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중추원의원 선거

갈라드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29일 (수) 15:23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파일:투표.png 대한국의 주요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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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대한국 중추원 의원 총선거
1885년 4월 10일
초대 선거
1891년 3월 7일
2회 선거
투표지역 한성부, 기호지방
선거 결과
[[]]
정당 의석수 비율
입헌당 27석 30.0%
황국협회 20석 22.2%
정우회 13석 14.5%
관료의원 30석 33.3%

개요

대한국 중추원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첫 선거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거이자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이다.

중추원을 선거로 구성하려는 김홍집 초대 총리의 구상이 처음으로 실현된 선거였으나 당시 보수파의 반발과 기술적 한계로 인해 한성부와 그 주위 지방에 거주하는 귀족 남성만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

배경

중추원 자체는 1870년에 설립되었지만 당시에는 문관과 무관등 관료로 구성된 협의체 기구에 불과했다. 문조 황제가 내각구성권까지 넘겨주면서 관료들끼리 추천, 투표를 통해 각부의 대신을 선출할 권한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관료들만의 기구였다. 중추원 설립 직후 황제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김홍집 총리는 헌법 제정에 착수했지만 보수파들의 만류로 인해 황제가 김홍집에게 헌법 제정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라고 명하면서 미뤄지고 말았다. 하지만 김홍집은 헌법 제정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자신의 집에서 뜻이 맞는 관료들을 모아 헌법 조문을 조율하는 활동을 했다. 물론 이것은 황제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김홍집의 저택 한켠의 이름이 삼화당(三和堂)이었으므로, 이들을 대외에서는 삼화당파라고 칭했다. 이 삼화당파는 훗날 입헌당의 주류 세력이 되며, 현대 국민당의 조상격 당파이다. 김홍집과 삼화당파는 70년대 내내 보수파와 싸우며 정치경제적 개혁을 단행했다. 공장을 세우고 무역을 확대하면서 근대적 경제구조로 탈바꿈시키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