러나 기원전이 끝나고 기원후가 시작될 때, 설경국은 수십명의 성군이 전성기를 이끌어왔으나 천천히 몰락세를 맞게 된다.
그러나 기원전이 끝나고 기원후가 시작될 때, 설경국은 수십명의 성군이 전성기를 이끌어왔으나 천천히 몰락세를 맞게 된다.

2023년 11월 18일 (토) 01:44 판

세르쿠스의 역사
History of Ser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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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476
세르크족
설웅 설련 영변 서부 세르크족 오더족
설경 남설주 극래주 읍루 어동
중세
476~1423
세르쿠스 제국 우릴 오더 왕국
ㅤㅤ
우라란트 신성 오더
근세
1423~1670
세르쿠스 공국 오더령 우라란트
근/현대
1670~
세르쿠스 왕국 우라란트국
세르쿠스 제국
라디아스 제국 에벨렌 연합왕국 우라란트 연방 오더 왕국
라디아스 제2 제국 에벨렌 공화국
평의회 연맹
라디아스국
세르크 연방
오더 인민공화국
세르크 연방 세르크 오더 군정청
세르쿠스 공화국
세르쿠스국
세르쿠스국 오더국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
우라란트 소비에트
평의회 공화국 연방

개요

세르쿠스 및 세르크 반도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고대

세르크족의 시작

동이데아 국가의 시초가 되었던 세르크족은 그 기원이 명확치 않으나 오더의 북방족들이 남하하며 기원전 641년 세르니움 지방에 도착하여 그 문화를 형성하였다. 오더의 북방족들은 남서쪽으로 남하하기도 하였는데 우라란트 산맥이란 자연적 장벽이 세르니움 지방으로 향한 북방족들과 그들을 차단하였기에 서부 세르크족으로 분화하였고 이는 우라란트의 기원이 된다.

세르니움 지방에 정착한 세르크족들과는 달리 지금의 세렌 지방에 정착한 세르크족들도 있었다. 또는 세르니움에서 더 남하하여 지금의 리토레 지방에 정착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비슷하면서 다른 문화를 꽃피웠다.

세르크 반도의 고대국가

판도(읍루 및 남설주는 위치가 명확하지 않음)

세르크 반도 각지에 정착한 세르크족은 대략 기원전 580년 세르니움 지방에 설웅, 세렌 지방에 설련, 리토레 지방에 영변국을 세웠다. 설웅과 설련은 상대적으로 문화가 비슷하여 상호간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이에 기원전 548년 설웅과 설련은 서로 통합하여 설경국을 세웠다. 설경국의 초대 왕인 원세왕(圓世王)은 설련국의 공주 아려(娥麗)와 설웅국의 왕 상림(爽林)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세르크 민족의 정신적인 기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왕호인 원세(圓世)는 '둥근 세상'이라는 뜻으로, 하늘과 땅이 둥글며 사람이 그 사이에 서있다는 세르크 민족의 고유의 천하관이 반영되어있다. 한편, 지금의 우라란트 지방에서 갈라져 나와 우라란트 산맥을 넘어간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의 크라이츠와 보스토키아 지방에 정착해 각각 극래주, 남설주라는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우라란트내의 서부 세르크족 또한 읍루라는 고대 국가를 건국했다.

임나도버부설

한편, 비주류 사학계에서는 세르크의 고대 국가 형성이 고대 도버권의 문명인 '토비에 대왕국'의 식민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세르크 반도의 통일

설영전쟁

설경국은 설웅과 설련간의 통합으로 시작해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나갔다. 설경국은 약 기원전 413년 리토레의 강성한 국가였던 영변국과의 전쟁을 치렀다. 그들은 120년 동안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첫 번째(413~394)는 영변이 크게 승리하여 설경은 세르니움 코앞까지 후퇴하였으나 2차 전쟁(364~352)서 승리하여 지금의 파라니움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영변국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어냈다. 3차 전쟁(284~261)은 영변국의 최후의 저항이였는데 이를 위해 영변은 증산이라는 장군에게 영변이 5만명 남짓의 마지막 힘을 다해 구성한 군단을 배속했고 그는 그 군단으로 설경을 침공하였다. 설경국은 9만 2천명이라는 10만명에 가까운 대군을 끌고 와 지금의 리토레 동부에서 대기하였고 지형이 험준했던 리토레 서부로 진격할 가능성은 없었으리라 예상했지만 증산은 리토레 서부의 거대한 강을 그의 군사와 4일 장장 강행군을 통해 동파하였고 지금의 김해시 근교에서 그는 방심한 설경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거꾸로 포위해 5만명 이상의 피해를 입히며 대승하였다. 이에 충격받은 설경국은 그가 진격한 곳을 모두 초토화시키며 영친을 추격했고 이후 대략 10년 이상의 소모전을 통해 증산은 고립되었고 설경군은 지금의 증산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고 지친 영변군은 기원전 263년 전군 항복을 선언하였으며 기원전 261년에 영변은 설경에게 완전히 정복당하였다.

극래주와 남설주는 읍루나 설경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남설주는 넓은 평지를 가지고 있었고 말을 가축으로 쓰는 문화를 가져 자연스럽게 유목 생활이 정착되었다. 남설주의 유목민들은 주변의 부족들을 약탈하였지만 그중 가장 부유했던 극래주로의 침입이 잦았다. 극래주는 바다 인근과 강 인근에 마을과 도시를 세워 해로를 통한 무역이 활발하여 항해술이 발전하였고 현 카날리스 지역과 교류하였다. 또한 남설주의 기마병에 대항하기위해 모든 도시와 마을을 요새화하여 축성기술이 발전하고 군수물자를 만드는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기원전 258년 설경국이 양주에 최후통첩을 하였으나 극래주는 거부하고 남설주는 굴복하여 통합되었으며 설경국의 통치에 따르지 않은 다른 부족들 또한 정복당했다. 이후 기원전 257년에 설경이 극래주를 침공하고 3년 후 승리하여 극래주를 병합하였다. 이로써 세르크반도의 대부분은 설경에 통합당하게 되었다.

설경국의 최대영토

기원후 476년까지 설경국은 부흥해왔다. 안으로는 세르니움과 세렌, 크라이츠와 같은 여러 도시들이 번성하였고 밖으로는 여러 부족들을 굴복시키며 세르크 반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반도 내의 다양한 문화를 획일화시켜 세르크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켰으며 통치 체제로서 영토를 쪼개 왕족의 친족들과 공신들에게 배분하여 통치하게 하는 봉건체제를 만들어냈고 국내를 안정화시켜 약 250년간의 전성기를 누렸다.

설경국의 몰락

그러나 기원전이 끝나고 기원후가 시작될 때, 설경국은 수십명의 성군이 전성기를 이끌어왔으나 천천히 몰락세를 맞게 된다. 설경국은 성장하는 북방의 오더인들과 서방의 솔란-데르스인들을 꾸준히 토벌해왔는데 세입은 한정되어있는 상황에서 비대한 군대의 유지비는 점점 상승해가고 이에 따라 원정에 필요한 비용 또한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오랜시간 동안 싸워왔던 솔란-데르스인들은 지금의 크림지방을 정복하여 크리미아(Kremi)를 세웠고 설경군의 전술을 파악하여 설경의 원정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솔란-데르스인들의 새로운 전술은 설경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이것은 설경군의 방어선이 돌파당해 남설주와 극래주 지역까지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성군들 또한 서방의 솔란-데르스인들을 통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으나 이것은 솔란-데르스인들의 끝없는 저항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기원후 61년, 새로운 국왕 장양왕이 즉위하여 다시 원정을 실행하기 위해 군대의 편제를 재편하고 여러 개혁을 실행하여 서방의 이민족들에 대한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그는 원정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전사하여 이 원정은 이후 3년만에 종결되며 흐지부지되었다. 그는 왕실 재산마저 팔아가며 토벌에 최선을 다했으나 실패라는 결과는 설경국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연이은 방위 실패는 극심한 치안 불안정과 사회기반 붕괴를 일으켰다. 당연히 군대의 정예도 및 충성도 문제를 야기했다. 여러 군주가 암살당하며 연이은 혼란기가 이어졌고 이는 2세기 동안 수십명의 군주가 즉위하고 퇴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혼란기를 틈탄 북방의 오더인들과 서방의 솔란-데르스인들은 이빨빠진 호랑이를 향해 공격을 시작한다.

솔란인의 동진

중세

대혼란기

세르쿠스 제국

초기

전성기

안정기

중흥기

침체기

암흑기

말기

세르쿠스 제국 붕괴

근세

오더 지배시기

세르쿠스 독립전쟁

근현대

제2제국

세르크반도 분열

라디아스와 에벨렌

평의회 련맹

세르크 연방

14월 헌정위기, 독재 시대

세르크 혁명, 평의회 공화국을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