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간기 ~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한혁성님이 전간기 조선 문서를 조선의 민주화 과정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2번째 줄:


대한조선국 건국
대한조선국 건국
1917년 12월 5일, 대한제국은 기타큐슈 조약을 체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한다. 이후 1919년 3.1 혁명으로 국민과 열강은 대한국 국제의 개정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상룡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의를 통해(3.10 중추원 회의) 조선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기초한 대한조선국 헌법이 작성되었고, 그 후 추밀원의 심의를 통해 순종의 재가를 승낙받은 왕실은 1923년 7월 17일 헌법을 공표하며 대한조선국을 건국한다.


1917년 12월 5일, 대한제국은 경성 조약을 체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한다. 이후 1919년 3.1 혁명으로 국민과 열강은 대한국 국제의 개정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상룡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의를 통해 조선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기초한 대한조선국 헌법이 작성되었고, 그 후 추밀원의 심의를 통해 순종의 재가를 승낙받은 왕실은 1923년 7월 17일 헌법을 공표하며 대한조선국을 건국한다.
을축개혁과 윤강 데모크라시
 
대한조선국 초대 수상 김섭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축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며 중추원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전후 경제 복구와 대공황의 극복을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잔존한 신분제의 영향을 청산했다. 이를 토대로 조선 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풍조를 장조의 연호를 따 윤강 데모크라시라 부른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무너뜨린 외세와 길을 같이 한다는 것은 많은 반대의 목소리를 낳았다.
융희 데모크라시
 
대한조선국 초대 수상 김섭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잔존한 신분제의 영향을 제거하고, 전후 경제 복구와 대공황의 극복을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며 의회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했다. 이를 토대로 조선 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풍조를 순종의 연호를 따 융희 데모크라시라 부른다.


조선 군국주의
조선 군국주의
 
1936년 김섭 암살의 혼란을 틈타 한성 진군을 통해 집권한 박정범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시켰지만, 중추원과 권력의 균형을 이루던 익문사를 장악하고 준군사조직인 '신화랑'을 창설해 밑에 두었다. 또한 때마침 일어난 중일전쟁을 틈타 동아시아 정국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만주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1937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점령한 만주의 영토에서 만주계 한국인을 탄압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1936년 김섭 암살의 혼란을 틈타 한성 진군을 통해 집권한 박두정은 1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거의 복구했지만, 군비증강과 때마침 일어난 중일전쟁을 틈타 동아시아 정국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만주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중국과 외교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의 행보
제2차 세계대전에의 행보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대한조선국은 일본 제국에게 중국 분할안을 제안하며 한-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중국에서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본의 협력 요청을 묵살하며 중립을 유지했다. 대한 해협과 동해에서 대규모 해군 훈련을 개시하며 일본의 팽창 야욕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1942년 5월 13일 일본이 4.20 복강 사태를 빌미로 제주도를 무력 점령 및 포격했을 땐 독일, 일본에 선전 포고하고 미국과 민주화 협정을 체결, 연합국에 가입했다. 전후 연합국의 민주화 요구 및 국내의 반발로 박두정은 1948년에 자유 민주 선거를 시행하고 조선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정당인 이승만의 민주조선당이 집권한다. 이후 제1세계에 속하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고 추축국에 본격적으로 합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42년 5월 13일 일본은 4.20 복강 사태를 빌미로 제주도와 남해안을 포격했고, 이에 조선은 일본과 독일에 선전 포고하며 미국과 민주화 협정을 체결했다(5.16 조약). 연합국에 가입 후 승전국이 된 조선은 미국과 영국의 민주화 요구 및 국내의 반발로 1948년에 자유 민주 선거를 시행했다. 그 후 조선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정당인 이석만의 민주조선당이 집권한다. 이후 제1세계에 속하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분류:%EB%8C%80%ED%95%9C%EC%A0%9C%EA%B5%AD(%ED%91%B8%EB%A5%B8_%EC%98%A4%EC%96%8F%EA%BD%83)]]
[[분류:%EB%8C%80%ED%95%9C%EC%A0%9C%EA%B5%AD(%ED%91%B8%EB%A5%B8_%EC%98%A4%EC%96%8F%EA%BD%83)]]

2020년 6월 15일 (월) 00:01 판

이 문서는 현재 공사 중입니다.

이 문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본문에 다소 난잡하거나 생략된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대한조선국 건국 1917년 12월 5일, 대한제국은 기타큐슈 조약을 체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한다. 이후 1919년 3.1 혁명으로 국민과 열강은 대한국 국제의 개정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상룡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의를 통해(3.10 중추원 회의) 조선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기초한 대한조선국 헌법이 작성되었고, 그 후 추밀원의 심의를 통해 순종의 재가를 승낙받은 왕실은 1923년 7월 17일 헌법을 공표하며 대한조선국을 건국한다.

을축개혁과 윤강 데모크라시 대한조선국 초대 수상 김섭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축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며 중추원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전후 경제 복구와 대공황의 극복을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잔존한 신분제의 영향을 청산했다. 이를 토대로 조선 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풍조를 장조의 연호를 따 윤강 데모크라시라 부른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무너뜨린 외세와 길을 같이 한다는 것은 많은 반대의 목소리를 낳았다.

조선 군국주의 1936년 김섭 암살의 혼란을 틈타 한성 진군을 통해 집권한 박정범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시켰지만, 중추원과 권력의 균형을 이루던 익문사를 장악하고 준군사조직인 '신화랑'을 창설해 밑에 두었다. 또한 때마침 일어난 중일전쟁을 틈타 동아시아 정국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만주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1937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점령한 만주의 영토에서 만주계 한국인을 탄압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에의 행보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대한조선국은 일본 제국에게 중국 분할안을 제안하며 한-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고 추축국에 본격적으로 합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42년 5월 13일 일본은 4.20 복강 사태를 빌미로 제주도와 남해안을 포격했고, 이에 조선은 일본과 독일에 선전 포고하며 미국과 민주화 협정을 체결했다(5.16 조약). 연합국에 가입 후 승전국이 된 조선은 미국과 영국의 민주화 요구 및 국내의 반발로 1948년에 자유 민주 선거를 시행했다. 그 후 조선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정당인 이석만의 민주조선당이 집권한다. 이후 제1세계에 속하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