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역사 (세르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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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2월 26일 보수파 및 반소비에트파를 격퇴한 3당은 총궐기 1주년을 기념하며 사회주의 국가를 선포했다. 지난 평의회 련맹의 다당제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3당은 합당하여 [[국제주의 전위당 | 전세르크 전위당]]을 구성하였다.
1904년 12월 26일 보수파 및 반소비에트파를 격퇴한 3당은 총궐기 1주년을 기념하며 사회주의 국가를 선포했다. 지난 평의회 련맹의 다당제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3당은 합당하여 [[국제주의 전위당 | 전세르크 전위당]]을 구성하였다.
==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 ==
==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 ==
건국과 함께 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건국과 함께 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당수는 전 국가주권당 총재 김해경이 맡았으며 대의원평의회에서는 전 제일민주사회 파벌이 다수를 차지했다.
축출당한 보수파들은 펠른으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구성하였고 세르쿠스국의 복귀를 위해 노력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안정화된 1910년 이후 완전히 유명무실해졌고 1919년 해산되었다.
 
지주들의 토지를 재분배하였고 국내 기업들을 국영화하며 외국인들의 자산을 동결시키는 등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계속했다. 외교적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가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무역에 어려움이 있었다.  
[[분류:세르쿠스]]
[[분류:세르쿠스]]

2024년 5월 6일 (월) 00:18 기준 최신판

개요

이 문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부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이전의 역사는 세르쿠스의 역사 문서를 참조바란다.

세르크 혁명

계속된 홍원식 정권의 독재는 많은 반발을 낳았다. 독재에 저항하던 정당중 가장 큰 세력은 사회주의 노동당을 필두로 한 좌익 세력이였다.

1903년 12월 26일, 사회주의 노동당 및 다른 민주화 세력들은 총궐기하였고 대통령궁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1904년 1월 5일, 홍원식 대통령은 사임하였고 곧바로 3월 16일 민주주의 헌법과 함께 대선이 치러졌고, 이듬해 4월 10일엔 총선이 치러졌다. 그 결과 노동자-빈농 공동명단(사회주의 노동자당과 공산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졌다.), 제일민주사회, 국가주권당이 압승하였고, 여당으로는 노동자-빈농 공동명단이 집권했다. 이 3당은 이후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으로의 체제변혁을 이끌었다.

노동자-빈농 공동명단은 민주화주역으로서 그 열기에 힘입어 집권에 성공했으나 사회주의 세력은 기존의 보수 지지층과 중도 지지층 모두에게 달갑지 않았기에 이듬해 총선에서 참패하며 여소야대의 결과를 낳았다. 여소야대의 상황으로 인해 야당과 연대할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빈농 공동명단은 국가주권당과 연대를 제의하게 된다. 국가주권당은 이전의 이강 독재 정권의 후신이였으나 어찌저찌 총선에서 선전하였다. 다만 당의 배경때문에 대중의 호감도가 좋지 못했고 이강의 지도력으로 결합되어 있었기에 이강의 은퇴 이후 당내 보수파 세력들과 국가사회주의자(State Socialism) 신세력 간의 거대한 갈등이 있었다. 이로 인해 총선 이후부터 당 지도부조차 구성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후 국가사회주의자가 승리했고 보수파는 당내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보수파들의 집단탈당으로 인해 여러 지지층을 상실했기에 노동자-빈농 공동명단의 연대 제의에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제일민주사회는 온건좌익 정당으로서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전부터 노동자-빈농 공동명단과 연대하여 민주화운동을 펼쳤다. 개혁적 사회주의 성향이 주를 이루었기에 사회주의 체제로의 변혁에 긍정적이였다.

노동자-빈농 공동명단과 국가주권당, 제일민주사회는 소비에트를 설립했으나 좌익 세력외에도 거대했던 보수파 세력은 봉기하였으나 진압당해 실패했다. 이후 보수파들은 펠른 및 타국으로 망명해 반소비에트 운동을 지속했다. 보수파의 진압 과정에서도 소비에트 내의 온건좌익들은 분열하여 반소비에트파들은 보수파와 연합하기도 하였다.

1904년 12월 26일 보수파 및 반소비에트파를 격퇴한 3당은 총궐기 1주년을 기념하며 사회주의 국가를 선포했다. 지난 평의회 련맹의 다당제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3당은 합당하여 전세르크 전위당을 구성하였다.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

건국과 함께 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당수는 전 국가주권당 총재 김해경이 맡았으며 대의원평의회에서는 전 제일민주사회 파벌이 다수를 차지했다. 축출당한 보수파들은 펠른으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구성하였고 세르쿠스국의 복귀를 위해 노력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안정화된 1910년 이후 완전히 유명무실해졌고 1919년 해산되었다.

지주들의 토지를 재분배하였고 국내 기업들을 국영화하며 외국인들의 자산을 동결시키는 등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계속했다. 외교적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가 세르크 평의회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무역에 어려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