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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일본 (신공)|일본]]의 정치인, 군인. 제6대 조센 총독과 제26대 | [[일본 (신공)|일본]]의 정치인, 군인. 제6대 조센 총독과 제26대 내각총리대신, 육군대신 및 선무대신 직을 역임했다. | ||
특이하게 조센 총독, 총리대신, 육군대신, 선무대신 등 자신이 맡은 거의 모든 직책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 |||
== 생애 == | == 생애 == | ||
=== 육군대신 시절과 우가키 군축 === | |||
1927년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에 의해 육군대신으로 임명된 그는 21개 사단중 무려 4개 사단을 해체하고, 4개 사단에 돌아갔어야할 돈을 무기 현대화에 투자하는 [[우가키 군축]]을 감행하였다. 이 정책은 대체로 현실주의적인 정책이었다는 평을 받으나, 줄어든 사단만큼 장교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는 이유로 현대에 들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일본군의 현대화는 우가키 군축이 아닌 [[만주 사변]]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 |||
육군 내에서는 현실주의적이고 민주적이었던 군인이었으며 세계 대전의 교훈을 받아들여 현대화, 차량화, 화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우가키는 정신적인 무장과 정신 만능을 주장한 [[우에하라 유사쿠]], 그리고 후대의 [[황도파]] 등과 대립하였다. | |||
그의 인맥이었던 [[우가키 인맥]]은 후대 [[통제파]]로 이어져 계획경제, 친소, 반미반영을 대표하는 육군 내 파벌로 거듭났다. 그러나 우가키 군축은 당대 군인들에게 큰 불만을 샀던 정책이었으므로 와카쓰키 다음의 유력한 총리였던 그는 결국 총리의 꿈을 미룬체 조센 총독으로 부임할 수 밖에 없었다. | |||
=== 조센 총독 시절 === | === 조센 총독 시절 === | ||
{{인용문1|私が朝鮮に行けば一番先に農民たちにご飯を食べさせてくれる。<br>내가 조센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 {{인용문1|私が朝鮮に行けば一番先に農民たちにご飯を食べさせてくれる。<br>내가 조센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 ||
{{인용문1|宇垣総督が赴任した過去5年間、朝鮮の発展はかっこう盛大な成果を見せたといえます。 今は朝鮮半島の最も遠い場所でも、農民は加算とオニンの卵を知っています。 経済的困難は相変わらずですが、やはり速いペースで是正されていると思います。<br>우가키 총독이 부임한 지난 5년간 조선의 발전은 괄목성대할만한 성과를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조선 반도의 가장 외진 곳에서도 농민들은 덧뺄셈과 오닌의 난을 알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하나 역시 빠른 속도로 시정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다나카 에이로쿠]] 총독부 농무과장, 1934년 8월 10일의 편지에서}} | |||
우가키 총독은 "조센의 총독"을 자처하며 조센의 열악한 경제적인 현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조센은 대도시 지역에서 찬란한 근대화를 이룩하였으나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의 지적대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빈농들이 넘쳐나는 경제적 불평등의 땅이었다. 따라서 그는 조센의 공업화를 촉진하는 한편 농민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조센을 일본에 버금가는 부의 땅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 우가키 총독은 "조센의 총독"을 자처하며 조센의 열악한 경제적인 현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조센은 대도시 지역에서 찬란한 근대화를 이룩하였으나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의 지적대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빈농들이 넘쳐나는 경제적 불평등의 땅이었다. 따라서 그는 조센의 공업화를 촉진하는 한편 농민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조센을 일본에 버금가는 부의 땅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 ||
우가키 총독의 재임 기간 동안 농업진흥정책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 공업 정책이 추진되었으며 "봉공, 자조, 협동"의 슬로건 하애 농민들의 자력갱생을 강조하였다. 또한 농민들이 까막눈이여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총독부의 주도 하에 농민들에게 일본사, 일본어, 기초 | 우가키 총독의 재임 기간 동안 농업진흥정책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 공업 정책이 추진되었으며 "봉공, 자조, 협동"의 슬로건 하애 농민들의 자력갱생을 강조하였다. 또한 농민들이 까막눈이여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총독부의 주도 하에 농민들에게 일본사, 일본어, 농학, 기초 수학 등을 가르쳐 농민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센 반도 북부에 있는 [[세이신현]] 역시 그의 재임 기간 도중 본격적인 항구로 개발되어 경제적인 부를 누렸다. | ||
이러한 우가키 총독의 적극적인 농업, 공업 진흥 정책을 통하여 열악했던 조센의 경제적 사정은 크게 완화되었으며 조센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는 지역이 되었다. 당연히 극소수의 독립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조센인들은 우가키 | 이러한 우가키 총독의 적극적인 농업, 공업 진흥 정책을 통하여 열악했던 조센의 경제적 사정은 크게 완화되었으며 조센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는 지역이 되었다. 당연히 극소수의 독립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조센인들은 우가키 총독과 그의 근대화 정책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에 힘입어 우가키는 1937년까지 무려 8년간 총독직을 역임할 수 있게 되었다. | ||
=== 총리 시절 === | === 총리 시절 === | ||
1936년, 우가키 군축에 반대하는 [[황도파]] 일원이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우가키 역시 조센에서만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 본토로 복귀할 계획을 세운다. 마침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가 퇴임을 예정에 두고 있자, 우가키는 1937년 일본으로 돌아와 오카다 총리의 뒤를 이은 제26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다. | |||
=== 전후 행적 === | === 전후 행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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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두었다. | 이후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두었다. | ||
== 평가 == | |||
[[조센]]을 크게 발전시키고, [[중일전쟁 (신공)|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재상이었다. | |||
조센 내에서 우가키는 거의 신급의 대우를 받는다. 그의 정책으로 조센이 경제적으로 큰 부흥을 누리게 된데다가 결과적으로 조센인 민권 상승 역시 우가키가 주도하지 않았다면 수년 후로 미뤄졌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
육군 내에서는 몇 안되게 민주주의에 친화적인 군인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성향은 [[51년 체제]]를 통해 일본이 점진적으로 민주화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역시 의회민주주의자였다고 할 수 없으며 속내는 철저한 군국주의자였다는 반박도 존재한다. | |||
[[분류:신공/인물]] |
2022년 7월 21일 (목) 03:04 기준 최신판
Communist 1968, 2020 - 2022 | CC-0 |
파일:플로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심볼.svg 대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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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제26대 내각총리대신 우가키 가즈시게 宇垣一成 | Ugaki Kazushig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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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8년 8월 9일 |
비젠국 이와나시군 (現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 |
사망 | 1963년 8월 15일 (향년 95세) |
게이조부 게이조시 쇼마치구 | |
재임 기간 | 제6대 조센 총독 |
1929년 7월 10일 ~ 1937년 5월 1일 | |
제26대 내각총리대신 | |
1937년 6월 4일 ~ 1941년 10월 18일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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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의 정치인, 군인. 제6대 조센 총독과 제26대 내각총리대신, 육군대신 및 선무대신 직을 역임했다.
특이하게 조센 총독, 총리대신, 육군대신, 선무대신 등 자신이 맡은 거의 모든 직책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생애
육군대신 시절과 우가키 군축
1927년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에 의해 육군대신으로 임명된 그는 21개 사단중 무려 4개 사단을 해체하고, 4개 사단에 돌아갔어야할 돈을 무기 현대화에 투자하는 우가키 군축을 감행하였다. 이 정책은 대체로 현실주의적인 정책이었다는 평을 받으나, 줄어든 사단만큼 장교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는 이유로 현대에 들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일본군의 현대화는 우가키 군축이 아닌 만주 사변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육군 내에서는 현실주의적이고 민주적이었던 군인이었으며 세계 대전의 교훈을 받아들여 현대화, 차량화, 화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우가키는 정신적인 무장과 정신 만능을 주장한 우에하라 유사쿠, 그리고 후대의 황도파 등과 대립하였다.
그의 인맥이었던 우가키 인맥은 후대 통제파로 이어져 계획경제, 친소, 반미반영을 대표하는 육군 내 파벌로 거듭났다. 그러나 우가키 군축은 당대 군인들에게 큰 불만을 샀던 정책이었으므로 와카쓰키 다음의 유력한 총리였던 그는 결국 총리의 꿈을 미룬체 조센 총독으로 부임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센 총독 시절
내가 조센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우가키 총독이 부임한 지난 5년간 조선의 발전은 괄목성대할만한 성과를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조선 반도의 가장 외진 곳에서도 농민들은 덧뺄셈과 오닌의 난을 알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하나 역시 빠른 속도로 시정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나카 에이로쿠 총독부 농무과장, 1934년 8월 10일의 편지에서
우가키 총독은 "조센의 총독"을 자처하며 조센의 열악한 경제적인 현실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조센은 대도시 지역에서 찬란한 근대화를 이룩하였으나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의 지적대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빈농들이 넘쳐나는 경제적 불평등의 땅이었다. 따라서 그는 조센의 공업화를 촉진하는 한편 농민들의 처우를 개선하여 조센을 일본에 버금가는 부의 땅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우가키 총독의 재임 기간 동안 농업진흥정책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 공업 정책이 추진되었으며 "봉공, 자조, 협동"의 슬로건 하애 농민들의 자력갱생을 강조하였다. 또한 농민들이 까막눈이여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총독부의 주도 하에 농민들에게 일본사, 일본어, 농학, 기초 수학 등을 가르쳐 농민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센 반도 북부에 있는 세이신현 역시 그의 재임 기간 도중 본격적인 항구로 개발되어 경제적인 부를 누렸다.
이러한 우가키 총독의 적극적인 농업, 공업 진흥 정책을 통하여 열악했던 조센의 경제적 사정은 크게 완화되었으며 조센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는 지역이 되었다. 당연히 극소수의 독립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조센인들은 우가키 총독과 그의 근대화 정책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에 힘입어 우가키는 1937년까지 무려 8년간 총독직을 역임할 수 있게 되었다.
총리 시절
1936년, 우가키 군축에 반대하는 황도파 일원이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우가키 역시 조센에서만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 본토로 복귀할 계획을 세운다. 마침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가 퇴임을 예정에 두고 있자, 우가키는 1937년 일본으로 돌아와 오카다 총리의 뒤를 이은 제26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다.
전후 행적
현상에 조센인에게 참정 자치를 제한하는 것은 하늘이 일본에게 내린 명을 저버린 것이오. 반도 2천만 동포를 내전과 혼란, 기근과 쇠망의 길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도는 조센인 참정 외에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1951년 연초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보낸 서신 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교편으로 물러나있던 우가키는 1951년 중의원 화족 대표로 의원직을 얻게 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신설된 직위였던 선무성 대신직을 맡기 위함이었으므로 중앙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으면서 전쟁 물자 지원으로 피폐해진 조센의 경제를 복구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요시다 내각과 가타야마 내각 하에서 선무대신을 지낸 우가키는 존재 자체만으로 일본 정부의 원로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총독에 준하는 수준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조센과 일본이 동체라는 일선동조론을 내세움으로서 조센인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농민들을 위해 소작농들을 위한 각종 복지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전후 기근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대다수의 조센인들은 우가키 대신에게 막강한 지지를 보탰다. 또한 소작농 제도 자체가 조센의 경제적 불평등을 자초하고 있다는 우가키 대신의 강력한 요구 끝에 195~60년대에는 일본 전역에서 소작농 제도가 단계적으로 폐지되었다.
1953년, 가타야마 총리는 그의 군 경력을 문제삼아 가와카미 조타로로 그의 자리를 대신하였으나, 1958년 총선거에서 우가키가 지원한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직에 오르자 그 역시 선무대신직에 복귀해 1960년까지 근무했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점에서 그는 90세의 노인이었으며 건강상 무리가 갔기 때문에 얼마 안가 대신직을 사퇴했다. 많은 조센인들이 그의 대신직 사퇴를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두었다.
평가
조센을 크게 발전시키고,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재상이었다.
조센 내에서 우가키는 거의 신급의 대우를 받는다. 그의 정책으로 조센이 경제적으로 큰 부흥을 누리게 된데다가 결과적으로 조센인 민권 상승 역시 우가키가 주도하지 않았다면 수년 후로 미뤄졌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육군 내에서는 몇 안되게 민주주의에 친화적인 군인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성향은 51년 체제를 통해 일본이 점진적으로 민주화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역시 의회민주주의자였다고 할 수 없으며 속내는 철저한 군국주의자였다는 반박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