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역대 타이난 대통령(신센 시대)}} {| class="infobox" style="text-align: center" width="20%" align="right" ! colspan="4" style="background:#0B2B63; color:#FFFFFF;" |<big>'''타가와 미에나리'''</big><br>({{llang|ja|箍和三重也}}) |- | colspan="4" style="background:#FFFFFF; color:#5D5D5D;" | [[파일:箍和三重也.jpg|300px|가운데|]]'''타가와 미에나리의 모습''' |- | colspan="4" style="background:#0B2B63; color:#FFFFFF;" | 인물 정보 |- | colspan="2" style="background:#FFFFFF; color:#5D5D5D;" | 본명 | style="text-align: center;" | <small>타가와 미에나리<br>(箍和三重也) |- | colspan="2" style="background:#FFFFFF; color:#5D5D5D;" | 주요 직책 | style="text-align: center;" | <small> [[타이난 공화국]] 대통령 </small> |- | colspan="2" style="background:#FFFFFF; color:#5D5D5D;" | 생몰연도 | style="text-align: center;" | <small>1841년 7월 3일 ~ 1921년 7월 4일 |- | colspan="2" style="background:#FFFFFF; color:#5D5D5D;" | 임기 기간 | style="text-align: center;" | <small>[[타이난 공화국]]의 '''3대 대통령'''<br>(1882 ~ 1887) |} '''타가와 미에나리'''({{llang|ja|箍和三重也}})는 [[타이난 공화국]]의 정치인으로서 3대 대통령직을 역임하였다. 최초로 [[공화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대통령이기도 하다.<ref>물론 [[오토리 아시스케|전임 대통령]]의 [[엽관제]]를 통해 비 공화파 출신 인물들이 정계로 진출했으나, 여전히 [[공화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차지했고, 미에나리 역시 공화파 출신이기는 하다.</ref> 사실상의 '''군주'''와 다름 없는 권력을 가졌던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보다 대중적인 정치를 추구하던 민본주의자이기도 했다.<ref>이 때문에 타이난의 [[포퓰리즘]] 정치의 시작은 그를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이 시기부터 풍요로운 사회를 낭만적으로 보는 [[쿄와 로망]](共和-ロマン)이 대두되었다.</ref> ==초반 생애== 1841년 [[미츠소바켄]](密稜縣) 출신으로 1859년 스스로 지유닌(自由人)을 자처하면서 방랑 생활을 했으며, 이후 [[신센 막부]] 시기 조정에서 외무성, 농무성의 임시 채용되어 근무하다가 1868년 [[공화파]]에 입당하였다. 1872년 [[공화 혁명]]으로 [[나가야 쿄타]]의 공화 정권이 수립되자 국영 신문인 [[코에 신문]](光遠新聞)의 사장이 되었다. 1880년 공화파에 휘하 파벌을 이끌고 [[입헌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계의 참여하였으며, [[오토리 아시스케]] 정권 당시에는 농림산업부의 차관을 맡았고 1881년에는 우정산업청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주요 정권 요직을 역임한 뒤 1882년 [[입헌회]] 제2대 장재(長裁)에 취임했다. 미에나리는 처음으로 '공약'이라는 것을 내세워 국민권 확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내세웠고 이 시대부터 좀 더 대중주의적인 정치, 이른바 [[포퓰리즘]]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공화파의 파벌로서 분류되기도 했으나 정치적 이익이나 참여를 주장하는 집단인 정당 지도자 출신의 대통령이기도 했다. ==3대 대통령으로서== 그는 자신이 말했던 '공약'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을 겸하고 있다는 점과 절대적 권한 가지고 있는 것, 임기가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점을 문제로 보고서는 행정부 수반인 [[내각 총리]]를 [[하의원]](下議院)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며, 대통령의 법안 통과권을 국회에 반납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뜻에 따라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을 법률로 명시토록 했다. 이때부터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점차 내각제를 중심으로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엽관제]]를 적극 시행토록 하여 비 공화파 인물들의 정계 진출을 지원하는 등 대중 정치에 발판을 다지기도 했다.<ref>[[다카우에 미노루]](高上実縷) 대통령이 미에나리 정권 시기에 처음으로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 사실상 [[난세이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한 인물.</ref> 교통운수시책의 확충을 내세우며 기존의 철도원을 철도성으로 승격하기도 하는 등 철도 부설에 각별히 신경을 쓴 인물인데, 그의 적극적인 철도 정책으로 개통된 것이 바로 [[야마다 선]](山田線). 외교 정책에서는 스페인의 [[필리핀 도독령]]의 관할이었던 [[타위타위 제도]]를 사들여 "홋포토"(北方島)라고 명명하였다.<ref>당시 필리핀 제도는 이른바 "반스페인 민족 운동"이 고조된 시기로서 온건 개혁 정책에서 무장 투쟁으로 급격한 변혁을 겪던 시기이다. 스페인 당국으로서는 별볼일 없는 군도들을 매각시켜 [[타이난 공화국|타이난]]에게 민족 운동 진압의 협조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타이난의 입장으로서는 국제적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하여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였고, 이 소수 병력마저도 반 스페인 시위에 방관자 노릇을 했다가 1898년에 스페인 지배기가 종료되자 귀국하였다.</ref> ==사후와 평가== 퇴임 이후 [[입헌회]]의 명예 장재로서 역임하는 등 정계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 갔다가 1921년, 자신이 매입한 [[홋포토]]의 '마카야리켄'에서 노년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루어 졌으며, 타이난 공화국의 대중 정치 시도 및 민본주의 기여에 노력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각주== {{각주}} 타가와 미에나리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