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선
朝鮮
Joseon
대조선국
大朝鮮國

 

 

1394년 -
수도 평양부
최대 도시
면적 222,300 km²
조선왕검
1394년 ~ 1442년 영성 왕검
장안주작감문대원수
1394년 ~ 1425년 한옹
건국 1394년
이도영의 난 1437년
고회의 난 1454년
구주 전쟁 1461년
인문 환경
행정구역
행정
구역
14개의 주, 3개의 부
정치
경제
화폐 공식 화폐
코드와 단위
단위 법정연호 조선의 연호

독자 연호 사용

역사

고려 전쟁

1388년, 우왕에 의해 이성계가 축출되고 이성계의 가족들은 고려를 빠져나와 이성계를 받들던 여진족 부족에게로 도피함. 이후 그곳에서 형제 및 반대파를 제거하고 몇몇 여진족 부족을 규합한 이방원이 남하하여 개경을 점령함. 고려 왕실은 개경이 점령되기 전 남경으로 궁을 옮김. 왕실이 위협에 의해 개경에서 빠져나가면서 무정부상태가 이루어졌고, 이를 틈타 전국적인 농민 반란이 발생함. 농민 반란은 점차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쳤고, 나주·전주·상주·서경의 세력이 대표적임. 개경을 점령한 이방원 세력은 일부 여진족의 이탈과 고려 왕실과 서경 세력의 협공으로 다시 고려 밖으로 도망침. 고려 왕실이 개경에 다시 돌아왔을때에는 이미 농민 반란은 반란의 수준을 벗어났고, 전국은 군벌 세력들의 격돌이 이루어짐. 고려 왕실은 서경 세력과의 전투에서 위세를 잃고 남경으로 다시 궁을 옮겼고, 이때 남경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고려 왕실은 무너짐. 고려 왕실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한 서경 세력도 내분으로 의주·신서경·정주·해주로 세력이 분열됨. 신서경 세력은 의주와 정주를 흡수하였고 명에게 '조선'을 하사받음. 한반도 유일의 국가로 인정된 신서경은 조선을 선포하였고, 이에 남경은 '봉안'을 선포함. 경상도에서 위세를 펼치던 상주도 '조사'를 선포함. 조선은 춘주까지 남진했으나 남경과의 전투에서 패해 큰 피해를 입음. 하지만 재정비를 성공한 조선은 여진족으로부터 빼앗긴 동북면을 재점령하고 임주에게 투항받으면서 봉안과 싸울 준비를 마침. 양성 전투에서 대패한 봉안은 내분으로 붕괴되고 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중부를 통일함. 이후 3년 동안 조선은 남진하며 나주를 점령하고 조사를 멸망시키며 반도를 통일함.

성립

신서경 세력은 단순 봉기 세력이던 서경 세력과 달리 본격적인 국가 체계를 갖춤. 한옹은 혼란을 피해 평양으로 도망치기 전까지 문인이였음. 평양에서의 산전수전으로 무인의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 체제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 한옹은 명분의 부족과 개인적 이유로 횡성 고씨를 왕검으로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함. 그러고서는 자신을 따르는 유학자들과 새로운 국가 체계를 건설하기 시작함. 명목상일지라도 왕검을 최고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의 작위인 장안주작감문대원수에게 실권을 몰아줌.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하여 3성을 통합한 총서성을 세우고 그 아래에 6부를 둠. 대원수 아래로 왕검과 그 일가에 대한 일을 행하는 왕검도감과 군대를 통솔하는 감문도감, 협족과 관한 일을 처리하는 협족 도감, 공을 세운 신하에게 사할 것에 관한 조훈도감을 둠. 품계를 딴 관계로 관료의 계급을 매겼으며, 협족을 다섯으로 구분함. 통일 이후부터 수도인 평양의 개발이 이루어짐. 고대 고구려의 장안성을 재건하고 과거 고구려의 궁궐이 있었을 자리에 왕검의 안성궁과 대원수의 주작궁을 건설함. 행정 구역도 개편되어 전국을 12개의 주로 나누고 4개의 부와 22개의 목을 둠. 세 차례의 여진 정벌 이후 2개의 성과 4개의 목이 추가 설치됨. 군대는 일종의 근위대인 감문총위군과 평양의 교각총통위군 중앙군 2군과 서경위, 봉안위, 조사위, 임주위 지방군 4위로 구성됨. 4위는 각 지역 고을과 협족의 군대의 연합체로 서경위는 평양부를 제외한 경기주, 강동주, 개마주, 동북주를 담당하며, 봉안위는 봉안주, 관중주, 서해주, 옥저주를, 임주위는 백마주, 남해주, 탐라주를, 조사위는 조사주, 동해주, 황산주를 담당함.

사대교린

서경 세력이 무너지고 한옹의 신서경 세력이 평양을 차지하였을 때부터 조선은 명을 상대로 사대를 펼침. 꼬박꼬박 명에게 조공을 보냈으며, 이에 대한 답례로 조선은 고려 유일의 국가로 인정받음.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왜를 대상으로는 교린을 펼침. 여진족의 경우 1396년에 동북면의 탈환을 위해 공격한 경우가 있고, 나주 세력을 멸한 뒤부터는 조사와의 전쟁과 더불어 여진족 영역에 대한 원정을 펼침. 1408년까지 총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단주까지이던 국경을 두만강으로 전진시킴. 세 차례의 원정에서 동북면 재점령 당시 투항한 이방원이 혁혁한 공을 세워 왕검으로부터 공주 등 두만강 유역의 검사대치와 함께 두만공의 위를 받음. 남방의 일본, 왜구는 고려 말기의 침입과 고려 전쟁 당시 조사를 위기에 빠르린 적이 있기에 왜구의 은신처인 대마에 대한 정벌이 초기부터 계획됨. 왕검은 조사공(照沙公)을 필두로 해군을 육성하여 1418년, 왜구의 침입을 계기로 대마를 침공함. 정벌군은 대마에 상륙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주를 사로잡음. 왕검은 항복한 대마도주를 대마후(對馬侯)로 봉하고 황산주의 감시를 받게함. 동북 원정과 대마 정벌 이후 조선은 계속해서 이민족에 대한 군사적 압박과 문화적 유화를 반복함. 주기적으로 여진을 공격하고 조공을 강요함.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투사하고 황산주에서 교역을 허가함.

이도영의 난

1422년, 두만공 이방원이 사망한 이후 두만공과 화주공의 위를 이은 이도영은 여진족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서며 동북에서의 세력을 확대함. 대원수는 두만공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끼며 경계함. 한숙의 건의에 의해 단주목과 길주목의 관리들이 대거 교체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두만공과 긴밀한 사이였음. 이로 인해 두만공은 한숙에게 악감정을 품음. 두만공은 한옹의 곡산 한씨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지언정 속으로는 경멸했음. 1437년, 한권이 사망하고 한숙이 3대 대원수로 임명되어 전국의 협족이 평양으로 가 충성을 맹세할 때 두만공은 병을 핑계로 행차하지 않음. 이에 한숙은 이도영으로부터 두만공의 위와 검사대치를 박탈하였고, 두만공은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킴. 두만공은 여진족 영역의 세력을 바탕으로 대군을 몰고 평양으로 남진함. 하지만 대원수는 이를 예상하여 소집한 4위와 2군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함. 덕주에서 반란군은 대패하고 1년 간의 토벌로 두만강을 넘으려던 이도영이 생포됨. 이도영과 그의 3족이 처형되었으며, 이후 협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원수는 명계일치제를 실시하고 여진족과 접한 개마주와 동북주의 모든 검사대치가 몰수되어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어 관리하기 시작함. 이도영의 위이던 두만공과 정주공은 삭제됨.

고회의 난

호명 왕검의 주요한 아들로는 장남인 고수(안중 왕검)와 차남인 고회가 있었음. 고수는 대원수와 혈연 관계를 맺고 친대원수 성향을 띔. 반면 고회는 사실상 왕검보다 강한 권력을 지닌 대원수에 대해 불만을 지님. 고회의 생각은 당대에도 많은 위정자들 또한 생각하던 것이었음. 하지만 대원수 3대에 걸쳐 그런 의견을 입 밖으로 표출하는 이는 없었는데 고회는 이를 입밖으로 말함. 왕검의 적장자는 아닐지언정 적통인 고회의 존재는 대원수에 대한 불만 세력을 결집시키기에 충분했음. 불만 세력이 결집함이 눈에 보임에도 대원수는 왕검의 차남인 고회에게 손을 댈 수 없었음. 그러던 1447년, 고수와 고회는 대원수의 존재에 대해 논쟁을 벌임. 그러나 논쟁은 언쟁으로 바뀌고 결국 몸싸움으로 이어짐. 이를 기회로 본 대원수는 고수와 그 지지자들을 이용하여 고회와 그 지지자를 몰아 붙였고, 결국 1449년에 고휘는 출가함. 고회의 출가와 함께 그를 지지하는 세력 또한 궁에서 나가거나 세력을 잃음. 그렇게 대원수의 권력에 대한 위협은 사라진 듯 보였음. 1454년에 호명 왕검이 붕어함. 고수가 그의 후계로 연호를 안중으로 하여 즉위함. 그런데 얼마 안가 출가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고회가 스스로를 수의 왕검이라 칭하며 난을 일으킴. 출가한 5년 간 고회는 난을 일으킨 조사주 내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협족들을 포섭했었음. 반란군은 조사주와 황산주를 빠르게 장악하고 말머리를 평양으로 돌림. 4위 중 조사위가 궤멸되고 더해 수 만의 반란군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건이었음. 그러나 대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궁 내 반대파를 척살하고 전열을 정비한 후 직접 요격에 나섬. 대원수가 친정으로 평양을 비운 사이 대원수의 후계자인 한사가 평양을 대리 통치했음. 고회의 반란군은 또 다른 4위인 임주위를 격퇴하고 봉안에 까지 다다랐으나 수주에서 대원수의 2군과 봉안위-서경위의 반격에 패배하함. 수주 전투의 패배로 반란군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함. 평양에 잔류했던 고회파의 배신으로 고회는 붙잡혔고, 반역죄로 고회와 반란군은 처형됨. 고회에게 협조한 협족들도 대규모로 멸족 당함.

구주 전쟁

대원수는 고회의 난 당시 반란에 동조한 대마도주 종재성(宗材盛, 소기모리)를 처벌하고자함. 고회의 난 이후 고회에게 동조한 협족들은 모두 처벌되었으나, 대마는 지리적·정치적 한계로 아니됨. 대마도주는 당연히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대원수는 한사를 원수로 대마 정벌군을 조직함. 평양의 소식을 접한 대마도주는 동남 지역 포의 왜인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함. 동래왜란을 계기로 정벌군이 출정함. 대마는 일본의 번이었기에 당연히 막부와 갈등을 빗게됨. 1457년, 대마에 상륙한 정벌군은 빠르게 대마를 점령함. 그러나 목표인 대마도주는 대마를 벗어나 구주(큐슈)로 도피함. 정벌의 목적이 대마도주의 사살이었으므로 정벌군은 해협을 건너 구주에 상륙함. 이는 명백히 조선군이 일본의 영토에 발을 딛은 꼴이었음. 하지만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음. 결국 막부에 분노한 구주의 대명들이 직접 군대를 일으켜 조선군에 맞섬. 복강(후쿠오카)에서 조선 정벌군과 구주 연합군이 맞붙음. 그러나 한사의 전략에 체계적이지 못했던 연합군이 패배함. 복강 전투에서 축전국(지쿠젠국)의 대명이 생포되어 축전이 정벌군의 요충지가 됨. 이후 정벌군은 군을 두개로 나눠 구주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함. 대우전 전투에서 2군이 축후군(지쿠고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일이 있었으나 정벌군은 빠르게 구주 북동부를 점령함. 정벌군은 저항하는 거점들을 파괴하고 약탈함. 그제서야 막부는 정벌군에게 작전의 중지를 요청하고 연합군으로 하여금 대마도주를 넘길것을 요구함. 여러 전투에서의 패배로 많은 대명이 큰 피해를 입은 연합군은 막부의 요구를 승락하고 대마도주를 정벌군에게 넘김. 그러나 정벌군은 이에 더해 구주의 모든 대명들로 하여금 조선에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함. 이에 연합군은 분노하여 다시 결집함. 그러나 산도(야마토) 전투에서 연합군은 궤멸되고 결국 정벌군의 요구를 받아들임. 대마도주 종재성과 그 일가는 평양부로 압송되어 처형되었으며,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영무를 대마후로 봉함. 구주의 대명들은 평양부로부터 백의 위를 하사받고 조공을 받치게 됨. 조공의 주요 품목으로는 유황 등이 있었음.

왕검

횡성 고씨

장안주작감문대원수

곡산 한씨

  • 1대 : 한옹(韓雍) (1394 - 1425)
    • 1352 ~ 1425, 자 : 백희(百熙), 호 : 정포(靜浦), 예(銳)의 증손, 진(瑨)의 손자, 방좌(邦佐)의 아들
  • 2대 : 한권(韓卷) (1425 - 1437)
    • 1387 ~ 1437
  • 3대 : 한숙(韓淑) (1437 - 1460)
    • 1412 ~ 1460
  • 4대 : 한사 (韓社) (1460 ~ 14--)
    • 1433 ~ 14--

중앙관제

군사 조직

  • 2군 : 중앙군
    • 감문총위군
    • 교각총통위군
  • 4위 : 지방군
    • 서경위
    • 봉안위
    • 조사위
    • 임주위

관계

  • 정1관 : 장안주작관문대원수, 명예직
  • 종1관 : 총서령, 사도감 판사
  • 정2관 : 좌·우서령,
  • 종2관
  • 정3관
  • 종3관
  • 정4관
  • 종4관
  • 정5관
  • 종5관
  • 정6관
  • 종6관
  • 정7관
  • 종7관
  • 정8관
  • 종8관
  • 정9관
  • 종9관

협족제

고려 전쟁 도중 조선에 귀화한 세력 지도자나 공을 세운 자들에게 세습 가능한 '검사대치(儉賜代治)'라 불리는 영지와 위를 하사함.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다섯 종류를 지님. 중앙에서 파견한 중앙 관리가 일정 주기로 각 검사대치를 시찰하며, 이도영의 난 이후 협족의 가족 중 후계자를 볼모로 하여 평양부에 두고 일정 주기로 협족 일가족 전원이 평양부로 올라오도록 한 명계휘치(明系輝治)제를 실시함. 명계휘치제는 볼모의 목적도 있었으나, 이름과 같이 협족 후계자들을 교육하는데의 목적도 있었음. 어릴때부터의 교육으로 지방 협족들은 왕검과 대원수에게 충성함. 공작, 후작, 백작만이 검사대치를 하사 받으며, 자작과 남작은 공을 세운 신하나 지방 협족에게 사하는 일종의 명예직. 협족들은 주에 위치한 목의 감시 하에 검사대치에서의 행정과 사법, 군무 등에 대해 권한을 지님. 검사대치는 남에게 대여하거나 팔 수 없었음

행정 구역

ㅡ틀ㅡ

연습장:Enzo2015
연습장:Enzo2015/1  ·  연습장:Enzo2015/2  ·  연습장:Enzo2015/3  ·  연습장:Enzo2015/4 ·  연습장:Enzo20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