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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상태
통일전쟁
朝鮮戰爭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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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50년 6월 25일 ~ 1951년 2월 15일
장소
한반도
배경과 원인
김일성의 무력 통일 야욕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
애치슨 라인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
중국의 적화통일
목표
북한 측
한반도 적화통일(국토완정)
남한 측
한반도 북진통일
결과
남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
분단 시대 종결
연변 정권 수립
영향
중소갈등 시작
미국의 해외 개입 본격화
영토 변화
한국의 한반도 전역 장악
참전국
유엔군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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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프랑스
뉴질랜드
터키
태국
필리핀
벨기에
그리스
남아프리카
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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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주요 지휘관
유엔군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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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지청천
김홍일
손원일
김정렬
이응준
김원봉[1]
조성환
김석원
홍사익
채병덕
백선엽
정일권
이형근
김백일
유재흥
김종오
이성가
해리 트루먼
조지 마셜
더글러스 매카서
월튼 워커
벤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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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최용건
김책
남일
방호산
김광협
김무정
강건
오진우
최광
마오쩌둥
펑더화이
쑹쓰룬
예젠잉
이오시프 스탈린
참전 병력
유엔군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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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만 명
[ 펼치기 · 접기 ]
50만 명
피해 규모
유엔군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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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2만 5천 명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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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9만 명 전사, 17만 명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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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10만 명 사망
한반도 공업력의 24%, 농업력의 11% 손실
각주
  1. 민병대 지휘


개요

1950년 6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약 8개월 동안 동아시아의 한반도에서 진행된 전쟁.

배경

1948년 중후반 한반도의 남과 북이 분단된 이래로 무력 사용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이승만과는 달리 북한의 수상 김일성은 무력을 이용해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북한 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소련 서기장 스탈린에게 전쟁 허가를 요청하였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다.[1]

하지만 1949년에 들어서며 국제정세가 극적으로 변하였다.  우선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1948년까지만 하더라도 핵폭탄을 보유한 국가는 미국이 유일했는데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또한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중국이 통일되어 공산권에 자신감이 붙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을 지켜주던 마지막 안전장치마저 사라졌다.  결국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청을 수락했고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대량으로 지원했다.

전개

1장. 북한군의 남진

종류 국군 인민군
병력 8만 7천 명
19만 3천 명
곡사포 134문
552문
박격포 1,340문
1,728문
대전차포 250문
550문
전차 38대
242대
항공기 33기
211기

인민군은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 전역에 걸처 기습적인 공격을 가했다.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군은 인민군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였다.  국군은 38도선을 따라 구축해놓은 대전차 바리케이드로 북한군 전차의 진격을 가능한 저지하려 하였다.  실제로 춘천 방면의 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상령)과 문산 방면의 국군 1사단(사단장 정일권 상령)은 사흘 이상 위치를 사수하며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특히 6사단은 나흘 동안이나 춘천을 사수, 북한군 2군단(군단장 김광협 중장)의 진격을 차단해 국군 1군단을 우회포위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하지만 북한군의 주공은 동두천-포천 방면이었다.  해당 지역의 7사단(사단장 유재흥 소장)은 북한군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고 국군 기계화여단(여단장 백선엽 상령)이 투입되어 소규모 기습을 감행한 후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동해안 강릉을 방어하던 3사단(사단장 이성가 상령)은 북한군이 후방에 상륙하여 포위되었으나 포위망을 돌파,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지연전을 펼첬다.

대전의 정부[2]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한강-홍천강 이북에 소개령을 발령했다.

6월 29일, 서울이 북한군 제9전차여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국군은 한강과 홍천강을 잇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1군단(군단장 홍사익 중장)은 한강을, 2군단(군단장 이응준 중장)은 홍천강과 강원도를 방어하였다.  후방에 있던 국군 3개 사단이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전력 격차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한강-홍천강 방어선에서 국군은 10여 일 간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7월 5일에 개성 방면의 북한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이 한강 도하에 성공하여 김포 반도에서 국군 1사단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후 북한군이 방어선 곳곳에서 돌파에 성공하면서 한강-홍천강 방어선이 붕괴하였다.  방어선 붕괴 후 국군은 미 공군의 공중 지원을 받으며 지연전을 수행했다.  7월 9일에 있었던 수원 전투에서는 국군 1사단(사단장 정일권 상령)과 기계화여단(여단장 백선엽 상령)이 반격하여 북한군 1개 연대를 궤멸시키고 전차 10여 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동부전선에서는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활용하여 6사단과 3사단이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7월 중후반에 들면서 북한군은 천안, 충주를 점령하고 연기와 영주를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연기군 바로 밑에 위치한 대전의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파천한다.  국군은 금강과 낙동강을 잇는 방어선을 형성했고 미 26사단(사단장 딘 소장)이 방어선에 합류하였다.

북한군의 보급선은 이미 늘어질대로 늘어진 상황이었고 미 극동 공군과 한국 공군의 공습은 안 그래도 위태롭던 북한군의 보급체계를 박살냈다.  북한군은 궁여지책으로 해로를 통한 보급을 시도하였지만 수송선을 띄우는 족족 제해권을 장악한 한국군 해군 구잠함들에게 침몰하였다.  결국 북한군은 대전을 코앞에 두고[3] 공세종말점을 맞이했다.

2장. 유엔군의 북진

유엔군이 한반도에 속속히 도착하고 북한군의 진격이 금강-낙동강 방어선에서 최종 저지되자 유엔군 사령부는 반격을 준비한다.  유엔군 사령부는 전면 공세는 아군에게도 큰 피해를 줄 것이라고 판단하여 상륙작전을 계획한다.  문제는 '어디에' 상륙하는지였다.  의견이 분분하던 중 한국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중장이 북한의 수부인 평양이나 그에 인접한 진남포나 용강을 직접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매카서 원수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진남포 상륙작전을 계획하다.  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로 정해졌다.

마침내 1950년 9월 15일, 일본과 한국 곳곳에서 출발한 미군과 한국군 7만 5천 명의 병력이 해상에서 합류하여 진남포에 상륙하였다.  북한군 수뇌부는 김무정을 평양 방어 사령관에 임명하여 수도 사수를 시도하였지만 평양은 무력하게 함락되었다.[4]  김무정은 항복했다.

북한군 수뇌부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북한군의 지휘체계와 보급체계는 완전히 붕괴했다.  남포에 상륙한 유엔군은 나흘 만에 평양을 점령했고 금강-낙동강의 유엔군은 북진을 거듭하여 서울을 수복했다.

북한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0월 말 북한군이 제대로 지휘할 수 있었던 부대는 평안북도 방면의 2개 사단과 영흥 방면의 1개 사단이 전부였다.  나머지 사단은 대부분은 38선 이남에서 싸우다가 퇴로가 막혀 궤멸되었고 잔존 부대는 방호산 소장의 6사단에 흡수되어 원산 방면으로 퇴각하고있었다.  북한군 지휘부는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청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가볍게 격파된다.  11월 19일 기준 유엔군은 신의주, 초산, 혜산, 청진까지 북진하였다.

3장. 중공군의 개입

한국 정부는 일찍이 중공의 개입을 우려했다.  한국 총통 이승만은 장면을 특사로 하여 베이징에 특사단을 파견하여 중공의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자는 제안을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자면 중공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의 북한 세력에 어떠한 형태의 지원도 하지 않으면 유엔군은 압록강-두만강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확답을 주지 않았으나 북한의 다급한 지원 요청과 펑더화이의 파병 설득에도 불구하고 다소 머뭇거려 일단 국경선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도하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1월 17일, 신의주가 유엔군에게 함락되자 마침내 인민지원군에게 압록강 도하명령을 내린다.

유엔군과 인민지원군 간의 첫 전투는 강계에서 벌어졌다.  한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 소장)과 중공군 180ㆍ181사단이 맡붙은 것.  6사단은 강계 점령에 실패했고 항공정찰에서 적의 추가 병력이 확인되자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틀 후, 중공군 9병단 12개 사단이 장진의 미 1해병사단, 7보병사단을 포위공격하였고 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함흥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을 확인한 유엔군 사령부는 청천강-묘향산맥-성진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했다.

4장. 전쟁의 끝

1950년 12월 10일부터 18일까지 있었던 중공군의 공세가 실패하자 이렇게 전선이 고착화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중공군이 1951년 1월 12일부터 중공군의 2차 공세가 개시되었는데, 공사 도중인 14일, 등화관제 실패로 인민지원군 사령부 위치가 유엔군에게 발각되었고 공습으로 사령원 펑더화이와 부사령원 쑹스룬 등 지휘부가 전멸한다.  지휘부가 사라진 중공군은 각 부대 지휘관 임의로 일부 부대는 공세를 지속하고, 일부 부대는 수비로 전환하고, 일부 부대는 퇴각하는 등 지휘계통이 붕괴했다.  마오쩌둥은 급히 예진잉을 신임 총사령원으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중공군은 각지에서 고립된 채 포위섬멸당하였고 잔존 부대는 무질서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은 마음이 급해졌다.  유엔군이 압록강을 넘어 북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 정부는 북한에 알리지 않고 급히 회담을 요청하고 이전에 한국 정부가 제안한 안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협상은 타결되었고(중난하이 밀약) 중공군은 전 병력을 압록강-두만강 이북으로 철수시켰으며 유엔군은 철수하는 중공군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중공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양측은 즉각 포로를 교환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런 와중에도 권력투쟁이 있었다.  남로당파와 연안파가 연합하여 김일성을 제거한 것.  당시 김일성이 이끌던 만주파는 김일성의 각종 병크와 핵심 맴버였던 김책의 전사[5]로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최용건이 김일성을 배신하고 반대파에 연합하면서 김일성은 그대로 실각한다.[6]  신임 수상에는 박헌영이 추대되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수상에 취임한지 이틀 만에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예진잉이 유엔군과 중공군 간의 평화조약 체결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철군하기 시작했다.  박헌영은 노발대발하며 항의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고 중공군은 그대로 강을 넘어 철수간다.  중국이 북한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라서 박헌영, 김두봉, 최용건을 비롯한 북한군 수뇌부와 30만 명의 주민이 중공군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연변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임시정부가 흔히 연변 정권으로 불린다.

1951년 2월 15일, 이승만이 평양 군중 앞에서 평양 선언을 발표하면서 전쟁이 끝난다.

1951년 8월 15일에는 서울 천도와 동시에 통일기념전국민대회가 열렸다.

영향

한국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남북한 도합 약 40만 명이 사망했으며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  경제도 피해가 컸는데 농업력의 11%, 공업력의 24%를 상실했다.  특히 37도선 이북의 피해가 컸는데 이는 전쟁의 무대가 37도선 이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은 중난하이 밀약을 통해 중국과의 약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한 상태였고 국방비를 감축하여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시작한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위신이 깎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중소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중국군 나름 정예라고 자랑하던 병력이 어이없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중국과 유엔군 간의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심을 하게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양국간의 관계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통일전쟁에서 큰 자신감을 얻었다.  단시간에 적은 피해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서 공산주의를 축출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의기양양해진 미국은 곧 베트남에 개입하였고 베트남전이 발발한다.

각주

  1. 거절이라기 보다는 보류라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긴 하다.
  2. 1948년 이래로 대한민국 정부는명목상 수도인 서울이 아닌 대전에 위치하고 있었다.
  3. 대전 서북쪽 방면에서 금강 도하에 성공하여 대전 2km 밖까지 전진했었다
  4. 김무정은 애시당초부터 평양 사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김일성이 억지로 임명했다.
  5. 전선사령관으로 함주 전투를 지휘하다가 포탄에 피격당해 전사했다.
  6. 이후 어떠한 기록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 실각 직후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