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 철도성: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1962년 5월 1일부터 1978년 11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아이누 공화국의 공기업이었다. 1962년 정부의 시베리아 현대화 정책으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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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1일]]부터 [[1978년]] [[11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아이누 공화국의 공기업이었다. [[1962년]] 정부의 시베리아 현대화 정책으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1969년]] 적자부터 [[1978년]] 해산 직전까지 흑자를 보지 못하여 경영난에 시달렸다. 또 노사관계의 악화로 파업이 점점 더 잦아졌고, 철도성의 재정은 인플레이션까지 더해진데다 해외귀환자들의 고용 등으로 인하여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1977년 10월 26일에는 정부에 경영 안정과 사업 계승 및 운영을 위한 새 철도 회사의 공기업의 설치를 요구하여 사실상 철도성의 국유화가 확정되었다. 곧 11월 4일에는 〈아이누국유철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978년 11월 30일에는 공공기업체 [[아이누 국유철도]]가 발족하게 되어 철도성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1962년]] [[5월 1일]]부터 [[1978년]] [[11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아이누 공화국의 공기업이었다. [[1962년]] 정부의 시베리아 현대화 정책으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1973년]] 오일쇼크와 이후의 불황 등으로 인하여 막대한 누적 적자를 안게 되었고, 철도성은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 [[1973년]] 부터 [[1978년]] 국유화 직전까지 한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또 게다가 노사관계 악화로 인한 파업 등 노동 쟁의가 빈번해졌고, 철도성의 재정은 인플레이션까지 더해진데다 해외귀환자들의 고용 등으로 인하여 극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1977년 10월 26일에는 정부에 경영 개선과 사업 계승 및 운영을 위한 새 철도 회사의 공기업의 설치를 요구하여 사실상 철도성의 국유화가 확정되었다. 곧 11월 4일에는 〈아이누국유철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978년 11월 30일에는 공공기업체 [[아이누 국유철도]]가 발족하게 되어 철도성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2020년 9월 14일 (월) 23:37 판

1962년 5월 1일부터 1978년 11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아이누 공화국의 공기업이었다. 1962년 정부의 시베리아 현대화 정책으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1973년 오일쇼크와 이후의 불황 등으로 인하여 막대한 누적 적자를 안게 되었고, 철도성은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 1973년 부터 1978년 국유화 직전까지 한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또 게다가 노사관계 악화로 인한 파업 등 노동 쟁의가 빈번해졌고, 철도성의 재정은 인플레이션까지 더해진데다 해외귀환자들의 고용 등으로 인하여 극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1977년 10월 26일에는 정부에 경영 개선과 사업 계승 및 운영을 위한 새 철도 회사의 공기업의 설치를 요구하여 사실상 철도성의 국유화가 확정되었다. 곧 11월 4일에는 〈아이누국유철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978년 11월 30일에는 공공기업체 아이누 국유철도가 발족하게 되어 철도성은 최후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