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24번째 줄: 24번째 줄:
|-
|-
| colspan="3" width="50%" style="font-size: 10.5pt; background: #fff; text-align: left; vertical-align:top;"  |
| colspan="3" width="50%" style="font-size: 10.5pt; background: #fff; text-align: left; vertical-align:top;"  |
* 팔국연군
[[파일:유니언 잭.png|25px]] 대영제국<br>[[파일:프랑스 제국.png|25px]] 프랑스 공화국<br>[[파일:러시아1914.png|25px]] 러시아 제국<br>[[파일:독일 제국.png|25px]] 독일 제국<br>[[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png|25px]] 미국<br>[[파일:Austro-hungrian flag.png|25px]]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br>[[파일:이탈리아 왕국.png|25px]] 이탈리아 왕국<br>[[파일:Flag of Japan.png|25px]] 일본 제국
[[파일:유니언 잭.png|25px]] 대영제국<br>[[파일:프랑스 제국.png|25px]] 프랑스 공화국<br>[[파일:러시아1914.png|25px]] 러시아 제국<br>[[파일:독일 제국.png|25px]] 독일 제국<br>[[파일:Flag of the United States.png|25px]] 미국<br>[[파일:Austro-hungrian flag.png|25px]]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br>[[파일:이탈리아 왕국.png|25px]] 이탈리아 왕국<br>[[파일:Flag of Japan.png|25px]] 일본 제국
|-
|-

2021년 8월 8일 (일) 11:13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의화단 운동
義和團運動
Yihetuan Movement | Boxer Rebellion

날짜
1899년 12월 19일 ~ 1901년 9월 7일
장소
청나라 화북지방 일대
원인
의화단의 폭동 및 서양인 학살
교전 세력
청나라 조정 (서태후파)
의화단
대한국
황제 및 동남자보
  • 팔국연군

대영제국
프랑스 공화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지휘관
부준
서태후
육현
유록
동복상
섭사성
송경
마옥곤
단군왕
마복흥
마복상
이병형
양종
윤경
허병오
김제순
양일훈
어연창
조경세
광서제
이홍장
원세개
영록
허응종
장지동
유곤일
에드워드 시모어 경
클로드 맥도널드
알프레드 가젤리
로베르 니벨
알프레트 폰 발더제
애드너 채피
후쿠시마 야스마사
병력
30만명 한국군 23,800명
연합군 41,000여명
피해규모
청 관군 2만여명
의화단원 다수
한국군 사상자 120여명
연합군 사상자 수백여명
결과
한국군과 연합군의 승리, 신축조약 체결
영향
광서제 복위

개요

의화단 운동은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반외세, 반기독교 기치를 내건 의화단과 이들을 등에 업은 서태후의 청나라 조정이 황제복위를 외치는 한국군은 물론 이권 침해에 반발한 8개국 연합군과 벌인 전쟁이다. 명분과 실력 두가지에서 모두 패배한 서태후 조정은 한국군과 연합군에게 수도인 베이징까지 유린당했다. 이후 청나라는 신축조약을 체결하였고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게된다.

한국군의 참전

사실 이 전쟁에서 한국은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팔국연군에 소속된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는 팔국연군을 배척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의화단 진압 내내 그들과 충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같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이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취한 이유는 팔국연군에 속한 국가들과 한국의 목적이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상이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광서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에 참전 명분은 황제를 몰아낸 반역자를 처치하고 황제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국연군은 각 국가가 의화단의 폭동과 학살로 인해 이권상 피해를 보자 이를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마디로 한국과 팔국연군은 참전한 이유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실제로 신축조약에서 한국측의 요구로 삽입된 내용은 ‘대청국의 온존’과 ‘황제의 친정체제 인정’ 뿐이었다. 물론 의화단 사건때 화북지방 일부와 내몽골은 모조리 한국 영토가 되었지만 한국은 팔국연군처럼 최대한 자신들에게 조약을 유리하게 짜맞추려는 이권다툼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