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만화국의 역사}} {{틀:양씨 정권}} {{만화국의 무가정권}} ==개요== 1701년부터 1873년까지 만화국을 지배했던 [[경도 양씨]]가문의 막부정권. 다마국의 [[성산씨 정권]]과 함께 만화국에서 유일한 막부정권이다. 이들이 만화국을 지배한 시기인 1701년부터 1873년까지를 '''영본군 치국시대'''(令本君 治國時代)라고도 부른다. ==특징== 1701년 [[대영의 변]]으로 [[양정수]]에 의해 세워져서, 1873년 [[양강석]]이 경세궁으로 복궁하게 되는 [[화선정환]]때까지 약 170년간을 만화국을 통치한 정권이다. [[국방후봉제]]를 실시하면서 지방분권이 강화되었던 만화국을 중앙집권적 국가로 통일하였으며,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정지령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왜구들은 점점 사라졌으나, 규슈와 쓰시마지역 등지엔 아직도 왜구 잔당들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조선대신 만화를 목표로 삼아, 다마도나 다왜현 등의 항구지역을 약탈해갔다. 에도막부에서도 특히나 농지가 부족하여 무역을 중심산업으로 삼아왔던 사쓰마는, 무역에 있어 만화국의 존재가 너무나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전면전을 하기엔 일개 번으로서의 입지와 국력자체의 차이 때문에 무리였으며, 이에 사쓰마를 비롯한 큐슈에서 활동하던 왜구들을 사주하여, 만화를 중심적으로 약탈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1660년부터 1690년까지 유례없는 규슈왜구의 약탈침략이 만화국 북부를 중심적으로 일어났으며, 이를 [[구주왜란]]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주로 다마도와 다왜현의 항구지역을 약탈해 갔으며, 이 과정에서 다왜현의 이래왜인들은 본토왜인, 그 중에서도 특히 규슈의 왜인들에 대한 지역악감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피해가 극심해지기 시작한 1690년, 정종 대영천제는 서방방본영수였던 양정수에게 시키어 규슈왜구의 토벌을 명하였으며, 3년만에 토벌이 끝나고 돌아오자, 양정수의 지지층이 조금씩 결집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680년대에 가서는 양정수는 커져가는 명예와 세력에 취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양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하였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경도방본영사에 부임한 이후로는 가혹한 정치를 펼침으로서 안티층을 결집하게 되었다. 이로서 양정수의 위험성을 깨닫은 정종 대영천제는 권력남용과 백성착취를 일삼던 양정수를 파면코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먼저 알아차린 양정수는 1701년 정종 대영천제를 암살하였으며, 자신과 연분이 있던 홍판표 제주위한(弘鈑豹 製姝爲漢)을 천제로 세웠다. 1701년 서방방본영수였던 양정수가 자신을 좌천하려던 정종 대영천제를 암살하고 그와 사돈관계였던 홍판표를 데려와 천제의 자리에 앉혔다.([[대영의 변]]) 이후 양정수는 천제의 호위기관인 '천수국(天守局)'을 세운 후 천수국의 수장인 '영본군'(令本君)의 자리에 앉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제는 실권을 잃었으며 양씨가문의 126년간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양정수는 자신의 세력권이 있던 해동(海洞)(현재 [[만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신도(新都)'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만경수도권의 시초가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왕대홍주명(王坮泓株命) 장군은 반역 진압을 외치며 제군을 이끌고 신도를 침공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평성의 변]]) 오히려 이로 인해 제군을 완벽하게 제압한 영본군의 세력이 더욱 공고해졌을 뿐이었다. 양정수는 왕대홍주명 세력의 진압 이후 각 봉건지역의 대군, 후독등을 모아 영본군세력에 충성할 것을 확인시켰으며, 전국을 완벽히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였다. 양정수 이후 영본군에 취임한 양성택은 성경에 있던 경세궁을 신도로 옮기고, 기존의 궁을 공궁(空宮)화 하고 어응궁(御應宮)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천제인 동종 부영천제는 이에 군말없이 따랐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성경은 사실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양성택은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공고화하는데는 누구보다 특출났으나,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의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양성택은 만화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지도자로 손꼽히는 자로, 사실상 중세 후기 만화국이 조선과 같은 수준의 기근에 시달리게 된 것에는 양성택의 부정부패와 1742년에 일어난 평성대기근(平成大飢饉)이 있었다. 양성택은 천제를 상징으로서 남기고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군주로서의 영본군을 만화국의 지도자로서 온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1731년 청나라에 보낸 서신에서 영본군인 자신을 '다마방주군(多麻邦主君)'으로 나타낸 것에서 드러난다. 하여 그 사업의 일환으로서 양성택은 자신이 영본군이 되기 3년 전인 1726년부터 천수국의 본당인 천수지성(天守之城)을 신도(현재 만경)에 짓고자 열심이었고, 하여 1729년 자신이 영본군이 되자마자 천수지성의 건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부족했던건 자금이었다. 양성택은 비교적 부유했던 지방인 화남과 남동지방의 적경성, 지철판, 오송롱, 제활랑, 대돈, 영창, 지화국등 이래한인을 중심적으로 가렴주구한 조세정책을 시행하였으며, 항구이용세와 무역세까지 걷기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는 한편 경항지역을 자기 스스로 고립시키면서 화남지방의 경제를 파산시켰다. 화남지방이 파산하자, 이번엔 중평지방의 평경성 평야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조세를 매겼으며, 이때 세금을 낼 여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농민층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본군 정부는 조세의 단위를 가지고 있는 토지의 수로 책정하였는데, 노비로 전락하지 않는 농민층은 조세감면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토지를 팔거나 봉건세력에 팔았으며, 결국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마적(麻敵)이 되어 중국 복건지방이나 일본의 규슈쪽으로 해적질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중평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봉건지방유력가에겐 정경유착의 일환으로 조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하여, 그 대가로 여러가지 공물을 그들에게 받았는데, 종국에 평경성의 넓은 농토 전체가 당시 중평지방의 유력가인 평창 아씨(平倉 雅氏), 적경 구씨(的慶 龜氏), 완남 안씨(頑嵐 安氏)의 중평3문(中平三門)의 사유지로 3등분되기에 이르고, 결국 주요 재정창구였던 이 두 곳이 망하게되고, 평경성지역에서 생산되던 수많은 농산물이 중평3문의 몫이 되어버리자, 생산의욕은 저하되고 농업이 망하면서 평성대기근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이 중평3문은 영본군시기가 끝나기 전 까지 만화국 전체를 휘어잡는 세 가문으로서 만화국 전체를 피폐하게 하였다. 한편, 중평3문을 제외한 나머지 영주세력들과 귀족세력들은 영본군 정부와 상대적으로 멀어지게 되면서 세력다툼에서 제외되었고, 평성대기근의 영향으로 인해 일반 평민들과 다를것 없이 재정고에 시달리게 되면서 기존의 신분제도와 봉건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3대 영본군이었던 광희군 양치홍(光熙君 洋治洪)의 시기에 와서는 신도 이외의 대부분의 지역이 행정력을 떠나 군웅할거와 도적발생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1842년, 영국의 HMS피나포어호가 경항에 불법으로 상륙하였다. 경항에 상륙한 HMS 피나포어호의 선원들은 경항 내에 있던 상인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그곳에 불법으로 영국군의 초소를 세웠으며, 만화국에 강제적인 개항을 요구했다. 양씨정권은 처음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였으나, 점점 경항 주변 상권을 위협하면서 공격적으로 다가오던 영국군 측에서 이들의 무단점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14명의 상인을 무자비하게 죽이자, 이에 이들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결국 HMS 피나포어호는 경항점거 12일만에 돌아갔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몇십년간의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결국 최후엔 1867년, 레이놀드 제독이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와 만화국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신유양침) 얼마안가 이들의 개항요구를 수용하였다. 개항이 성사되고 난 뒤 경항을 중심으로 서양문물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만화는 새로운 문물과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후부터 들어오던 수 많은 불평등 조약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고, 근본적으로 서양에 겁을 먹어 덥썩 개항 한 것을 기점으로 일반 양민들의 억눌려온 화가 크게 일어나고, 기존에 무시당해오던 몰락귀족세력들이 천제세력과 규합하여 정권세를 늘려가기 시작하자 양씨정권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갔으며 이에 전국적으로 양씨정권을 타도하는 움직임이 격화되었다. 숙종 영세천제의 사망 이후, 영본군 정권의 세력약화를 어려서부터 지켜봐온 순조 화선천제는 천제에 오르고 새 조정을 꾸린 후, 영본군 정권의 약화 기세를 몰아 영본군의 천수국을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양강석 정권에 대해 '복궁'을 요구하였고, 이에 양씨정권이 응하고 양씨정권의 마지막 영본군이었던 양강석이 1873년 경세궁으로 돌아가면서 양씨정권은 막을 내렸다. ==경제== ==문화== ==대외 관계== ==역대 영본군== {{만화국의 역대 영본군}}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Large (원본 보기) 틀:Resize (원본 보기) 틀:Small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만화국의 무가정권 (원본 보기) 틀:만화국의 역대 영본군 (원본 보기) 틀:만화국의 역사 (원본 보기) 틀:양씨 정권 (원본 보기) 양씨 정권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