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라이히(Kaiserreich) 세계관은 사라예보 사건 직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세르비아 및 대러시아 선전포고가 지체되지않고 이루어졌으며, 대 몰트케와 슐리펜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수정된 슐리펜 계획이 성공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이 물리적인 항복을 하고 대영제국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기아로 항복하여 대전쟁(Weltkrieg)이 동맹국의 승리로 끝난 세계이다.

독일 제국은 전후 상수시 조약으로 하여금 협상국들을 굴복시켜 세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으며, 유럽 경제적 협력공동체인 미텔오이로파(Mitteleuropa)와 독일의 세력권인 국가협정(Reichspakt)을 창설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제2전성기를 이끌고있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정치분열과 무리한 식민지 경영, 각지 제국영토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독일의 모순된 제국은 점차 무너져내리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불어오는 국가대중주의와 공산주의의 물결은 전세계를 또다시 2번째 대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년도는 1930년이며, 전세계는 독일 제국이 이끄는 국가협정(Reichspakt), 프랑스국이 이끄는 강철조약(Pacte d'acier), 캐나다 왕국이 이끄는 신 협상국(New Entente), 토리노 코뮌이 이끄는 제3인터내셔널(Third Internationale)이 있다. 각각 권위주의 및 반동주의, 국가대중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세력들이며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있는 강대세력들이다.

세력(Pact)

세력은 4개의 강대세력과 그외의 중소세력, 그리고 중립국으로 나뉜다.

세력명 이념 공용어 중심 국가
경제 이념 정치 이념
국가협정
Reichspakt
자본주의 시장경제 권위민주주의(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 독일어 독일 제국
강철조약
Pacte d'acier
자본주의 계획경제 국가대중주의(로크주의) 프랑스어 프랑스국
제3인터네셔널
Third Internationale
Terza Internazionale
사회주의 계획경제 공산주의(토리노 생디칼리즘)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토리노 코뮌
신 협상국
New Entente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캐네디안 데모크라시) 영어
프랑스어
캐나다 왕국

분기점

현실의 지구 역사와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다룬다.

대전쟁(Weltkrieg) 이전까지

자세한 내용은 카이저라이히/대전쟁 이전까지의 연표 참고.

1890년,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러시아가 독일의 성장과 평화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재보장 조약의 연장에 동의했다. 러불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삼제동맹은 유지되었다. 독일의 성장에 압박감을 느낀 영국이탈리아, 프랑스와 함께 삼국협상을 맺었고 삼제동맹과 삼국협상은 서로 견제하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의 해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임기는 그가 죽는 1912년까지 계속된다.

1894년, 동학정부와 민씨 정권의 타도와 한국내의 외세 척결, 개혁등을 조건으로한 극적인 타협을 맺고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동학군은 해체되었으며, 최제우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동학의 요구에 따라 고종김홍집을 주축으로 갑오개혁을 실시했다.

1895년, 동맹국이 청일전쟁에 개입하다.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은 저지되었고 도움의 댓가로 청나라는 러시아에 대만을 할양해야만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는 계기가 된다.

1898년, 변법자강 운동이 발발하다. 변법자강은 서태후 및 반개혁파에 의해 실패할 뻔했으나 광서제가 이들을 지지함을 천명하면서 기적적으로 성공했고, 개혁파들은 민병대를 창설해 자금성을 점령, 서태후와 부패한 관리들을 북경에서 척결하는데에 성공했다. 광서제는 개혁파에 의해 옹립되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반개혁파들은 개혁파 정권을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제1차 중원내전이 발발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의 국가들이 개혁파를 지지하며 개입했고 일본 역시 군대를 산둥반도 등지로 진주시키며 개입했으며, 당시 중국을 노리고있던 스페인도 중국 개입을 위해 필리핀 주둔군을 대규모 확장시켰다. 한편, 메인 함 사건을 이유로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포고했고, 스페인령 쿠바가 점령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역공을 펼쳐 오히려 하와이를 해방했고, 미국의 진격은 쿠바에서 멈췄다.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윌리엄 매킨리가 사임했고, 뒤이어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 임기를 이었다. 하와이에서는 스페인의 괴뢰정권인 하와이 왕국이 재건 및 건국되었다.

1899년, 스페인이 내부반발을 못이기고 필리핀을 해방했다. 대신, 필리핀 주둔군은 곧장 중원내전에 개입하기위해 광저우에 파견되었고, 취안저우를 점령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했고, 영국군이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00년, 의화단이 서태후와 반개혁파를 지지하며 외세척결을 구호로 들고 일어났다.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이들과 군을 합쳐 북경을 장악했다.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총 4천명의 10개국 연합군이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격파되었다. 곧 연합군은 다시 3만 5천의 병사를 재파견했고, 개혁파와 연계해 북경을 탈환하고 남벌을 실시했다. 러시아는 중원내전 개입을 위해 아시아 함대를 대규모로 확장시켰고, 이것이 러일전쟁의 승리 원인이 된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고 에드워드 7세가 즉위했다. 의화단 운동은 사그라들긴 했으나 서태후를 비롯한 반개혁파가 윈난과 광시에 걸쳐 저항에 나섰고, 결국 서태후가 암살됨으로서 중원내전은 막을 내렸다. 천진은 10개국을 위해 분할되어 조차되었고, 오스트리아에는 산웨이가, 스페인에게는 취안저우가 추가 조차되었다. 미국에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3년에 걸친 대규모 개혁과 경제개발을 통해 매킨리때 잃어버린 지지율을 다시 끌어모았다. 그의 정책은 외교적으로는 제국주의적이면서 정치, 경제적으로는 급진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후 이는 미국 대중주의(American Populism) 혹은 테디즘(Teddism)이라 불리우며 남부나 중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한편,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사회당의 인기에도 영향을 끼쳐 사회당이 상원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인들이 보어인들에게 굴복했고, 남아프리카의 광산은 보어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케이프타운에 고립되었다. 보어전쟁에 자극받아 아일랜드에서도 한차례 봉기가 발생했고 인도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모의되었지만 실패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급진공화파가 예수회 추방을 위한 결사법을 발의했으나 부결되었고, 이는 프랑스내 공화파와 반유대주의•종교계간의 불화를 불러오면서 훗날 민주 세력이 프랑스국 정부를 부정하고 독자 공화정부를 건립하는 계기가 된다.

1902년, 쿠바가 미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한편, 스페인은 스페인어권 국가들을 규합해 이베리아 세력권을 형성하고자했고, 신생국가로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쿠바와 필리핀은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자주성을 댓가로 스페인과 함께했다. 한편 청일전쟁의 실패로 나날이 희망을 잃어가던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곧 협상국의 지원 아래에 동맹국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의 웨이하이 점령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한반도에도 군을 진주시키는등 무력적인 도발행위를 벌이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들게된다. 남아프리카에서는 트란스발 조약에 따라 보어인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자주성을 인정받았고,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과 보어인 공화국 및 자유주들이 남아프리카 연방을 구성하게된다. 한편, 영국은 케이프타운을 남아프리카 자치령이라는 이름으로 자치를 허용했다.

1904년, 일본이 뤼순항을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는 독일에게 함대를 빌려 뤼순에서 일본 함대를 격퇴시켰고, 뤼순과 다롄을 요새화시키고 대만에 주둔한 병력을 통해 오키나와 지역을 공습하면서 역공을 시도했다. 이어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해군을 동해로 진주시키고 한국에 동해를 정찰할 권리를 받아내고 동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러시아가 승승장구하자 한국의 친일파들은 친러파나 친독파, 친서파등으로 갈아탔고 한일의정서는 거부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뤼순에서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그의 내각은 중의원으로부터 내각불신임을 받고말았다.

1905년, 노동자 임금 문제를 두고 러시아에서 시위가 발생하다. 병사들이 시위대를 사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긴 했으나, 알렉산드르 2세가 병사들을 제지하고 시위대의 지도자 가폰 신부와 타협해 개혁을 약속하면서 무력시위로 번지는 결과는 없었다. 핀란드, 폴란드, 우크라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의회(소비에트)가 설치되어 자치와 보통평등선거가 보장되었다. 한편, 쓰시마 해전에서 동해와 대한해협의 지형을 파악한 러시아 해군이 일본 해군을 격멸하면서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신 부산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동해에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한국이 이를 수락하면서 한러의정서 혹은 을사협약이 체결된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프랑스가 모로코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자, 삼제동맹은 모로코 문제에 개입하여 프랑스으 모로코 합병을 저지하고 모로코의 독립을 유지했다. 이후, 모로코는 에티오피아 제국, 라이베리아 공화국등과 함께 아프리카의 몇안되는 독립국이자 지중해의 무역대국으로 거듭나게된다. 모로코 왕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과 친선을 맺으며 훗날 대전쟁에서 동맹국에 참전하였으며, 이 사건에 자극받은 북아프리카인들은 폭동을 일으키며 프랑스의 아프리카 지배를 대항하기 시작한다.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필리핀과 협약을 맺고 러시아와 담판을 지어 양국의 영향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추진해나갔다.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참모총장직을 유지하다. 슐리펜 계획이 효율적이고 현실적으로 보강되었고, 최우선 목표는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변경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가 두마를 개최하고 군주제 폐지등을 제외한 개혁을 수용하면서 러시아를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이 유죄로 판결났고 결국 드레퓌스는 지지자들의 도움하에 미국으로 망명해 프랑스 공화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내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