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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른-게이만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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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 앞서
시작에 앞서



2024년 2월 10일 (토) 13:04 기준 최신판

  • 슈베른-게이만 민족







시작에 앞서

헤스페로스벨트의 기년법은 슈베로니아 제국 건국을 기준으로 하는 "건국기년"을 사용함. 헤스페로스벨트의 패권을 차지했던 국가들은 대부분 슈베로니아의 정신적 후손을 자처하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기년법이 관습적으로 뿌리박힌 것이 있음.

건국기년 시대 이전은 보통 "암흑기"로 통칭함. 황제교의 권위 탓도 있으나, 프론트 포커스 세계 자체가 건국기년 하의 역사도 매우 불분명한 부분이 많지만, 그 이전은 특히나 탐구지지 않은 분야로 점철되었기 때문.

해당 연표의 출저는 미상의 마그니우스인이 작성한 역사서에서 발췌되었다는 설정.


고전 고대시대

• -546년 : 슈베로니아 왕국 건국

암흑기 546년에, 현재 헤스페로스벨트 대륙 중서부 키르수스-에르미니아 일대에 슈베로니아 왕국이 건국되다.

초기에는 "슈마", "벨로"라 불리는 두 마을의 규모가 점차 커져 하나로 합쳐진, 지역 일대의 작은 도시국가 수준이었으며, 후일 농지 확보를 위해 외부 지역을 개척, 정벌해 판도를 확장하기 시작함. 암흑기 546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 문헌 "귄터 코덱스"(발굴자의 이름)에서 슈베로니아 왕국이 역사상에 최초로 등장함.


• -512년 ~ -509년 : 라이탈부르크 전쟁

당시에 "라이탈른"이라 불리던 지방을 당대 슈베로니아의 왕(기록 소실)이 평정하다.

해당 지역은 라이탈부르크라는 이름이 새로이 붙었으며, 슈베로니아의 대륙 동부를 향한 개척전쟁이 가시화된 첫 사례가 됨. 해당 지역을 본격적으로 관리하며, 슈베로니아 왕국은 도시국가에서 일개 지역을 통제중인 국가로서 발돋움함.


• -419년 ~ -413년 : 플라니아 전쟁

플라니아 지방이 슈베로니아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원정대에게 정복되다.

왕권 약화가 가시화되었으며, 이에 대한 견제로 귀족들에 대한 정치적 예속과 영지 분배 정책을 실시해 왕권 강화에 주력함. 근방의 왕국 중 가장 발전한 국가가 된 슈베로니아는 토착종교로 인해 제대로 복속되지 않는 플라니아를 개발하며 해당 토착종교의 권능신과 왕실을 동일시하는 새로운 종교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됨.


• -283년 ~ -152년 : 부르가 전쟁

당시 "부르가"라고 불리던 지방(현재 이름은 불명. 키르수스 중부 일대라 추정.)을 개척하던 와중, 공식적인 아인종들과의 첫 접촉이 기록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착 아인종 세력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포획된 아인종들은 노예 내지는 지적 사고가 가능한 가축으로서 슈베로니아 전역에 퍼져 노예산업의 한 축을 차지함. 부르가 전쟁 기간은 현재는 절멸된 것으로 추정된 위저드 종족에 대한 서술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였으며, 유난히 신화적인 서술이 집중되어있음. 암흑력 180년대에 이르면, 왕에 대한 신격화 시도가 점차 증가함.


• -91년 ~ -28년 : 동부 원정

슈베로니아 군주에 의해 노예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례없는 개척운동이 실시되다.

위저드 종족과의 격화된 분쟁이 눈에 띔. 악신으로 은유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토착부족과 슈베로니아 군대들 간의 대규모 전투들이 다수 시행되었으며, 원정 자체는 성공적으로 종료됨. 이러한 전과에 따라 쓰여진 영웅담은 후일 자연스레 구축되는 황제교(신념교) 신앙의 기반이 됨. 이 시기 주요 공헌자들의 이름은 일부가 황제교의 성인聖人으로 기록되어 건국력 1600년대에도 전해지는 것으로 추정됨.


• -39년 : 팔로렌스 제국 건국

현재의 키르수스 극동부~그란치프 일대에 토착 세력 도시국가들이 모종의 왕국에게 통합되어 "팔로렌스 제국"을 선포하다.

팔로렌스의 칭제 선언은 왕보다 더욱 높은 권력과 천부권을 주장함에 있어 슈베로니아에게 일련의 정치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동진 중이던 슈베로니아와 해당 경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팔로렌스 제국은 이 시점부터 양강체제를 구축함.


중세시대 전기

• 원년(1년) : 슈베로니아 제국 선포

팔로렌스 제국의 칭제 선포에 맞서 슈베로니아 제국이 칭제 선언을 하다.

플라니아 전쟁 이후의 민간신앙 관리 차원에서 도입된 왕실 숭배 사상이 부르가 전쟁과 동부 원정 기간을 거치며 실체를 가지게 됨. 칭제선포와 함께 황제교(신념교)가 공식적인 실체를 지니게 되었고, 그간 일부 국소지역에 국한되어 "신의 대리인" 내지는 "권능 대리자" 정도로 인식되던 슈베로니아 왕의 종교적 지위가 "신의 아들", 또는 "하늘의 자손"으로 격상됨. 와중 가장 신앙심이 굳건하던 플라니아 지방은 황제교 교단의 중심지가 됨. 동화나 정벌이 버거운 지방들은 제후국으로 임명해 간접통치를 시도함.


• 160년 ~ 173년 : 드레이크 황제의 남부 정벌

팔로렌스가 슈베로니아의 칭제 선언에 자극받아 대륙 남부를 석권하다.

건국과 칭제 이래로, 경쟁자 슈베로니아 왕국에게 위기감을 느껴 끊임없이 외부 팽창을 시도하던 팔로렌스는 동쪽의 생산량 낮은 고원지대, 슈베로니아 제국의 치하에 놓인 서방 대신 자원이 풍부한 남방 지역을 개척하기로 정책을 펾. 해당 지역은 위저드 세력이 군주로 지배중인, 아인종 노예산업을 기간으로 한 전제군주국가가 위치중이었고(부르가 전쟁 당시 슈베로니아 군대에게 밀려난 이들의 후예들로 추측.), 팔로렌스 제국은 슈베로니아를 본받아 위저드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 전쟁에서 아인종들을 포획해 노예로 부리려 시도하였으나 원할히 실시되지 못해 국가 정세가 매우 불안해짐. 원정 자체는 성공하여 팔로렌스의 영토가 확장됨.


• 173년 ~ 188년 : 슈베로니아-팔로렌스 대전

팽창을 견제한 슈베로니아 제국이 팔로렌스에게 전쟁을 선포하다.

서로 양극단을 달리던 차, 서로의 국경 중간에 위치해있던 한 도시국가의 제후국 결정을 두고 분쟁이 발생함. 해당 도시국가의 이름과 상세는 역사상에서 말소되었으며, 팔로렌스 제국은 15년에 달하는 전쟁 끝에 궤멸됨. 팔로렌스가 슈베로니아에 합병되며 팔로렌스인 또한 슈베로니아에 유입됨. 슈베로니아 정치계의 한 축으로 부상함. 팔로렌스인들은 슈베로니아와는 다른 정치적 입장과 문화를 고수하며, 그간 다수의 민족들을 동화시키던 슈베로니아에서 예외적인 사례로 기록됨.


• 285년 ~ 288년 : 제1차 갈고 전쟁

팔로렌스 제국의 유민들이 조직적 부흥운동을 시도하다.

팔로렌스 제국의 마지막 항전지는 대륙 남방 "갈고 지방"이었으며, 몇몇 실권자들이 슈베로니아의 발이 닿지 않는 대륙 남부까지 도주함. 팔로렌스인들의 부흥운동이 지역 토착민족들의 지원 하에 실시되었음. 슈베로니아에 갓 유입된 팔로렌스인들 또한 국지적인 소란을 벌이며 국가 안정도를 하락시킴. 팔로렌스인들이 주장한 "신성 팔로렌스 제국"은 3년을 버티다 갈고 지방의 한 섬에서(해당 기록에 상반되게도, 갈고 지방은 내륙지방임.) 몰락하였음.


• 253년 ~ 349년 : 제2차 갈고 전쟁

동화되지 않은 팔로렌스인들이 국지적 반란들을 일으키다.

제국에 유입된 팔로렌스인들은 슈베로니아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고, 제 1차 갈고 전쟁의 영향으로 슈베로니아 본국에 대한 저항심을 공공연히 표출하였음. 이에 몇몇 팔로렌스인들은 주로 슈베로니아 제국을 피해 도주한 지역 토착세력과 노예 산업의 중심축인 아인종들에게 접근함. 결과적으로 "팔로렌스 부흥 운동"은 슈베로니아 제국의 권역 밖에서 일어났으므로, 이내 들불처럼 번져나감. "제 2차 갈고 전쟁"은 이러한 팔로렌스 제국 부흥 세력에 대한 정벌이었음. 이 과정에서 슈베로니아는 대륙 동부 일대, 남부 지역을 개척하였음. 이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버틴 토착세력은 대륙 동부에서 자신들을 "에셀리아"라 자칭한 이들로, 토착주민들이 위저드 종족과 외모가 유사하다는 사유로 정책 차원에서 일상적인 멸시를 받았기에, 지역 주민들의 반감이 특히 거대했음. 이 시기동안 슈베로니아는 제대로 동화되지 못한 영토를 무리하게 증가시킴. 따라서 무역로, 노예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점차 쇠퇴함.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해짐.


• 398년 ~ 452년 : 운타란트 전쟁

위저드가 팔로렌스인들의 후예들에게 접근하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팔로렌스의 멸망이 250년을 넘어서며 팔로렌스인들의 정체성이 점차 희미해진 것으로 추측됨. 이러한 와중에 모종의 사유로 위저드들이 팔로렌스 유민들에게 접근하였으며, 이 시기의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어 관련 연구가 대다수 혼선을 빚고 있음. 결과적으로, 슈베로니아는 대륙 남부가 진원지로 추측되는 "재앙"을 극도로 간신히 수습한 것으로 사료됨. 이 시점에서 슈베로니아는 이민족의 침공에 무방비로 노출됨. 운타란트에서의 반란 이후 아인종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가 적대 수준으로 심화되어 민간 차원에서 아인종에 대한 학살, 영아살해, 사적제재 등이 슈베로니아 영토 전역에서 보고됨. 영주들과 당국은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음. 노예제 산업의 근간이 흔들리게 됨.


• 557년 ~ 582년 : 게이만족의 슈베로니아 침입

이민족이 슈베로니아를 침공하다.

대륙 동부(현재의 벤데르스키-페데르티프나 일대)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중인(키르수스 학계는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중이다.) 게이만 민족이 슈베로니아를 전면적으로 침범하다.

기록들이 대부분 소실된 운타란트 전쟁 이후 슈베로니아는 점차 변방 영토들을 상실해가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됨. 이 시점에서 모종의 존재에 의해 동방에서 쫒겨온 게이만 민족에 의해 침공당한 슈베로니아 제국은 주요 거점과의 통신이 점차 차단됨. 일부 슈베로니아에 동화될 것을 시도한 게이만인들은 슈베로니아 군문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으나, 점차 변방 영토들에서 중앙의 혼란을 눈치챈 지방 영주들과 귀족, 문명화된 게이만 인들이 분리독립을 시도하여 몰락이 가속화됨.


• 560년 : 게파르토 왕국 건국

게파르토 다카리바고 1세, 게파르토 황조를 개국하다.

슈베로니아 극동 변방의 영주였던 게파르토 가문은 중앙의 혼란을 틈탄 정치적 모함으로 인해 장치력을 상실한한 몰락귀족가이며, 현대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게파르토인들에게 "방랑왕"에 봉해진 다카리바고 1세는 당시 세금 징수원들을 피해 인망이 좋아 자신을 시중들던 빈민들과 빈농, 아인종들을 규합하여 당시 슈베로니아의 통치권이 닿지 않는 지역으로 도주하였음. 이는 현대 게파르토의 노르트란트 일대이며, 건국력 720년대까지 지속된 "제국개척운동" 과정에서 칭제를 선언해 슈베로니아 제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함. 슈베로니아 제국은 이 시점에서 기존 슈베른 고위층들과 문명화한 게이만 출신 부족민이 중심이 된 소왕국들로 갈갈이 쪼개져, 사실상 수도 주변 일대의 도시국가로 전락함.


• 560년 ~ 600년 : 바탈의 대이주

게파르토의 영향을 받아 대륙에서 핍박받던 아인종들이 대이주를 벌이다.

당시 노예로 부려지던 아인종에게 있어, 최근들어 슈베로니아, 또는 그 잔재들로부터 분리독립한 게파르토에선 아인종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낸 영토를 소유할 수 있다는 소문이 와전되어 대륙 중부에 퍼지게 됨. 이 시점에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상실한 노예제도는 효력을 완전히 잃어 사실상 지역 영주 개인의 역량으로 좌지우지중인 상황이었음. 때문에 사화 하층 구성원으로 자리잡아있던 아인종들은 학살과 멸시를 피해 대륙 동쪽으로 대이동을 벌임. 일부가 현재 "바탈루냐" 지역에 닿음.

• 569년 : 에세르 공국 건국

지역 토착민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다.

대륙 동부에서 "에셀리아"라 불리던 지방의 토착민들은 2차 갈고전쟁 이후 노예자원으로 쓰이며 민족 전체가 팔로렌스 제국의 부흥을 두려워한 슈베로니아 제정의 극단적인 견제를 받았음. 이후 슈베로니아 제국의 몰락이 가속화됨에 따라, 당시 에셀리아 지방을 지배하던 게이만계 귀족세력 또한 유명무실히 몰락에 가까워진 상황이 도래함. 아직까지 민족정체성을 유지중이던 에세르인들은 이에 반란을 일으켜 현대의 마가드 강 유역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해 공국을 구성하게 됨. 해당 지역에 정착을 시도했던 게이만계 민족들을 몰아세워 동화시키거나, 모조리 죽음에 처했음.

• 582년 : 슈베로니아 제국 멸망

1000년의 신화가 끝나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한 게이만계 소왕국의 공세 하에, 슈베로니아 제국 횡실의 혈육상 마지막 후손이 사망하게 됨. 슈베로니아 제국 황궁에 위치한 "영원의 문"이 파괴된 당시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한 돌격 당시 행방불명되었다 전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