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산티아나 설정}} '''헤르티가스 쿠데타 모의 사건'''({{llang|es|Trama Golpista de Herthagas}})은 1858년 [[산티아나]]의 [[산티아나 동방 공화국|과도 공화정]](República de Transición) 시기에 발생했던 [[쿠데타]] 음모였으며, 극단적 [[연방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합세하여 [[리베라 당]](Partido Rivera)과 [[산티아나의 국가의장|국가의장]]을 비롯한 과도 위원회(Comité de Transición)를 붕괴시키고 [[산티아나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l del San Tiana)을 수립하려고 했던 비합법적 정권 탈취 행위였다. 위 사건을 주도 했던 인물이 당시 [[산티아나 의용군]](Ejército voluntario de la San Tiana)의 지휘관이자 [[공화주의자]]였던 [[조엘 프란도 헤르티가스]](Joel Frando Herthagas)였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해당 사건을 명명하고 있다. ==배경== 당시 산티아나는 [[연방주의]]에 입각한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지향하던 [[시스에르타 당]](聯邦黨)과 [[절대왕정]]을 주장하던 내부의 "로드베이츠 파"(Lordvehiz Club)를 몰아내고 사실상의 주류를 차지했던 [[왕당파]](Partido Reino)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대충돌]](Estupendo Conflicto)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José Oribe De Tiana)의 존재로 이들간의 표면적 대립이 내전을 방불케 하는 수준까지 극단화에 치뤄지지 않았으나, 1850년대 이후로 정계 대립을 조율하던 국민적 지지자들이 하나 둘 잃어 구심점이 사라짐에 따라 이들간의 극단적 행위를 제지할 수 있는 이들이 없었고, 특히 당시 [[연방주의]]에 입각한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던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가 새로운 [[산티아나의 국가의장|국가의장]]으로 선출됨에 따라 [[왕당파]]의 위세는 순식간에 약화되었고, [[시스에르타 당]]의 국민적 지지도는 반등하였다. 이에 일부 극단적 [[연방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민심과 당시 시대적 상황에 편승하여 [[왕당파]]들을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사건을 일으킬 준비를 계획하게 되었는데, 이를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조엘 프란도 헤르티가스]]였다. [[연방주의자]]였음에도 [[리베라 당]] 소속이었던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Louis Vázquez De Sanguinetti) 국가의장은 온건노선을 바탕으로 이념적 대립을 최소화 하는 방편에서 이들 정치적 권한을 평등하게 분배하였기에 해당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에 조엘 프란도 헤르티가스도 [[산티아나 의용군|의용군]]의 소속 사병에서 지휘관으로 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쿠데타 모의와 실패== [[파일:Joel Frando Herthagas.jpg|150px|섬네일|오른쪽|<small>'''헤르티가스의 모습'''</small>]] 조엘 프란도 헤르티가스는 휘하의 의용병들을 모아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을<ref>[[연방주의]]에 입각한 공화정 수립을 주장한 [[시스에르타 당]] 출신의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의 집권기에도 정권을 전복하려는 행동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오가고 있으나, 극단적인 공화주의자였던 그에게 있어서 [[군주주의]]를 주장한 [[리베라 당]]에게 있어서도 어느정도의 온정적 태도를 보인 그의 정권이 연방 공화국 수립를 퇴색할까 두려운 나머지 저질렀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ref> 세우기 시작했으나, 당시 오합지졸로 구성된 [[의용병]]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이들 내에서도 동부 출신과 서부 출신간의 갈등이 극심하였다. 결국 휘하의 병력만으로 전복시키는데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헤르티가스는 다른 지휘관들과 [[사상가]]들을 포섭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헤르티가스의 미심쩍은 행동을 눈여겨 보던 [[베난시오 로페스]](Benansio Lopez)는 비밀리에 그와 접선하였고, 이에 헤르티가스는 다른 [[연방주의자]]들과 함께 정권을 전복할 쿠데타 인원을 찾고 있다며 가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형식상으로 로페스가 참여하기로 했으나 실상은 [[군주주의자]]였던 그에게 헤르티가스의 쿠데타 모의는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8월 13일, 과도평의회의 요청을 받은 의용군과 공안관들이 헤르티가스와 그에게 협조하던 일부 극단적 연방주의자들 8명을 체포하여 당시의 임시 수도였던 [[리베네그로]](Rivenegro)로 압송하였으며, 9월 4일에 총살형이 선고되어 처형되었다. ==결과와 영향== 쿠데타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나, 대중에게 있어서 '''일개 [[군부]]의 하급 [[사령관]]이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했다는 점'''<ref>이러한 민중의 인식은 [[중남미]]에서 굉장히 특이한 편인데, 중남미 국가 중 [[코스타리카]]와 [[멕시코]]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른바 훈타(Junta)라는 군부 지도부를 지칭하는 용어를 미국 영어권에 정착시켰으며, 1945년부터 1960년까지 30명이 넘는 지도자들이 쿠데타로 축출되는 등 군부의 위세가 굉장히 강한 곳이다.</ref>에서 경악하였고 이에 분노한 민중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제출하려고까지 했으며, 이에 [[시스에리타 당]]이 지지도가 절멸한 위기에 처하자, 당시 국가의장을 역임하던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는 곧바로 사임서를 제출하여 위기를 무마하려는데 기울였다. 지금도 그는 유일한 [[연방주의자]] 출신의 국가의장이자 최단임 국가의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리베라 당]]과 [[왕정파]]가 도리어 이번에 지지도가 반등하게 됨에 따라 따라 더욱 노골적인 [[군주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발판을 다지는 역할을 했고, 이후 1860년대에 [[멕시코 제2 제국]]에서 망명한 [[막시밀리아노 1세]]를 새로운 [[산티아나의 군주|국왕]]으로 옹립하면서 군주국을 수립하는데 주요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각주== {{각주}} 헤르티가스 쿠데타 모의 사건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