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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나라이름 = 중화민국 (우리들의 제국) | 국기그림 = 중화민국국기.png | 국기그림-1912 = Flag of China (1912–1928).png | 국기그림-1937 = Flag of Reformed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China.svg | 국기그림-육군 = Flag of the Republic of China Army.svg | 국기그림-해군 = Flag of the Republic of China.svg | 국기그림-공군 = Flag of the Republic of China Air Force.svg | 국기그림-전략로켓군 = 중화민국 전략로켓군기.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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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수1 = 1912 | 변수2 = 1937 | 변수3 = 육군 | 변수4 = 해군 | 변수5 = 공군 | 변수6 = 전략로켓군 | 넘겨주기1 = | 관련문서1 = | 관련문서2 = | 관련문서3 = | 관련문서4 = }} 중화민국(표준중국어:中华民国, 홍콩식 표기:中華民國, 영어:Republic of China, ROC)는 중국 대륙에 위치한 실질적인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다. 인도 공화국의 아루나찰프라데시주(창랑, 티랍 지역 제외), 미얀마 북부, 타지키스탄 동부와 파키스탄 일부등 파미르 고원 전역, 몽골 공화국 영토 전역을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다만 몽골공화국 정부 자체는 인정하고 있어 1994년부터 수교하고 있다.

14억을 넘어 15억으로 향해가는 세계 1위의 인구수, 수많은 자원과 드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현재 세계에서 유력한 강대국으로 꼽히고 있다.

국호

1912년 쑨원이 중화민국을 건국하면서 만들어졌다. 중화(中華)는 전 중국, 중국 문화권을 뜻하고 민국(民國)은 공화국을 뜻한다.

지리

역사

신해혁명과 건국

북양정부 시절

쑨원의 북벌

중일전쟁

국공양당체제의 확립과 쑨원의 사망

1945년 8월 30일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중화민국도 승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쑨원은 소련군이 한반도와 혼슈섬 중부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화민국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는 것을 우려해 미국과 함께 소련에게 일본 열도의 한시적인 분할통치를 제안했다. 이는 소련군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어느정도 제약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쑨원을 어느정도 신뢰하고 있었던 스탈린과 미국 모두의 찬성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분할통치가 시작되었다.
한편 쑨원은 중국 내에서 일본군 패잔병 문제와 전후처리가 마무리 되는 대로 국민대회와 입법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표, 신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에게 당부했다.
1947년 5월 17일, 국민대회 선거가 이루어졌다. 국민당이 630석중 424석을 차지하며 제1당이 되었고 저우언라이, 마오쩌둥등 유력 공산당 정치인들도 국민당 당적으로 의원이 되었다. 5월 23일, 쑨원이 594표를 득표하며 중화민국 총통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쑨원은 새로 구성된 입법원의 동의를 얻어 저우언라이를 행정원장에 임명했다. 당초 행정원장에는 왕징웨이 또는 장제스가 유력하였으나 본인들이 고사했다.
1948년에 들어서며 쑨원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국민당 내 우파 세력은 공산당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만류로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커지고 있는 공산당의 영향력은 그 둘도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어찌되었든 철저한 국공합작을 주장한 ‘국부’ 쑨원이 존재하는 한 공산당든 국민당이든 서로를 몰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중일전쟁이 일단락되고 쑨원의 죽음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국공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1948년 공산당 당대회에서 저우언라이가 총서기에 추대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행정원장으로서 국공간의 갈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국공간의 내분이 벌어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천두슈등 원로 공산당 인사와 장궈타오, 취추바이, 리리싼과 국민당 측의 우파, 중도파 인사들을 모아 총통, 부총통직과 행정원장, 부행정원장직은각각 다른 정파에서만 맡고 내각에서도 다양한 정파의 인물을 임명하기로 합의했고 대다수의 공산당 인사와 국민당 인사들은 이에 동의했으나 일부 국민당 우파 세력은 여전히 공산당 세력과의 타협을 원치 않았다.
1949년 2월 17일, 쑨원이 눈을 감았다. 마지막 까지도 그의 유훈은 ‘국공합작을 통한 중화 인민의 평안, 반분열’이었다. 차기 총통에는 부총통이었던 탄옌카이가, 부총통에는 천두슈가 선출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행정원장직을 유지했고 부행정원장에는 탕성즈가 선출되었다. 권력기반을 잃지는 않았지만 어떠한 공직도 맡지못한 장제스는 미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장제스의 철권통치와 공산당 숙청

베이핑 혁명과 중국의 민주화

1976년 7월 16일, 중화민국을 23년동안 통치한 장제스가 죽었다. 장제스의 국장이 끝난 후인 8월 1일, 국민대회 의석의 8할을 차지하고 있던 국민당은 차기 총통으로 옌자간을 선출했고 이에 반대하는 군발적인 소규모 시위가 난징, 베이핑, 상하이 일부 대학가에서 일어났으나 금방 해산되었다.
1976년 8월 3일, 마오쩌둥도 베이핑에서 사망했다. 이에 8월 5일 마오쩌둥의 장례식에서 일부 사회주의 성향 대학생들이 국민정부의 타도와 총통 직선제, 다당제 실시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고 베이핑 공안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3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50명의 학생들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중국 전역에서 사망한 학생들을 추모하고 국민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쑨원과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에 나섰으며 ‘삼민주의, 총통직선, 반장반옌(죽은 장제스와 현 총통 옌자간을 반대한다는 뜻)’을 외쳤다.
8월 17일, 베이핑 국립대학 학생 4천500여명은 천안문 광장 쑨원 동상 앞에 모여 쑨원의 삼민주의 국가, 정의로운 중화민국이 위협받아 왔다는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쑨원의 초상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베이핑 공안국은 시위대를 향해 세차례 해산하라고 경고한 뒤 최루탄을 발포했다. 시위대측은 이 시위에서 4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8월 23일, 총통부는 베이핑 지역에 3개월간 한시적인 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국영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서 중화민국을 전복하려는 사회주의 세력이 베이핑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고 보도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그 시점에서 거의 없었다.
8월 27일, 리처드 닉슨 미국 총통과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총통등 서방국가 수반은 중국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려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특히 미국은 모든 경제원조, 협력 중단을 포함하는 총통 성명을, 의회에서는 중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계속되는 대내외적 압박에 국민대회는 9월 19일, 계엄을 철회하는 안을 통과시키고 옌자간을 탄핵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국민당이 옌자간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다며 국민대회의원 재선거와 총통 직선제 개헌, 다당제 실시를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해서 벌였다.
결국 10월 3일, 총통 대행 콴야오안과 국민대회는 국민대회의원 재선거 실시를 제외한 시위대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시위대중 일부 인원이 사망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10월 17일, 국민대회와 입법원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린뱌오, 펑더화이, 류샤오치등 숙청된 중국 공산당 인물을 복권시키고 공산당의 활동 재개를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10월 30일, 국민대회는 입법원에서 제출한 다당제 실시, 총통 직선제가 포함된 개헌안을 가결시켰고 총통 선거를 12월 8일에 실시한다고 밝혔다.
11월 22일, 화궈펑, 자오쯔양과 장쩌민 3인 중심으로 재건된 중국 공산당은 당대회를 개최해 자오쯔양을 총통 후보, 당 서기장에 화궈펑을, 행정원장 후보에 장쩌민을 각각 추대했다. 반면에 11월 13일 국민당에서는 옌자간을 그대로 차기 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12월 8일, 총통 선거에서 옌자간이 60.4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77년 1월 1일 취임식에서 옌자간은 작년에 있었던 소요사태의 책임을 지기 위해 국민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는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공산당으로 첫번째 정권교체

소련의 붕괴와 그 이후

현재

정치

총통부

입법원

행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