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만국 초대 영도인
대만국 초대 총통
대만국 2대 국무총리
대만성 9대 성장
량전수
梁眞肅
한국식 독음 양진숙
직업 정치가, 관료
출생 1893년 8월 19일
대한국 대만성 타이베이
사망 1947년 1월 5일 (53세)
대한국 북강성 평흥
학력 국립대만대학 법학과 학사
국립경기대학 법학 석사
가족관계 배우자: 쑹안밍
슬하 1남 2녀
재위기간
대만성 9대 성장
1936년 2월 8일 ~ 1938년 7월 15일
대만국 총통
1938년 7월 20일 ~ 1943년 1월 17일
대만국 국무총리
1940년 1월 6일 ~ 1943년 1월 17일
대만국 영도인
1940년 4월 7일 ~ 1943년 1월 17일

개요

대만성 한화계 출신의 한국의 정치인, 관료이자 타이완 자치정부의 우두머리를 맡았었던 독재자.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욕으로 인해 일본제국에 적극 협조하여 대만인들의 강제징집, 징용을 묵인하였으며 반대파를 학살한 죄를 물어 대만이 수복되자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생애

유년기, 청년 시절

대만성 성장

일본제국에 협조

타이완의 지배자

몰락과 최후

1943년 1월 7일 한국군이 기륭시에 상륙하여 타이베이로 남진하자 곧바로 타이난으로 천도를 선포하고 항전을 주창하였으나 일본제국이 대만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에 너무나도 공허한 구호였다.

1월 13일 타이난에서 그는 전열을 가다듬고 2천명의 군인을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5만명이 넘는 한국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치정부내 많은 인사는 서서히 항복, 강화로 기울었으나 량전수도 이에 수긍하여 곧바로 투항으로 선회하였다.

1월 17일 하지만 량전수에 대한 책임론이 불기 시작했고 그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이 량전수를 축출했다. 이후 그는 죽림에 감금되었고 그해 6월 자치정부가 해산되고 나서야 풀려났으나 곧바로 다시 한국 군사경찰에게 체포되었고 한국 본토로 압송되어 평흥에 위치한 영강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그는 자기변호에 집중하며 여러 서적을 쓰는등 집필 활동을 했지만 모두 출판금지 처분을 받았다.

1946년 5월 도쿄군사재판이 열리자 검사단은 한국 정부에게 량전수가 법정에 출석하도록 도움을 달라 요청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자국민이란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 외환과 내란의 모든 죄목으로 기소했고 1심부터 모두 사형을 언도받아 이듬해 처형되었다. 민간인 신분이었던 지라 원칙대로라면 교수형에 처해졌어야 하나 형집행인이 그대로 공터로 끌고가 총기로 형을 집행했다. 향년 53세.
유해는 반역자라는 이유로 고향으로 보내지지 않고 아직까지도 영강교도소 터에 자리한 공동묘지에 매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