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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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련 총파업 ==
== 대련 총파업 ==
1918년 12월 10일, 대련 항구 노동자들이 선주와 선박회사에 대항해 총파업을 일으킨다. 이 항구 노동자들은 대한공산당에 속해있지 않았고 또한 동공연에 의해 계획된 총파업은 아니었다. 항구 노동자들이 선박회사의 지나치게 낮은 저임금과 선상에서의 부당대우로 인해 총파업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이 소식이 동공연에게 전해지자 대한공산당은 혁명 개시를 결의하고 산하 노동조합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요청한다.<br>
1918년 12월 10일, 대련 항구 노동자들이 선주와 선박회사에 대항해 총파업을 일으킨다. 이 항구 노동자들은 대한공산당에 속해있지 않았고 또한 동공연에 의해 계획된 총파업은 아니었다. 항구 노동자들이 선박회사의 지나치게 낮은 저임금과 선상에서의 부당대우로 인해 총파업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이 소식이 동공연에게 전해지자 대한공산당은 혁명 개시를 결의하고 산하 노동조합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요청한다.<br>
이에 11일 할빈에서 면직물 공장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고 뒤이어 31개 공장 노동자들이 이에 참여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으며 그주 주말인 15일에는 전국 600여개 공장과 300여곳의 농장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br>
이에 11일 할빈에서 면직물 공장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고 뒤이어 31개 공장 노동자들이 이에 참여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으며 그주 주말인 15일에는 전국 800여개 공장과 500여곳의 농장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br>
한국 정부는 대련 총파업을 우선적으로 진압하려 하였으나 예상치 못하게 거대한
한국 정부는 대련 총파업을 우선적으로 진압하려 하였으나 예상치 못하게 거대한 규모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당황했고 결국 할빈, 심양, 대련, 인천, 대구, 원산 6개 도시의 총파업을 집중적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본보기로 대도시의 총파업을 진압하게 되면 다른 곳의

2020년 5월 17일 (일) 00:00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작금의 만국 공산패당의 준동은 마치 서방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퍼졌던 것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오. 공산주의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믿음이 되었고 신앙이 되었소. 이를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욱 퍼져나가고 옛 불란서에서 그러했듯이 우리는 종시 목이 잘려서 저잣거리에 나뒹굴게 될거요.
- 서재필, 1919년 정초 이완용에게 보내는 서신 中

무지한 자들은 이 공산주의라는 물건이 과거의 서학과 같아서 실의와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유혹하는 사교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고치자는 열정적 행동주의와 그 인본주의적 매력에 빠지지 않을 자 누가있단 말인가?
- 박헌영, <12.10 혁명 평론>(1941) 중에서

12.10 운동 / 12.10 혁명
Decemder 10th Movement
十二十事件
十二十共產运动


날짜
1918년 12월 10일 ~ 1919년 8월 9일(한국)
1918년 12월 10일 ~ 1920년 1월 3일(중국)
지역
대한국, 일본 제국 전역
중국 베이징, 허베이성, 상하이, 광둥성 일대
원인
동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 노동자 착취 심화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중국 소외
충돌 세력
정부
혁명파
대한국 정부
일본 제국 정부
동아시아공산당연합
대한공산당
중국 공산당
일본사회투쟁회
대한농민단결연맹
주요인물
정부
혁명파
양종 소황제
이완용
서재필
다이쇼 덴노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남공선
마천룡
천두슈
리다자오
루쉰
후스
고토쿠 슈스이
기타 잇키
결과 및 영향
대한공산당의 전술적 실패, 전략적 성공
한국 정부의 토지개혁 실시, 노동자권리법 제정
사회당 창건에 영향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 절멸
중국 국민당 창건에 영향, 중국 통일 운동 가속화
서유럽의 공산주의 운동 확산
미국의 노동운동 재점화

개요

1918년 12월 10일부터 1920년 초까지 이어지며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들고 동아시아 각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공산주의 노동쟁의 및 무력투쟁.

러시아 혁명의 뒤를 이어 일어났고 한국과 일본같은 당대 동아시아의 굵직한 제국주의 공업 국가들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들어 서유럽 공산주의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농민 봉기 또한 조명되어 당시 서방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이론에서 공산주의 혁명 주체세력을 무산계급 노동자에서 가난한 농민까지 확장시켰으며 각국의 사회적 특징에 따라 혁명 주체 세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장기적으로 한국은 이때부터 노동자 권리등을 인정하고 과거의 여전론등을 꺼내와 ‘균등한 농지 분배’, ‘유상매수 무상분배’,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으며 사회민주주의의 태동이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완전히 괴멸되어 이후 군국주의 국가로 폭주한뒤 동아시아 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같은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던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길을 걸으며 분기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결과적으로는 동아시아공산당연합(동공연)의 궁극적 목적인 동아시아 3국의 공산화와 하나의 국가로의 단결은 실패했지만 한국 정부는 기업 정책과 식민주의 정책을 대거 수정하고 시민국민주의등 여러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피지배 계층까지 평등하게 대우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사민주의 국가로의 이행이 일어나게 되었다.

배경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공장 노동자들은 물론 농업계에서도 소작농의 수가 급증했으나 그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서유럽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이미 금지된 아동노동도 서슴없이 이루어졌으며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과로와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다. 게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한국과 일본은 각종 군수품들을 수출하기 위해 기업들은 더 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하였고 1차 세계대전 말엽에는 국가의 부는 커졌으나 부의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울러 한국에서는 1900년대 들어서 신영토(만주, 몽골, 내몽골, 북강 일대)의 농지를 개척농에게 나눠주기 보다는 지주들이나 기업에게 우선적으로 개간권을 판매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소작농을 고용하여 농업노동자라는 독특한 직업계층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당연히 소작농들에게 돌아오는 농업 생산량은 매우 적었고 결국 이들은 인근 도시의 공장으로 떠나거나 어린아이까지 온가족이 모두 노동에 시달렸다.
심지어는 참다랑어와 게등 고급 음식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원양어업까지 성행하기 시작하였고 다수의 어업노동자들까지 심각한 과로에 시달렸고 먼 바다에서 숨을 거두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1880년대부터 한국의 몇몇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본인들이 노동에 뛰어들어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보급하였고 다른 지식인들도 '민중 계몽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각종 언어나 역사등을 교육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직된 노동조합이나 농업노동자 조합등 여러 조합들이 활동해왔지만 정부의 극심한 탄압에 이런 조합들은 구심점이 없었고 좁은 지역 내에서 연대하는 선에서 그쳤다. 여러 대학의 사회주의 연구 모임도 조용하게 활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민권주의와 12.10 운동을 위한 민중 역량이 쌓여가는 시기였다.
1909년 대한공산당이 창당되자 전국의 노동조합들은 공산당 아래 대한노동자연합을 조직하여 노동자 처우 개선, 아동노동 금지, 소작농의 토지 직접 소유등을 정부에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오히려 무력으로 이들을 해산하려 한다. 이에 공산당도 혁명과 총파업등 노동쟁의라는 무력 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를 점해갔고 결국 1910년 무장봉기를 모의하나 여운형등 여러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사형을 언도받으며 공산당은 사실상 해산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공산당에 가입했던 전국의 조합들을 색출해내는데 실패하여 결국 '전국노동조합해산령'을 내려 기업이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사법기구가 이들을 처벌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러시아등지로 도피한 대한공산당의 일부 중책들은 그곳에서 공산당 내부기구를 정비하고 한국 국내 연락기구를 비밀리에 조직하였고 조합등도 다시 부활하지만 이전보다 더욱 극심한 정부의 탄압에 노동자들의 불만은 더욱 가중되었다.
한편 대한공산당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를 전파하였고 제국주의에 무너진 중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을 공산화 시켜 서로 연대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처음 상당수의 중국 지식인들은 이러한 대한공산당을 자신들의 땅이었던 곳을 빼앗은 나라의 앞잡이로 여겨 경계했으나 대한공산당의 열정적인 활동과 앞서 언급한 주장을 펼치자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왕정이 폐지되자 이에 고무된 대한공산당은 1918년 2월 한중일 3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동아시아공산당연합(동공연)을 창설, 3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모의한다.
한편 한국 정부는 혁명의 전조를 느끼고 각종 공업지대에 군경을 배치하여 이에 대비했다.

전개

대련 총파업

1918년 12월 10일, 대련 항구 노동자들이 선주와 선박회사에 대항해 총파업을 일으킨다. 이 항구 노동자들은 대한공산당에 속해있지 않았고 또한 동공연에 의해 계획된 총파업은 아니었다. 항구 노동자들이 선박회사의 지나치게 낮은 저임금과 선상에서의 부당대우로 인해 총파업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이 소식이 동공연에게 전해지자 대한공산당은 혁명 개시를 결의하고 산하 노동조합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요청한다.
이에 11일 할빈에서 면직물 공장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고 뒤이어 31개 공장 노동자들이 이에 참여하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으며 그주 주말인 15일에는 전국 800여개 공장과 500여곳의 농장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한국 정부는 대련 총파업을 우선적으로 진압하려 하였으나 예상치 못하게 거대한 규모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당황했고 결국 할빈, 심양, 대련, 인천, 대구, 원산 6개 도시의 총파업을 집중적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본보기로 대도시의 총파업을 진압하게 되면 다른 곳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