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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
1938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 (現 [[치요다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본적지는 구마모토현이었다.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에 입사해 5년간의 짧은 정치 기자 생활을 마치고 68년 퇴사했다. 퇴사 직전 소위 김희로 사건을 심층 취재하면서 재일 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1969년 그는 처음엔 [[일본 사회당]] 당수 [[마츠마에 시게요시]]를 통해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일본은 보수의 자민당과 진보의 사회당이란 양강 구도로 정치를 꾸려갔었다. 그러나 결국은 무소속으로 자기 본적지인 [[구마모토현 제1구]] 중의원에 출마했다. 이유는 자신이 사회당보단 보수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서였단다. 같은 지역구에 [[후지사키 히사오]]라고 사회당도 후보를 냈다. 안 그래도 자민당이 센데 표까지 갈라먹은 셈. 당연 낙선.
출마 당시 그의 아버지 모리사다는 '정치라니 그딴 야쿠자들이 하는 짓을 니가 하려느냐'며 말렸다고. 후일 그의 친동생 고노에 타다테루는 그 일로 [[문예춘추]] 인터뷰에서 독자들을 웃겼다고. "아니, 우리 집안 장손이면 뭘해요, 공주랑 결혼한 저보다도 인지도가 없었는데." 유머 감각은 집안 내력인 모양. 그래서인지 낙선이야 했지만 그가 집집마다 방문한 동네는 이상하게 득표를 많이 했다고.
결국은 1971년 자민당에 입당해 참의원 선거에 나선다. 극우 작가 겸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지원 유세를 받는 등, 역시 너도 별 수 없구나 소리를 들었지만 자민당 내 중도좌파였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계파로 들어간다. 소위 칠일회 혹은 목요 구락부라 불렸던 모임을 통해 중의원만 40명인 자민당내 대형 파벌을 형성하면서, 좌장인 다나카 가쿠에이가 1972년 총리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 내각관방장관 ===
=== 내각관방장관 ===
=== 총무대신 ===
=== 총무대신 ===
=== 재무대신 ===
=== 재무대신 ===
=== 내각 사퇴 이후 ===
=== 내각 사퇴 이후 ===
== 소속 정당 ==
== 소속 정당 ==
== 선거 이력 ==
== 선거 이력 ==

2020년 12월 30일 (수) 13:54 판

Communist 1968, 2020 - 2021 |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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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의원 (구마모토 1구)
소선거구제 시행 제41 - 49대
호소카와 모리히로
현직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역임 지위

입헌민주당 지도부
최고결정기구
양원 의원 총회장 아라이 사토시 의원 사회장 요코미쓰 가쓰히코
중앙당 지도부
대표 하카다 쓰미오 대표 대행 에다 겐지
부대표 (참) 모리 유코 부대표 (중) 에다노 유키오
당무집행기구
간사장 키고 미즈카쿠 간사장 대행 쓰지모토 기요미
간사장 대리 기노시타 한카이 간사 차장 아오야기 요이치로
정무조사회
정무조사회장 이즈미 겐타 정조회장 대리 분카 토라로
국회 조직
국회대책위원장 나가카와 아리아케 국회대책위원장 대리 아즈미 준
고문
최고 고문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호소카와 모리히로
상임 고문 오카다 가쓰야
스모모 우미사키
가이에다 반리
역대 입헌민주당 대표
일본제국 제56대 내각관방장관
일본제국 제13대 총무대신
일본제국 제15대 재무대신
細川護煕
호소카와 모리히로
출생
1938년 1월 14일 (82세)
일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현직
입헌민주당 최고 고문
제49대 일본 중의원 의원
재임 기간
제15대 재무대신
2008년 6월 1일 - 2012년 8월 11일
제13대 총무대신
2006년 7월 1일 - 2008년 5월 30일
제56대 내각관방장관
1995년 11월 4일 - 1996년 3월 1일
가족
부친 호소카와 모리사다
모친 호소카와 아쓰코
배우자 호소카와 가요코
아들 호소카와 모리미쓰[1]
학력
조치대학 (법학부 / 학사)
신체
176cm, O형
의원 선수
14
의원 대수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지역구
구마모토현 제1구
소속 정당
약력
구마모토 현지사
일본신당 대표
제56대 일본 내각관방장관
프롬 파이브 당수
제13대 일본 총무대신
내각 특명부대신
입헌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입헌민주당 최고 고문

개요

일본의 기자 출신 정치인. 1990년대 자민당을 탈당하고 일본신당을 창당, 8당 연정을 통해 '55년 체제'를 무너트린 인물이다. 1995년 당시 유력 총리 후보로 꼽혔지만 신생당도요타 다이쥬에 밀려 결국 총리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프롬 파이브, 국민신당 등을 거쳐 일본 정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진화할 소방수로 투입되어 4년간 재무장관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현재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인 모테기 도시미쓰, 에다노 유키오, 고이케 유리코, 아즈미 준, 마에하라 세이지 등을 영입해 명실상부한 야권 내의 최고참 인사이다.

생애

1938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 (現 치요다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본적지는 구마모토현이었다.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에 입사해 5년간의 짧은 정치 기자 생활을 마치고 68년 퇴사했다. 퇴사 직전 소위 김희로 사건을 심층 취재하면서 재일 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1969년 그는 처음엔 일본 사회당 당수 마츠마에 시게요시를 통해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일본은 보수의 자민당과 진보의 사회당이란 양강 구도로 정치를 꾸려갔었다. 그러나 결국은 무소속으로 자기 본적지인 구마모토현 제1구 중의원에 출마했다. 이유는 자신이 사회당보단 보수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서였단다. 같은 지역구에 후지사키 히사오라고 사회당도 후보를 냈다. 안 그래도 자민당이 센데 표까지 갈라먹은 셈. 당연 낙선.

출마 당시 그의 아버지 모리사다는 '정치라니 그딴 야쿠자들이 하는 짓을 니가 하려느냐'며 말렸다고. 후일 그의 친동생 고노에 타다테루는 그 일로 문예춘추 인터뷰에서 독자들을 웃겼다고. "아니, 우리 집안 장손이면 뭘해요, 공주랑 결혼한 저보다도 인지도가 없었는데." 유머 감각은 집안 내력인 모양. 그래서인지 낙선이야 했지만 그가 집집마다 방문한 동네는 이상하게 득표를 많이 했다고.

결국은 1971년 자민당에 입당해 참의원 선거에 나선다. 극우 작가 겸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지원 유세를 받는 등, 역시 너도 별 수 없구나 소리를 들었지만 자민당 내 중도좌파였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계파로 들어간다. 소위 칠일회 혹은 목요 구락부라 불렸던 모임을 통해 중의원만 40명인 자민당내 대형 파벌을 형성하면서, 좌장인 다나카 가쿠에이가 1972년 총리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내각관방장관

총무대신

재무대신

내각 사퇴 이후

소속 정당

선거 이력

여담

둘러보기

틀:제49대 일본 중의원/규슈-오키나와

각주

  1. 現 호소카와 가문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