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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말의 거죽은 다르다는 말로 한 쪽이 다른 쪽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와 말의 거죽은 다르다는 말로 한 쪽이 다른 쪽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속금세절요]](續今世節要), '휼무거왕기'(鷸武炬王記)에서 유래되었다.
[[풍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 [[속금세절요]](續今世節要)<ref>[[신대]](神代)부터 [[비미천]]시대까지 취급한 역사서로 [[흠고천존]](欽高天尊)의 명으로 [[소가법사]](昭伽法師) 등이 편찬하였다.</ref> '휼무거왕기'(鷸武炬王記)에서 유래되었다.


<center>{{인용문3| (휼무거) 왕이 말했다. "독지(獨池)<ref> [[고산도]](高山道)에 위치했다고 전해지는 나라로 [[휼무거왕]] 시기 이전부터 비미천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휼무거왕 사후 즉위한 [[읍차려왕]](邑此麗王)이 489년에 병사를 이끌고 독지 추장, [[타사간우능]](打司干羽陵)을 사로잡은 뒤 멸망시켰다.</ref>를 정벌하는데 쓸 말이 부족하니 소를 쓰는것이 어떠한가." 이에 이좌지(伊佐支)<ref>비미천의 [[관등]] 중 하나. 비상설 최고 관직인 [[구조부리한말]](具朝富利旱末) 다음으로 높았으며 사실상 [[재상]]의 지위에 맞먹었다.</ref> 역솔발련(易率發練)이 간하길, "'''소와 말의 거죽은 달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은 달리고자 쓰이며, 소는 밭을 갈고자 쓰입니다. 소를 전쟁에 쓰려 한다면 백성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여겨 전쟁을 금하고 농사에 힘쓰라 명하였다. | 《속금세절요》 권 제6 휼무거왕기 中 }}</center>
<center>{{인용문3| (휼무거) 왕이 말했다. "독지(獨池)<ref> [[고산도]](高山道)에 위치했다고 전해지는 나라로 [[휼무거왕]] 시기 이전부터 비미천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휼무거왕 사후 즉위한 [[읍차려왕]](邑此麗王)이 489년에 병사를 이끌고 독지 추장, [[타사간우능]](打司干羽陵)을 사로잡은 뒤 멸망시켰다.</ref>를 정벌하는데 쓸 말이 부족하니 소를 쓰는것이 어떠한가." 이에 이좌지(伊佐支)<ref>비미천의 [[관등]] 중 하나. 비상설 최고 관직인 [[구조부리한말]](具朝富利旱末) 다음으로 높았으며 사실상 [[재상]]의 지위에 맞먹었다.</ref> 역솔발련(易率發練)이 간하길, "'''소와 말의 거죽은 달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은 달리고자 쓰이며, 소는 밭을 갈고자 쓰입니다. 소를 전쟁에 쓰려 한다면 백성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여겨 전쟁을 금하고 농사에 힘쓰라 명하였다. | 《속금세절요》 권 제6 휼무거왕기 中 }}</center>

2021년 8월 9일 (월) 19:18 판

고사성어
다를

개요

소와 말의 거죽은 다르다는 말로 한 쪽이 다른 쪽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 속금세절요(續今世節要)[1] '휼무거왕기'(鷸武炬王記)에서 유래되었다.

(휼무거) 왕이 말했다. "독지(獨池)[2]를 정벌하는데 쓸 말이 부족하니 소를 쓰는것이 어떠한가." 이에 이좌지(伊佐支)[3] 역솔발련(易率發練)이 간하길, "소와 말의 거죽은 달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은 달리고자 쓰이며, 소는 밭을 갈고자 쓰입니다. 소를 전쟁에 쓰려 한다면 백성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여겨 전쟁을 금하고 농사에 힘쓰라 명하였다.
《속금세절요》 권 제6 휼무거왕기 中

각주

  1. 신대(神代)부터 비미천시대까지 취급한 역사서로 흠고천존(欽高天尊)의 명으로 소가법사(昭伽法師) 등이 편찬하였다.
  2. 고산도(高山道)에 위치했다고 전해지는 나라로 휼무거왕 시기 이전부터 비미천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휼무거왕 사후 즉위한 읍차려왕(邑此麗王)이 489년에 병사를 이끌고 독지 추장, 타사간우능(打司干羽陵)을 사로잡은 뒤 멸망시켰다.
  3. 비미천의 관등 중 하나. 비상설 최고 관직인 구조부리한말(具朝富利旱末) 다음으로 높았으며 사실상 재상의 지위에 맞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