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선
朝鮮
Joseon
대조선국
大朝鮮國

 

 

1394년 -
수도 평양부
최대 도시
면적 222,300 km²
조선왕검
1394년 ~ 1442년 영성 왕검
장안주작감문대원수
1394년 ~ 1425년 한옹
인문 환경
행정구역
행정
구역
14개의 주, 3개의 부
정치
경제
화폐 공식 화폐
코드와 단위
단위 법정연호 조선의 연호

독자 연호 사용

역사

고려 전쟁

1388년, 우왕에 의해 이성계가 축출되고 이성계의 가족들은 고려를 빠져나와 이성계를 받들던 여진족 부족에게로 도피함. 이후 그곳에서 형제 및 반대파를 제거하고 몇몇 여진족 부족을 규합한 이방원이 남하하여 개경을 점령함. 고려 왕실은 개경이 점령되기 전 남경으로 궁을 옮김. 왕실이 위협에 의해 개경에서 빠져나가면서 무정부상태가 이루어졌고, 이를 틈타 전국적인 농민 반란이 발생함. 농민 반란은 점차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쳤고, 나주·전주·상주·서경의 세력이 대표적임. 개경을 점령한 이방원 세력은 일부 여진족의 이탈과 고려 왕실과 서경 세력의 협공으로 다시 고려 밖으로 도망침. 고려 왕실이 개경에 다시 돌아왔을때에는 이미 농민 반란은 반란의 수준을 벗어났고, 전국은 군벌 세력들의 격돌이 이루어짐. 고려 왕실은 서경 세력과의 전투에서 위세를 잃고 남경으로 다시 궁을 옮겼고, 이때 남경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고려 왕실은 무너짐. 고려 왕실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한 서경 세력도 내분으로 의주·신서경·정주·해주로 세력이 분열됨. 신서경 세력은 의주와 정주를 흡수하였고 명에게 '조선'을 하사받음. 한반도 유일의 국가로 인정된 신서경은 조선을 선포하였고, 이에 남경은 '봉안'을 선포함. 경상도에서 위세를 펼치던 상주도 '조사'를 선포함. 조선은 춘주까지 남진했으나 남경과의 전투에서 패해 큰 피해를 입음. 하지만 재정비를 성공한 조선은 여진족으로부터 빼앗긴 동북면을 재점령하고 임주에게 투항받으면서 봉안과 싸울 준비를 마침. 양성 전투에서 대패한 봉안은 내분으로 붕괴되고 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중부를 통일함. 이후 3년 동안 조선은 남진하며 나주를 점령하고 조사를 멸망시키며 반도를 통일함.

사대교린

서경 세력이 무너지고 한옹의 신서경 세력이 평양을 차지하였을 때부터 조선은 명을 상대로 사대를 펼침. 꼬박꼬박 명에게 조공을 보냈으며, 이에 대한 답례로 조선은 고려 유일의 국가로 인정받음.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왜를 대상으로는 교린을 펼침. 여진족의 경우 1396년에 동북면의 탈환을 위해 공격한 경우가 있고, 나주 세력을 멸한 뒤부터는 조사와의 전쟁과 더불어 여진족 영역에 대한 원정을 펼침. 1408년까지 총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단주까지이던 국경을 두만강으로 전진시킴. 세 차례의 원정에서 동북면 재점령 당시 투항한 이방원이 혁혁한 공을 세워 왕검으로부터 공주 등 두만강 유역의 검사대치와 함께 두만공의 위를 받음. 남방의 일본, 왜구는 고려 말기의 침입과 고려 전쟁 당시 조사를 위기에 빠르린 적이 있기에 왜구의 은신처인 대마에 대한 정벌이 초기부터 계획됨. 왕검은 조사공(照沙公)을 필두로 해군을 육성하여 1418년, 왜구의 침입을 계기로 대마를 침공함. 정벌군은 대마에 상륙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주를 사로잡음. 왕검은 항복한 대마도주를 대마후(對馬侯)로 봉하고 황산주의 감시를 받게함. 동북 원정과 대마 정벌 이후 조선은 계속해서 이민족에 대한 군사적 압박과 문화적 유화를 반복함. 주기적으로 여진을 공격하고 조공을 강요함.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투사하고 황산주에서 교역을 허가함.

이도영의 난

1422년, 두만공 이방원이 사망한 이후 두만공과 화주공의 위를 이은 이도영은 여진족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서며 동북에서의 세력을 확대함. 대원수는 두만공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끼며 경계함. 한숙의 건의에 의해 단주목과 길주목의 관리들이 대거 교체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두만공과 긴밀한 사이였음. 이로 인해 두만공은 한숙에게 악감정을 품음. 두만공은 한옹의 곡산 한씨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지언정 속으로는 경멸했음. 1437년, 한권이 사망하고 한숙이 3대 대원수로 임명되어 전국의 협족이 평양으로 가 충성을 맹세할 때 두만공은 병을 핑계로 행차하지 않음. 이에 한숙은 이도영으로부터 두만공의 위와 검사대치를 박탈하였고, 두만공은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킴. 두만공은 여진족 영역의 세력을 바탕으로 대군을 몰고 평양으로 남진함. 하지만 대원수는 이를 예상하여 소집한 4위와 2군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함. 덕주에서 반란군은 대패하고 1년 간의 토벌로 두만강을 넘으려던 이도영이 생포됨. 이도영과 그의 3족이 처형되었으며, 이후 협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원수는 명계일치제를 실시하고 여진족과 접한 개마주와 동북주의 모든 검사대치가 몰수되어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어 관리하기 시작함. 이도영의 위이던 두만공과 정주공은 삭제됨.

왕검

횡성 고씨

장안주작감문대원수

곡산 한씨

  • 1대 : 한옹(韓雍) (1394 - 1425)
    • 1352 ~ 1425, 자 : 백희(百熙), 호 : 정포(靜浦), 예(銳)의 증손, 진(瑨)의 손자, 방좌(邦佐)의 아들
  • 2대 : 한권(韓卷) (1425 - 1437)
    • 1387 ~ 1437
  • 3대 : 한숙(韓淑) (1437 - 14--)
    • 1412 ~

중앙관제

군사 조직

  • 2군 : 중앙군
    • 감문총위군
    • 교각총통위군
  • 4위 : 지방군
    • 서경위
    • 봉안위
    • 조사위
    • 임주위

관계

  • 정1관 : 장안주작관문대원수, 명예직
  • 종1관 : 총서령, 사도감 판사
  • 정2관 : 좌·우서령,
  • 종2관
  • 정3관
  • 종3관
  • 정4관
  • 종4관
  • 정5관
  • 종5관
  • 정6관
  • 종6관
  • 정7관
  • 종7관
  • 정8관
  • 종8관
  • 정9관
  • 종9관

협족제

고려 전쟁 도중 조선에 귀화한 세력 지도자나 공을 세운 자들에게 세습 가능한 '검사대치(儉賜代治)'라 불리는 영지와 위를 하사함.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다섯 종류를 지님. 중앙에서 파견한 중앙 관리가 일정 주기로 각 검사대치를 시찰하며, 이도영의 난 이후 협족의 가족 중 후계자를 볼모로 하여 평양부에 두고 일정 주기로 협족 일가족 전원이 평양부로 올라오도록 한 명계휘치(明系輝治)제를 실시함. 공작, 후작, 백작만이 검사대치를 하사 받으며, 자작과 남작은 공을 세운 신하나 지방 협족에게 사하는 일종의 명예직. 협족들은 주에 위치한 목의 감시 하에 검사대치에서의 행정과 사법, 군무 등에 대해 권한을 지님.

행정 구역

ㅡ틀ㅡ

연습장:Enzo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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