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의 변 (서태평양 연대기)

SELTOS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월 16일 (월) 12:50 판 (→‎결과와 영향)

개요

천보의 변(天保之變)은 1430년 북원이 장성 이남을 침공, 회수 이북을 점령하고 명을 회남으로 밀어낸 사건이다. 이 때가 명 제4대 황제인 천보제 시기(천보 5년)였으므로 천보의 변이라 부른다. 영가의 난, 정강의 변과 함께 이른바 한족 3대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이후 한족은 두 번 다시 회북을 회복하지 못한 채 현대에 이르고 있다.

발단

1368년, 원 제11대 황제인 토곤 테무르 카안이 명군의 북진으로부터 대도 사수를 포기하고 상도로 이어함으로써 명의 북벌은 완수되었고 몽골은 장성 이북에서 북원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후 1388년 쿠빌라이 칸의 직계인 우스칼 카안이 명의 침공으로부터 도주하던 중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예수데르에게 사망하고 예수데르가 조리그투 카안으로 즉위하면서 쿠빌라이가 선포한 대원 황제 지위를 폐지하였으나, 이와는 별개로 몽골 대칸의 권위와 약탈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호시탐탐 관내진출을 노렸고 이에 명은 영락제 즉위 이후 5차에 걸친 막북친정으로 대응했다.

정난의 변과 이에 이은 영락년간은 명실상부한 명의 최전성기였으나, 막북친정, 정화의 원정, 교지정벌, 모굴리스탄 칸국 원정 등 지속적인 대외사업은 명의 재정을 상당히 소진시켰고, 태종 영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천보제 주고후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심각한 상태로 몰고 갔다. 원래 영락제의 차자였던 그는 형인 연왕세자 주고후가 정난의 변 당시 금릉(남경)에 인질로 체류하고 있다가 조정에 의해 주살당하자[1] 정난 이후 조카인 주고후의 장자 주첨기를 제치고 태자에 책봉되어 황위에 오른 것으로, 무용이 뛰어나 정난의 변 당시 많은 군공을 세웠으나 성정이 난폭하고 교만하다는 이유로 태자 책봉 당시에도 조정에서 의견이 엇갈렸을 정도였다. 그 포악한 성정에 정통성 문제가 겹치자 즉위하자마자 신료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는데, 우선 영락 말엽에 주첨기의 황태손 책봉을 밀었던 해진(解縉)을 겨울철 눈속에서 얼어죽게 한 데 이어, 즉위 2년차인 1426년에는 영국공 장보를 비롯한 640명을 처형하고 동복동생 조왕 주고수를 비롯한 2,200여명을 폐서인하고 유배보내거나 변방으로 쫓아내는 대규모 숙청을 벌였다. 그나마 그 막장 인성 속에서도 남들 눈치는 보였는지 주첨기와 그 일족들은 건문제 때 불타버린 남경 고궁에 유폐하는 선에서 그쳤으나, 이 때 수많은 무장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었고, 황제 스스로 군사력의 약화와 반황제여론의 성장을 유도한 꼴이 되어버렸다.

천보제는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를 치유하기 위해서인지 무리한 대외원정과 토목사업에 계속해서 재정을 투입했다.[2] 그러나 이렇게 무자비한 숙청을 벌인 뒤인지라 막북이나 서역으로의 원정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3] 남방의 교지 반란은 천보 원년부터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황제로써 사치스러운 생활에 물든 치세 중반부터는 군사력 투사에도 흥미가 떨어졌는지 항해원정이나 토목공사에 돈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자연히 악화된 재정을 직격타로 맞은 농민들의 봉기가 빗발쳤고, 심지어 천보5년(1429년)에는 우량하이의 회주(現 간쑤성 후이닝현) 침공을 막지 못하는 등 군사적 실패로 조정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전개

교지 원정

이런 상황에서 천보제는 나름대로 황권을 되찾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바로 즉위초부터 골칫거리였던 교지의 레 러이에 대해 친정을 벌이는 것이었다. 내각태사 왕빈을 비롯한 조정과 군부의 강력한 반발로 친정은 취소되었으나, 50만의 대군이 움직이는 대원정에 천보제는 남경에 진수하여 전쟁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교지 원정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천보제는 시작부터 병력의 규모를 50만으로 못박았는데, 이유는 다른 거 없이 영락제가 1·2차 막북친정을 갈 당시 동원한 병력이 50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 영락친정도 3차부터는 30만 이하로 병력이 줄어들었던 것을 보면 이미 50만 원정군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천보제는 병력 편성의 지지부진함을 군부의 무능함으로 돌리며 태감 산수를 최고책임자로 임명했다. 황제의 명을 받들지 못하면 죽음뿐인 환관조직은 그야말로 전국을 달달 볶아 병력을 긁어모았고, 천보제는 1429년 8월 베이징에서 출정했다.

그러나 출정 후에도 문제는 계속되었다. 애초에 농번기에 끌려온 병력들이, 그것도 북쪽 끝 북경에 집결하여 다시 남쪽 끝 교지를 향해 진군하니 보급 소요는 한없이 늘어났고, 이 보급을 맡은 상인들이 대금을 높여 부르며 교섭이 난항을 겪을 때마다 병사들은 눈앞에 군량을 두고도 쫄쫄 굶어야 했다. 그나마 북경에서 남경까지의 잘 개발된 지역을 이동할 때에는 대금 문제만 해결되면 보급에 큰 문제는 없는 편이었으나, 양광지역을 거쳐 교지로 진입하자 30만이 넘는 대군이 제대로 보급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천보제는 그나마도 정예병력 20만은 따로 남직예에 주둔시키고 교지까지 보낸 것은 어린아이와 노인들까지 섞인 2선급 부대였다. 습한 남방에서 굶주리고 지친 원정군은 전염병까지 돌며 곳곳에서 월군의 공격에 무너졌다. 그 와중에 20만 대군에 북경 조정의 신료들과 그 가족, 궁인들까지 수십만 인원을 떠안고 황제가 거처할 궁의 수축에 동원된 남경과 남직예 또한 부담이 가중되면서 원성이 드높았다.

후정난(後靖難)

이 와중에 정이장군 왕통은 월의 고도 탕롱을 상실하고 이 과정에서 전사자만 5만이 넘는 대패를 당하자 월과의 화친을 청하였으나, 천보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429년 3월 독단으로 레 러이와 화의를 맺고 병력을 광서로 철수시켰다. 뒤늦게 이를 알고 분개한 천보제는 귀환한 왕통에게 사형을 명하고, 나아가 온 조정의 만류에도 10만이 넘는 귀환병력들을 노비로 삼도록 하는 한편 남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친정을 선포하였다. 남경으로 이동하던 도중 이 소식을 들은 귀환병들은 이판사판이 되자 남녕(南寧)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마침 천보제가 군사검열을 이유로 남경을 떠나 태호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틈을 타, 친정군 사령관을 떠안은 태감 산수는 학사 양영, 양무후 설록 등과 모의하여 조천궁에 유폐되어 있던 한왕 주첨기를 구출, 천보제 주변의 간신을 처단하고 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후정난(後靖難)을 선포하였다.

소주에서 주첨기의 반란 소식을 들은 천보제는 남경으로 귀환하려 하였으나, 남경 교외에 주둔하던 20만 원정군은 이미 정난군으로 변신하여 금의위를 이끌고 이동하던 천보제를 구용[4]에서 요격하였다. 대패한 천보제는 호위 수천기와 함께 간신히 장강을 건너 북경으로 도주했으나, 이미 정예병력을 모두 잃은 황제는 반란군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천보제가 북경으로 귀환했을 때에는 이미 반란군이 회수를 건너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천보제의 구원요청과 몽골의 개입

사실 북경 조정이 통제하는 병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은 요동, 대녕, 만전 등 국경지방의 수비병력이었고, 북직예의 병력 상당수는 이미 교지 원정군으로 차출되어 있었던데다가 산동과 산서의 병력들은 이미 정난군에 가담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었다. 급한대로 요동군 4만을 차출하여 북경 수비에 투입했으나 정난군은 선봉만 30만, 그 위에는 50만의 대군을 추가로 편성하여 북진하고 있었다.

이에 천보제는 최후의 카드로 몽골, 조선, 여진 등에 잇달아 구원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과 여진은 이미 몰락이 예견된 황제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5] 몽골의 실권자였던 오이라트의 토곤 역시 이제 막 외몽골을 통일한 상황이라 개입할 여력이 없다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몸이 단 천보제는 날려서는 안 될 공수표를 꺼내고 말았다. 바로 섬서성의 섬서행도사 전역과 영하제위(寧夏諸衛), 연수진의 할양을 약속한 것이었다. 당연히 과거 석경당의 연운 16주 할양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이 결정에 태사 왕빈을 포함한 모두가 경악하며 말렸으나, 반란군이 들이닥친 후 건문제의 운명을 면할 길이 없음을 아는 천보제는 우격다짐으로 이같은 친서를 토곤에게 보냈다.

후원 건국과 남명 정권 수립

결과와 영향

한족은 영가의 난, 정강의 변에 이어 3번째로 회북을 상실하는 굴욕을 경험하였다. 그것도 태조 주원장과 재조(再趙) 태종 주체가 총력을 다해 밀어내고 사실상 멸망시킨 것으로 여겼던 몽골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주체의 아들인 천보제 주고후에 의해 재입관에 성공하여 북경을 함락시키고 회북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명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그나마 초기에는 옛 금이나 원나라 사례를 들어 이들이 제대로 된 회북 통치가 불가능할테니 몇년간 허리띠 졸라매고 양병하면 북진할 수 있다....는 희망찬 이야기들을 떠들어댔지만, 곧이어 남명 초대 황제인 선덕제 주첨기가 재위 5년만인 1435년에 사망하고 만8세의 어린 정통제가 즉위, 환관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가 가속화되면서 회북 회복은 고사하고 당장 국내 반란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6세기에 들어서자마자 백, 남월, 촉 등의 독립과 대월 후 레 왕조의 주강 남안지역 북진을 허용하는 등 그나마 있던 회남 영토마저 갈갈이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진이나 남송도 100년 이상 장강에서 주강 하구까지 확고하게 통치했던 것과 비교하면 어지간히 답이 없었고, 특히나 송대 이래 중원의 판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촉, 월이 이탈한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답 없는 남명도 후초를 거쳐 어쨌든 1720년 청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회남지역 최대 국가 지위를 무려 270년이나 유지했다. 회북을 차지한 후원 역시 강남을 평정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 말이 몽골이지 보르지긴 황금씨족의 칸도 아닌 오이라트의 타이시가 황제를 칭하는 상황은 남명에서 기대했던대로 후원의 회북 통치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농서의 하, 요동의 요, 산동의 제 등이 연달아 독립하면서 중원의 지배권에서 떨어져나가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런 혼란상은 중원 왕조의 간섭을 약화시켜 한국에게 있어서도 조선의 훈춘-야춘지역 편입이나 이어의 주호 정벌 등 단기적인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통일왕조의 조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동아시아 전체의 무역구조를 붕괴시키고 경제사정을 악화시켰으며 통제되지 않는 밀무역상과 이를 노린 해적, 마적들 간에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도래했다. 그나마 명과의 관계가 좋지도 않았고 거리가 멀어 조공무역 의존도가 낮았던 월은 오히려 주강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면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고, 류큐 역시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는 했지만 국가 규모상 남명-후초와의 조공무역으로 국가 재정을 유지할수는 있었다. 반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대중 교역의 파탄으로 인한 재정난과 지방 통제력 상실이 겉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결국 센고쿠시대가 도래했다.

정통의 변은 한국사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명이 요동에 개입할 수 없게 되면서 조선은 4군 6진 개척을 통해 벼르고 벼르던 압록-두만강 국경선을 확립하는 한편 건주위에 대한 무력 정벌을 감행하는 등 활발한 북진 정책을 펼쳤으나, 조선이 후원한 이문빈의 성주이씨 가문 군벌이 후요 왕조를 수립하면서 조선과 교류와 충돌을 반복했고, 조선은 대중교역이 중단된 상황 속에서 북요남왜의 양면전쟁 상황을 맞아 군비증강을 위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 명-일 간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던 이어 역시 사정이 좋지 않아 재정난 속에서 몇차례의 반란이 이어진 끝에 일본의 전면적인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조선 역시 후요와의 대립이 격화되던 상황에서 일본의 침공으로 같은 운명을 걸을뻔했으나 태조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여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결국 이어는 자체적으로 국체를 회복하지 못한 채 조선에 흡수되어 한국이 형성되었고, 요는 건주의 성장을 막지 못해 후금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후금은 다시 청나라가 되어 조선반도와 이어, 대만, 류큐, 일본열도를 제외한 동아시아 전지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하게 고수하려던 청의 정책은 화하족은 물론 동아시아 제 민족의 반발을 불러왔고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투와 결탁한 각국의 봉기와 독립으로 동아시아 중부의 통일기는 완전히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기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자체적인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동아시아사의 주도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1. 우유부단하기로 소문난 건문제 주윤문은 그의 처분을 미루려 했으나, 주고치의 억류를 주도했던 강경파 제태는 끝내 그를 암살했다. 반대로 함께 금릉에 체류했던 주고후는 주체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들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황자징의 주장으로 동생 주고수와 함께 금릉을 빠져나와 정난의 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2. 사실 태자 재위 시절에도 영락제가 친정 등으로 자리를 비우면 주고후가 대리청정을 했는데, 그 때마다 국정이 엉망으로 돌아가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 불만이 드높았고 태자 친위세력인 구복, 왕녕선 등은 이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결국은 영락제마저 어느정도 장성한데다가 명군의 자질을 보이는 장손 주첨기로의 후계자 교체를 고려했으나, 건문제의 트라우마가 워낙 심했기에 주고후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3. 막북 원정은 이미 영락년간에도 황제의 위엄을 보여주는 무력시위 성격이 강했지, 몽골 측에서 유목민족답게 초원지역에서 굳이 정면대결하기보다는 빠른 철수 후 복귀를 선호했기 때문에 실제 군사적 성과는 얻기 힘들었다.
  4. 句容; 현 전장군 쥐룽시
  5. 당연하지만 천보제는 조선에게도 매우 가혹한 조공을 요구해 조선의 불만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