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의 변 (서태평양 연대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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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3일 (금) 15:39 판

개요

정통의 변(正統之變)은 1449년 몽골의 일파인 오이라트가 명을 공격, 회수 이북을 점령하고 명을 회남으로 밀어낸 사건이다. 이 때가 명 제6대 황제인 정통제 시기였으므로 정통의 변이라 이르며, 정통제가 포로로 잡힌 곳이 수도도 아닌 토목보라는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토목의 변(正統之變)이라고도 부른다. 영가의 난, 정강의 변과 함께 이른바 한족 3대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이후 한족은 두 번 다시 회북을 회복하지 못한 채 현대에 이르고 있다.

발단

전개

정통제의 친정과 토목보의 변

북경 함락

후원 건국과 남명 정권 수립

결과와 영향

한족은 영가의 난, 정강의 변에 이어 3번째로 회북을 상실하는 굴욕을 경험하였다. 그것도 태조 주원장과 개국공신들이 총력을 다해 밀어내고 멸망시킨 몽골이[1] 하루아침에 재기하여 북경을 함락시키고 강북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남명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그나마 초기에는 옛 금이나 원나라 사례를 들어 이들이 제대로 된 회북 통치가 불가능할테니 몇년간 허리띠 졸라매고 양병하면 북진할 수 있다....는 희망찬 이야기들을 떠들어댔지만, 곧이어 남명 초대 황제인 대조 경태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황실의 후계자 분쟁으로 피바람이 몰아치면서 회북 회복은 고사하고 당장 국내 반란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6세기에 들어서자마자 백, 남월, 촉한 등의 독립과 대월 후 레 왕조의 주강 남안지역 북진을 허용하는 등 그나마 있던 회남 영토마저 갈갈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진이나 남송도 100년 이상 장강에서 주강 하구까지 확고하게 통치했던 것과 비교하면 어지간히 답이 없었고, 특히나 송대 이래 중원의 판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촉, 월이 이탈한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답 없는 남명도 후초를 거쳐 어쨌든 1720년 청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회남지역 최대 국가 지위를 무려 270년이나 유지했다. 회북을 차지한 후원 역시 강남을 평정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 말이 몽골이지 보르지긴 황금씨족의 칸도 아닌 오이라트의 타이시가 황제를 칭하는 상황은 남명에서 기대했던대로 후원의 회북 통치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농서의 하, 요동의 요, 산동의 제 등이 연달아 독립하면서 중원의 지배권에서 떨어져나가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런 혼란상은 중원 왕조의 간섭을 약화시켜 한국에게 있어서도 조선의 훈춘-야춘지역 편입이나 이어의 주호 정벌 등 단기적인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통일왕조의 조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동아시아 전체의 무역구조를 붕괴시키고 경제사정을 악화시켰으며 통제되지 않는 밀무역상과 이를 노린 해적, 마적들 간에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도래했다. 그나마 명과의 관계가 좋지도 않았고 거리가 멀어 조공무역 의존도가 낮았던 월은 오히려 주강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면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고, 류큐 역시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는 했지만 국가 규모상 남명-후초와의 조공무역으로 국가 재정을 유지할수는 있었다. 반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대중 교역의 파탄으로 인한 재정난과 지방 통제력 상실이 겉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결국 센고쿠시대가 도래했다.

정통의 변은 한국사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명과의 완충지대였던 요동에 후요 왕조가 수립되면서 조선과 교류와 충돌을 반복했고, 조선은 대중교역이 중단된 상황 속에서 북요남왜의 양면전쟁 상황을 맞아 군비증강을 위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 명-일 간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던 이어 역시 사정이 좋지 않아 재정난 속에서 몇차례의 반란이 이어진 끝에 일본의 전면적인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조선 역시 후요와의 대립이 격화되던 상황에서 일본의 침공으로 같은 운명을 걸을뻔했으나 태조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여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결국 이어는 자체적으로 국체를 회복하지 못한 채 조선에 흡수되어 한국이 형성되었고, 요는 건주의 성장을 막지 못해 후금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후금은 다시 청나라가 되어 조선반도와 이어, 대만, 류큐, 일본열도를 제외한 동아시아 전지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하게 고수하려던 청의 정책은 화하족은 물론 동아시아 제 민족의 반발을 불러왔고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투와 결탁한 각국의 봉기와 독립으로 동아시아 중부의 통일기는 완전히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기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자체적인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동아시아사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1. 엄밀히 말하자면 오이라트는 몽골계로 분류되기는 하나 그 보르지긴 황금씨족과는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였다. 물론 그건 몽골 내부의 사정이고 명 입장에서는 그런 사정을 세세하게 따질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알아봤자 오히려 듣보잡 야만인들에게 털렸다는 충격만 배가시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