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 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분류:교회 공화국 세계관 ==개요== 포르투나 왕국의 건국을 계기로 발생한 내전. 이 내전 이후 포르투나 제도 내에서 장원의 영향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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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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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바다늑대시대.png|프레임|바다늑대시대 이전]]
포르투나 왕국은 본래 신성 루멘 제국의 일원으로 항해 기사단, 일명 포르투나 기사단이 총괄하는 기사단령이었다.
포르투나 왕국은 본래 신성 루멘 제국의 일원으로 항해 기사단, 일명 포르투나 기사단이 총괄하는 기사단령이었다.
이들은 언제나 제국에게 충성 하였으며 작센 왕실과 교황청 또한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들은 언제나 제국에게 충성 하였으며 작센 왕실과 교황청 또한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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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 기사단은 작센 왕실과 교황청의 지원 없이는 북방 수호가 불가능하다고 호소 하였다.
포르투나 기사단은 작센 왕실과 교황청의 지원 없이는 북방 수호가 불가능하다고 호소 하였다.


[[파일:1.내전 이전.png|프레임|고트란트 할양]]
그럼에도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끝내 지원을 주지 않았고 포르투나 기사단은 결국 북방의 해적들과 협상을 벌여 고트란트를 할양하고 포르투나 제도의 안전을 보호 받았다.
그럼에도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끝내 지원을 주지 않았고 포르투나 기사단은 결국 북방의 해적들과 협상을 벌여 고트란트를 할양하고 포르투나 제도의 안전을 보호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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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톨레이로스 전투===
===아톨레이로스 전투===
[[파일:2.발발.png|프레임|내전 발발]]
코르테스가 소집되어 포르투나 왕국이 건국되던 한편 포르투나 왕국에 반대하는 친 제국주의자들은 브리튼의 성직자 장원이자 제 3의 도시인 포르투에 모여 봉기를 준비했다.
코르테스가 소집되어 포르투나 왕국이 건국되던 한편 포르투나 왕국에 반대하는 친 제국주의자들은 브리튼의 성직자 장원이자 제 3의 도시인 포르투에 모여 봉기를 준비했다.
아폰수 1세가 라고스에서 포르투나 왕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뒤 아폰수 1세는 곧장 포르투나 제도 제 1의 도시이자 포르투나 기사단의 본거지인 리스보아로 귀환했다.
아폰수 1세가 라고스에서 포르투나 왕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뒤 아폰수 1세는 곧장 포르투나 제도 제 1의 도시이자 포르투나 기사단의 본거지인 리스보아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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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막기 위해 코르테스는 민병대를 구성했고 이 민병대에 참여한 기사이자 지휘관이 바로 성전 기사단 출신의 알바레스 페레이라였다.
이를 막기 위해 코르테스는 민병대를 구성했고 이 민병대에 참여한 기사이자 지휘관이 바로 성전 기사단 출신의 알바레스 페레이라였다.


[[파일:3.아르톨레우스 전투.png|프레임|아르톨레우스 전투]]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본래 벨베스 군과 함께 라고스로 진격해야 했지만 무능한 제국의 정치 상황에 실망한 경험이 있던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자신을 따르는 기병 300과 함께 코르테스에 투항했다.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본래 벨베스 군과 함께 라고스로 진격해야 했지만 무능한 제국의 정치 상황에 실망한 경험이 있던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자신을 따르는 기병 300과 함께 코르테스에 투항했다.
그리하여 친 제국 세력의 벨베스 군과 페레이라가 이끄는 코르테스 민병대는 자그만한 자유민 마을인 톨레이스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친 제국 세력의 벨베스 군과 페레이라가 이끄는 코르테스 민병대는 자그만한 자유민 마을인 톨레이스에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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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보아 봉쇄===
===리스보아 봉쇄===
[[파일:4.리스보아 봉쇄.png|프레임|리스보아 봉쇄]]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포르투나 왕국이 승리 하였다고 한들 포르투나 왕국의 수도이자 아폰수 1세가 있는 리스보아는 여전히 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봉쇄 되어 있었다.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포르투나 왕국이 승리 하였다고 한들 포르투나 왕국의 수도이자 아폰수 1세가 있는 리스보아는 여전히 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봉쇄 되어 있었다.



2023년 1월 14일 (토) 01:48 판


개요

포르투나 왕국의 건국을 계기로 발생한 내전.

이 내전 이후 포르투나 제도 내에서 장원의 영향력은 완전히 붕괴 되었고 자유민이 주축이 되는 코르테스가 포르투나 제도의 정치 중심이 된다.

전개

내전 이전

바다늑대시대 이전

포르투나 왕국은 본래 신성 루멘 제국의 일원으로 항해 기사단, 일명 포르투나 기사단이 총괄하는 기사단령이었다. 이들은 언제나 제국에게 충성 하였으며 작센 왕실과 교황청 또한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늑대시대가 시작되고 북방의 해적들이 남하하자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해적들의 남하를 포르투나 기사단의 책임으로 돌렸다.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건국 황제 오토 1세께서 항해 기사단을 창립 계기로 천명한 북방에 대한 수호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했다. 포르투나 기사단은 작센 왕실과 교황청의 지원 없이는 북방 수호가 불가능하다고 호소 하였다.

고트란트 할양

그럼에도 작센 왕실과 교황청은 끝내 지원을 주지 않았고 포르투나 기사단은 결국 북방의 해적들과 협상을 벌여 고트란트를 할양하고 포르투나 제도의 안전을 보호 받았다.

이 협상을 이교도와의 타협으로 본 교황청은 포르투나 기사단을 파문 시켰고 이에 대해 포르투나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포르투나 제도 제 2의 도시이자 자유민의 도시 라고스에서 코르테스를 개최하여 대표들의 만장일치 하에 포르투나 왕국의 1대 국왕 아폰수 1세로 즉위한다.

아톨레이로스 전투

내전 발발

코르테스가 소집되어 포르투나 왕국이 건국되던 한편 포르투나 왕국에 반대하는 친 제국주의자들은 브리튼의 성직자 장원이자 제 3의 도시인 포르투에 모여 봉기를 준비했다. 아폰수 1세가 라고스에서 포르투나 왕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뒤 아폰수 1세는 곧장 포르투나 제도 제 1의 도시이자 포르투나 기사단의 본거지인 리스보아로 귀환했다. 라고스와는 다른 섬에 위치한 리스보아가 언제 친 제국주의자들에게 침공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친 제국 세력이 노리던 것이었다. 아폰수 1세가 리스보아로 귀환하자 친 제국주의자들은 봉기를 일으키고 리스보아를 봉쇄했다. 이로 인해 라고스의 코르테스와 리스보아의 코르테스 간의 연락망이 끊기고 라고스의 코르테스는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이베리아의 친 제국 세력인 벨베스는 성전 기사단과 함께 코르테스가 소집 되어있는 라고스를 침공하기 위해 군을 진군 시켰다. 이를 막기 위해 코르테스는 민병대를 구성했고 이 민병대에 참여한 기사이자 지휘관이 바로 성전 기사단 출신의 알바레스 페레이라였다.

아르톨레우스 전투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본래 벨베스 군과 함께 라고스로 진격해야 했지만 무능한 제국의 정치 상황에 실망한 경험이 있던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자신을 따르는 기병 300과 함께 코르테스에 투항했다. 그리하여 친 제국 세력의 벨베스 군과 페레이라가 이끄는 코르테스 민병대는 자그만한 자유민 마을인 톨레이스에서 만나게 된다. 수적 우위를 자랑하는 벨베스 군은 민병대에게 항복을 요구 했으나 페레이라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수적으로는 우세하나 대부분의 병력이 기병 뿐인 적군의 상황을 고려해 오늘날에서는 대기병 전략으로 널리 사용되는 사각 대형을 구성해 벨베스 군과 전투를 벌인다. 다만 당시에는 이 사각 대형이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실제 전투에서 이것이 활용된 적은 없었다.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당시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사각 대형 전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아톨레이로스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도 대기병 전술로 승리를 거둔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훗날 대기병 전술의 천재, 기병의 공포, 보병에게 내려온 기적 등으로 불리운다.

리스보아 봉쇄

리스보아 봉쇄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포르투나 왕국이 승리 하였다고 한들 포르투나 왕국의 수도이자 아폰수 1세가 있는 리스보아는 여전히 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봉쇄 되어 있었다.

알주바로타 전투

포르투나 왕국의 반격

친 제국주의자들의 분열

내전 종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