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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색|#337AB7|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글씨 색|#337AB7|김근태}}를 지지했으며, 이후 {{글씨 색|#337AB7|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글씨 색|#337AB7|2003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글씨 색|#337AB7|김근태}}와 {{글씨 색|#337AB7|천정배}}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비례대표 17번에 공천되었으며 무난하게 국회에 입성하였다. {{글씨 색|#337AB7|한나라당}} 저격수로 활동하면서 {{글씨 색|#337AB7|박근혜}}의 {{글씨 색|#337AB7|육영재단}} 비리 의혹을 들고 나오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을 '강남 부풀리기', 이광재 의원을 '삼성의 하수인'으로 비판하여 소장개혁파로 분류되었다. 열린우리당 집단탈당시 천정배를 따라 탈당할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의외로 {{글씨 색|#337AB7|열린우리당}}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열린우리당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이유는 노무현 흔들기가 좀 배신자 정치같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씨 색|#337AB7|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글씨 색|#337AB7|김근태}}를 지지했으며, 이후 {{글씨 색|#337AB7|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글씨 색|#337AB7|2003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글씨 색|#337AB7|김근태}}와 {{글씨 색|#337AB7|천정배}}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비례대표 17번에 공천되었으며 무난하게 국회에 입성하였다. {{글씨 색|#337AB7|한나라당}} 저격수로 활동하면서 {{글씨 색|#337AB7|박근혜}}의 {{글씨 색|#337AB7|육영재단}} 비리 의혹을 들고 나오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을 '강남 부풀리기', 이광재 의원을 '삼성의 하수인'으로 비판하여 소장개혁파로 분류되었다. 열린우리당 집단탈당시 천정배를 따라 탈당할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의외로 {{글씨 색|#337AB7|열린우리당}}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열린우리당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이유는 노무현 흔들기가 좀 배신자 정치같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씨 색|#337AB7|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아 {{글씨 색|#337AB7|정동영}} 후보의 당선을 도왔지만, 대선이 끝난 이후 {{글씨 색|#337AB7|손학규}} 체제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글씨 색|#337AB7|천정배}}, {{글씨 색|#337AB7|김근태}} 의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였다. 탈당후 자신의 고향인 평택시 갑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10% 남짓을 얻으며 {{글씨 색|#337AB7|한나라당}} {{글씨 색|#337AB7|원유철}}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글씨 색|#337AB7|국민참여당}}을 창당하며 {{글씨 색|#337AB7|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출마하였고, {{글씨 색|#337AB7|한명숙}} 후보와 단일화 한 이후 예비후보직을 사퇴하였다. 2011년 급서한 {{글씨 색|#337AB7|김근태}} 의장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글씨 색|#337AB7|김근태 재단}}의 재단장을 맡았다.
{{글씨 색|#337AB7|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서는 {{글씨 색|#337AB7|손학규}} 예비후보를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며 천정배 예비후보를 지지했다. {{글씨 색|#337AB7|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아 {{글씨 색|#337AB7|정동영}} 후보의 당선을 도왔지만, 대선이 끝난 이후 {{글씨 색|#337AB7|손학규}} 체제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글씨 색|#337AB7|천정배}}, {{글씨 색|#337AB7|김근태}} 의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였다. 탈당후 자신의 고향인 평택시 갑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10% 남짓을 얻으며 {{글씨 색|#337AB7|한나라당}} {{글씨 색|#337AB7|원유철}}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글씨 색|#337AB7|국민참여당}}을 창당하며 {{글씨 색|#337AB7|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출마하였고, {{글씨 색|#337AB7|한명숙}} 후보와 단일화 한 이후 예비후보직을 사퇴하였다. 2011년 급서한 {{글씨 색|#337AB7|김근태}} 의장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글씨 색|#337AB7|김근태 재단}}의 재단장을 맡았다.
 
{{글씨 색|#337AB7|통합진보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글씨 색|#337AB7|유시민}}과 별로 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글씨 색|#337AB7|유시민}}을 따라가는 정치 행보가 잠시 주목이 되기도 하였다. 참여계로 분류되었지만 진보신당 탈당파와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보였다. {{글씨 색|#337AB7|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전에 도전했던 평택시 갑에 출마해, 민주통합당 예비후보를 꺾고 단일화 경선에 출마했다. 비록 43.1%를 얻으며 {{글씨 색|#337AB7|새누리당}} {{글씨 색|#337AB7|원유철}} 후보에 밀려 낙선했지만, 야권 험지에서 진보정당 소속으로 선전하여 후보 개인의 경쟁력을 보였다.


== 미성동계 ==
== 미성동계 ==

2020년 7월 2일 (목) 01:35 판

대한민국 국회의원 (관악구 을)
19대
이상규
19~21대
정윤일
현직
제17, 19~21대 국회의원
정윤일
慶尹鎰 | Chung Yoonil
출생
1966년 1월 2일(1966-01-02) (58세)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1]
거주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미성동
본관
경주 정씨 양경공파 75세손
학력
신한중학교 (졸업)
평택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가족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김한숙, 슬하 3남
신체
164cm, 52kg
종교
불교 (법명 : 선도 善途)
소속 정당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7, 19, 20, 21
지역구
관악구 을
소속위원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현직
제21대 국회의원
국민혁신당 관악구 을 위원장
국민혁신당 상임대표
약력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민변 국제부위원장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
국민참여당 사무총장
통합진보당 최고위원
국민혁신당 창당준비위원회장
국민혁신당 원내대표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법조인.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인권변호사로 일하다가, 열린우리당 비례 17번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 국민참여당 사무총장, 통합진보당 최고위원을 맡다가 2018년 국민혁신당을 창당해 상임대표로 재직중이다.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분류되며, 민평련계에 속한다.

일생

1966년 평택군 송탄읍(現 평택시 지산동)에서 태어났다. 신한중학교와 평택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갔다. 운동권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아는 선배와 면식이 있던 김근태에게 소개받아 1990년대 김근태와 몇번 만나본적은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대학을 졸업하였고 김앤장 법률 사무소에서 잠깐 일하다가 대학선배였던 천정배와 함께 인권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민변 국제부위원장을 맡았다.

정치 경력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근태를 지지했으며, 이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2003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근태천정배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비례대표 17번에 공천되었으며 무난하게 국회에 입성하였다. 한나라당 저격수로 활동하면서 박근혜육영재단 비리 의혹을 들고 나오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을 '강남 부풀리기', 이광재 의원을 '삼성의 하수인'으로 비판하여 소장개혁파로 분류되었다. 열린우리당 집단탈당시 천정배를 따라 탈당할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의외로 열린우리당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열린우리당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이유는 노무현 흔들기가 좀 배신자 정치같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서는 손학규 예비후보를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며 천정배 예비후보를 지지했다. 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아 정동영 후보의 당선을 도왔지만, 대선이 끝난 이후 손학규 체제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천정배, 김근태 의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였다. 탈당후 자신의 고향인 평택시 갑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10% 남짓을 얻으며 한나라당 원유철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국민참여당을 창당하며 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출마하였고,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 한 이후 예비후보직을 사퇴하였다. 2011년 급서한 김근태 의장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김근태 재단의 재단장을 맡았다.

통합진보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유시민과 별로 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을 따라가는 정치 행보가 잠시 주목이 되기도 하였다. 참여계로 분류되었지만 진보신당 탈당파와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보였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전에 도전했던 평택시 갑에 출마해, 민주통합당 예비후보를 꺾고 단일화 경선에 출마했다. 비록 43.1%를 얻으며 새누리당 원유철 후보에 밀려 낙선했지만, 야권 험지에서 진보정당 소속으로 선전하여 후보 개인의 경쟁력을 보였다.

미성동계

논란

역대 선거 결과

연도 선거 지역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락 비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열린우리당
8,145,814
38.3%
당선 (17번)
초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평택시 갑
무소속
10,032
10.5%
낙선 (3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관악구 을
통합진보당
40,021
43.1%
낙선 (2위)
2015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
관악구 을
무소속
32,824
40.1%
당선 (1위)
재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관악구 을
무소속
45,832
36.1%
당선 (1위)
3선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관악구 을
국민혁신당
63,321
49.9%
당선 (1위)
4선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새천년민주당
2003년
정계 입문
열린우리당
2003년 - 2007년
창당
대통합민주신당
2007년 -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
무소속
2008년 - 2009년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
국민참여당
2009년 - 2011년
창당
통합진보당
2011년 - 2013년
합당
무소속
2013년 - 2018년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
2018년 -
창당

여담

둘러보기

각주

  1. 現 경기도 평택시 지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