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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8일 (월) 16:47 판

대한민국

역사

건국과 수교
한만수교기념식 (1932)[1]

한국과 만주는 만주의 건국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만주를 포함은 중국 전역에서는 온갖 군벌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는데대군벌시대 한국은 만주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몇몇 군벌과 단체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중 하나가 장징후이가 이끄는 군벌이었다. 이후 한국이 장징후이 등의 친한파 인사들에게 만주에서의 독립국 건국을 종용했고,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복벽주의 지식인이었던 정샤오쉬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가 이 움직임에 합류하면서 1927년 입헌군주제 국가인 만주국이 탄생했다.

한국과 만주의 정식 수교는 만주가 건국된지 한참 후인 1931년에야 이루어졌는데, 이는 한국 정부가 만주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던 중화민국 정부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다만 정식 수교 이전에도 양국은 서로의 수도에 대표부을 설치해 사실상 대사급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시대
만주을 국빈방문해 만주 복식을 입은 한국 각료들 (1938)[2]

만주는 청나라를 계승하는 입헌군주국을 자처했기에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민중의 지지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하였다. 이로 인해 만주는 더욱 한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고 1934년에는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등 만쥬늬 대한 의존이 강화되었다. 반면 한국은 만주에서 자원과 인력을 값싸게 공급받고 한국의 공산품을 판매할 안정적인 시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무리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1936년, 이웃한 녹우크라이나에서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과 소련군 사이의 대규모 무력충돌인 치올코우스키 전투가 벌어지자 한국과 만주는 다급해졌다. 그동안 먼 나라 이야기라고 여기던 전쟁이 이웃나라에서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1930년대를 휩쓴 대공황으로 인해 강도높은 군축을 진행했던 터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감퇴하여 있었다. 특히 상황이 심각했던 만주는 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한국도 코가 석자인 마당에 마땅히 도움을 줄 방도가 없었다.

결국 1940년, 한국, 만주, 녹우크라이나 모두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다. 소련군과 일본군의 맹렬한 겅격 앞에 세 나라 모두 멸망의 위기에 놓였었지만 독일의 소련 기습침공으로 인해 소련이 앵커리지 평화조약으로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한국과 만주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3]

냉전
현대
멍훙웨이 수상과 반기문 대통령

양국 간의 협력

외교공관

  1. 기념식에 참석한 강덕제와 한만양국의 각료들의 사진이다. 저중에 누가 푸이인지는 사진을 올린 쿠리오 본인도 모른다고 한다
  2. 앞줄 중앙이 방문단 단장이었던 부총리 겸 내무성장관 이동녕.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2년 후 전시수상을 맞게 되는 당시 국가안전성장관 김창암
  3. 하지만 녹우크라이나는 평화조약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종용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