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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말의 거죽은 다르다는 말로 한 쪽이 다른 쪽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소와 말의 거죽은 다르다는 말로 한 쪽이 다른 쪽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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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0일 (화) 13:38 판
고사성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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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 | 馬 | 表 | 異 |
소 우 | 말 마 | 겉 표 | 다를 이 |
개요
소와 말의 거죽은 다르다는 말로 한 쪽이 다른 쪽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영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 속비미천기(續比湄泉記)[1] '도거왕기'(導炬王記)에서 유래되었다.
왕이 말했다. "독지(獨池)[2]를 정벌하는데 쓸 말이 부족하니 소를 쓰는것이 어떠한가." 이좌지(伊佐支)[3] 역솔발련(易率發練)이 간하길, "소와 말의 거죽은 달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은 달리고자 쓰이며, 소는 밭을 갈고자 쓰입니다. 소를 전쟁에 쓰려 한다면 백성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이 옳다 여겨 전쟁을 금하고 농사에 힘쓰라 명하였다. |
《속비미천기》 권 제6 도거왕기 中 |
각주
- ↑ 난세 시대부터 비미천까지 취급한 역사서로 흠고천존(欽高天尊)의 명에 따라 그의 아들, 소가대군(昭伽大君) 등이 690년부터 편찬을 시작, 712년에 완성했다.
- ↑ 영산도(寧山道) 남부에 위치했다고 알려진 부족 국가로 도거왕 시기 이전부터 비미천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도거왕 사후 즉위한 읍상왕(邑常王)이 489년에 대군을 동원해 독지 추장, 탁사간우능(卓司干羽陵)을 사로잡음에 따라 쇠퇴하였고 6세기 말에 이르러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 ↑ 비미천의 관등 중 하나. 비상설 최고 관직인 태재흔(太宰昕) 다음으로 높았으며 사실상 재상의 지위와 맞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