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산티아나 설정}} {{총리 정보 |이름 =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 |원래 이름 = Julio Eduardo Ximenes |명칭 = 국가의장 |그림 = Julio Eduardo Ximenes.jpg |크기 = |설명 = <small>'''1790년대의 모습'''</small> |국가 = 산티아나 |국기 연도 = |대수 = 3 |취임일 = 1857년 10월 11일 |퇴임일 = 1858년 9월 9일 |대통령 = |군주 = |국적 = {{국기|산티아나}} |출생일 = [[1774년]] [[4월]] [[10일]] |출생지 = {{국기그림|스페인}} [[스페인]] [[시스살레라테]] |거주지 = |사망일 = [[1866년]] [[10월]] [[25일]] |사망지 = {{국기|산티아나}} [[리베네그로]] |정당 = [[시스에르타 당]] |학력 = |종교 = |배우자 = |자녀 = |부모 = |서명 = |전임 =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 |전임대수 = 2 |후임 = 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 |후임대수 = 4 |웹사이트 = }}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llang|es|Julio Eduardo Ximenes}})는 [[산티아나]]의 독립 혁명가이자 사상가, 정치인이다. [[산티아나 동방 공화국|과도 공화정]](Comité de Transición) 시기의 유일한 [[시스에르타 당]](聯邦黨) 출신 [[산티아나의 국가의장|국가의장]]이었다. 그는 [[연방주의]]에 입각한 공화정 수립을 주장했으나, [[헤르티가스 쿠데타 모의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으며 이후에도 정치력을 유지하여<ref>그의 영향력은 [[시스에르타 당]]의 거두인 [[니콜라스 안토니오 히로]](Nicolás Antonio Hiro)의 뒤를 이은 1인자에 해당했으며, 실제로도 후임 의장인 [[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의 정책을 시종일관 비판하고 제재하는데 나섰다.</ref> [[파라과이 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 당시에는 [[반전 운동]](Anti-war movement)을 이끌었으나 [[로데베술 학살]](Massacre of Lodevesul)이 발생하자 지지도를 잃고 정계에서 퇴출되었으며, 1866년에 숨을 거두었다. ==일생== 1774년, [[시스살레라테]]에서 출생한 그는 아버지를 따라 14살의 [[영국]]과 [[프랑스]]로 건너가 사상 교육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입헌 사회]]에 입각한 군주 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왕당파]](Partido Reino)에 가까운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La Révolution française)와 [[프랑스 제1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의 수립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고, 특히 [[미국]] 사회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면서 점차 [[공화주의]]에 입각한 자유로운 사회를 수립코자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796년에 귀국하였으며 [[동방 연합]](La Unión Oriental) 수립 과정에서 연합 위원장 직책을 맡았으나, [[아르헨티나]]의 암묵적 동의하에 이루어진 [[포르투갈군]]의 침략으로 연합이 몰락하면서 자취를 일시적으로 감추었다가 1822년부터 [[애국 연대]](De la Independencia)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계몽 교육을 통한 [[스페인|타]][[브라질 제국|국]]의 압재를 받지 않는 자유 평등 사회 구축에 나설 것을 논파하고 다녔다. 이후 1825년에 [[우루과이-산티아나 독립 전쟁]](Cisplatine-Ciscalerate War)이 발발하자 51세의 고령의 나이를 이끌고 전장에 참가하였으며, [[에두안시아 전투]](Battle of Eduansia)에서 [[호세 오리베 데 티아나]](José Oribe De Tiana)와 함께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종결되자 1828년부터 1830년까지 수립되었던 임시 과도 정부에서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산티아나 동방 공화국|과도 공화정]](República de Transición)이 수립되자 [[시스에르타 당]]에서 [[니콜라스 안토니오 히로]]와 함께 연방제 공화정 수립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845년, 시스에르타 당의 거두였던 [[니콜라스 안토니오 히로]]가 [[대충돌]](Estupendo Conflicto)의 후유증으로 급사하자 그가 새로운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리베라 당]](王政黨)의 일당 독재 체제와 [[군주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도하던 시스에르타 당의 위세는 당시 [[리베라 당]]을 압도했을 정도였으며,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Louis Vázquez De Sanguinetti)의 허울뿐인 면직물 육성 정책을 비판하고 식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소수 엘리트 특권 계층<ref>특히 브라질의 영향을 받아 일종의 [[플랜테이션]](Plantation)과 같은 대농장이나 목축산업 형성되었던 동부 지방과 [[팜파스 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ref>의 농산물 수출 경제의 구조를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1757년, [[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가 숨을 거두자 최대의 위세를 발휘하던 [[시스에르타 당]]은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를 [[산티아나의 국가의장|국가의장]]으로 선출코자 했고, 마침내 제3대 국가의장으로 취임하는 영예를 가졌다. 그는 [[미국]]과 같은 연방 공화정의 수립을 염두하면서 기존의 엘리트 계층을 겨냥하는 경제 정책을 통해 연안 교역을 축소하고 상설 무역 시장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국가적 기반 시설이 전무했던 당시에 경제적 타격을 입혔고 설상가상 [[헤르티가스 쿠데타 모의 사건]](Trama Golpista de Herthagas)이 발생하자 민심은 흉흉해졌고 지지도는 폭락하였다. 결국 민심을 다독일 여력이 없었던 그는 1858년 9월 9일에 사임을 발표하였으며, 4대 국가의장으로 [[왕당파]](Partido Reino)의 [[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치력을 잃지 않았던 그는 시종일관 과도 정부의 비판책을 내놓았으며 [[파라과이 전쟁]](Guerra de la Triple Alianza)이 발발하자 산티아나는 중립을 택하여 국체를 보존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전쟁의 참전을 종용하는 이들은 악마들"이라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파라과이]]가 [[브라질]]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이유로 [[로데베술]](Lodevesul)로 군사를 이끌고 [[로데베술 학살|해당 주민들을 학살하는 일이 발생]]하자, 극에 달한 민중들은 파라과이를 공격할 것을 결의했고 이는 과도위원회에 승인으로 정식적인 참전국이 되었다. 반전을 주장하던 그와 [[시스에르타 당]]은 이후로 민심과 지지도를 완벽히 잃고 정계에서 퇴출되었으며 1866년에 그는 [[리베네그로]](Rivenegro)에서 고령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각주== {{각주}} {{전임후임| 직책=[[산티아나의 국가의장]]| 전임자=[[루이스 바스케스 데 상기네티]]| 임기= [[1857년]] [[10월 11일]] ~ [[1858년]] [[9월 9일]]| 후임자=[[마누엘 에스바다 코르다노]]| }} {{역대 산티아나 국가의장}} 훌리오 에두아르도 시메네스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