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군사 반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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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과정 ==
== 전개 과정 ==
본래 국민 정부를 지원하고 파리의 주도권 확보, 프랑스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고사령부측에서 움직인 것이지만 페탱의 생각은 전혀 달랐고 부정 부패와 군 기강 및 인민 지지도 하락, 약탈과 같은 무능 끝을 보여줬던 국민 정부를 대신해서 최고사령부와 군부가 공화국을 안정시키고 국민 정부를 해산시키기 위해, 각 최고사령관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음모했고 이후 파리를 장악하자마자 국민군 수뇌부를 전부 체포했으며 국민 정부의 중심이었던 드골을 제압하고 국민 정부와 연정하는 조건으로 국민군을 운용하며 협력을 받아내면서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본래 국민 정부를 지원하고 파리의 주도권 확보, 프랑스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고사령부측에서 움직인 것이지만 페탱의 생각은 전혀 달랐고 부정 부패와 군 기강 및 인민 지지도 하락, 약탈과 같은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국민 정부를 대신해서 최고사령부와 군부가 공화국을 안정시키고 국민 정부를 해산시키기 위해, 각 최고사령관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음모했고 이후 파리를 장악하자마자 국민군 수뇌부를 전부 체포했으며 국민 정부의 중심이었던 드골을 제압하고 국민 정부와 연정하는 조건으로 국민군을 운용하며 협력을 받아내면서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파리를 장악한 뒤 국민들에 의해서 운용되는 국민 정부가 아닌 권위주의적인 군부가 장악한 소식을 들은 여러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군사 독재를 부정하고 좌익 정당들을 포섭한뒤 파리 코뮌 정부를 선포했다. 코뮌 정부가 국민 정부나 군부 정권 보다 더 많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반정부 투쟁에 나섰으나, 코뮌의 민병대인 [[국민방위대 (민중의 왕)|국민방위대]]는 수도방위군보다 현저히 약했으며, 민병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게릴라 투쟁이나 바리케이트 뒤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것 뿐이었다. 이에 내부적 존속과 저항을 위해 [[공안위원회 (민중의 왕)|공안위원회]]를 설치하고 인민 재판을 열어 반혁명 분자들을 색출, 이내 파리를 탈출 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던 필리프 8세를 체포하고 사형 판결을 내리는 등 급진적인 행보를 보이며 항복하지않자 수도방위군은 시내에 전차를 통한 대대적인 소탕에 나섰고 이후 파리 코뮌 정부는 일주일 만에 제압되었다.
그러나, 파리를 장악한 뒤 국민들에 의해서 운용되는 국민 정부가 아닌 권위주의적인 군부가 장악한 소식을 들은 여러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군사 독재를 부정하고 좌익 정당들을 포섭한뒤 파리 코뮌 정부를 선포했다. 코뮌 정부가 국민 정부나 군부 정권 보다 더 많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반정부 투쟁에 나섰으나, 코뮌의 민병대인 [[국민방위대 (민중의 왕)|국민방위대]]는 수도방위군보다 현저히 약했으며, 민병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게릴라 투쟁이나 바리케이트 뒤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것 뿐이었다. 이에 내부적 존속과 저항을 위해 [[공안위원회 (민중의 왕)|공안위원회]]를 설치하고 인민 재판을 열어 반혁명 분자들을 색출, 이내 파리를 탈출 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던 필리프 8세를 체포하고 사형 판결을 내리는 등 급진적인 행보를 보이며 항복하지않자 수도방위군은 시내에 전차를 통한 대대적인 소탕에 나섰고 이후 파리 코뮌 정부는 일주일 만에 제압되었다.

2020년 3월 2일 (월) 23:16 판

파일:민중의 왕.png

8월 군사 반란
프랑스 혁명코뮌 폭동의 일부
파일:파리 사태.jpg
날짜1921년 8월 12일
장소프랑스 파리 전역
결과

필리프 페탱을 포함한 프랑스 최고사령부 군부 집단의 왕정 전복

교전국

프랑스 공화국 프랑스 국민 정부
프랑스 최고사령부 프랑스 최고사령부


공동교전국

파리 코뮌 파리 코뮌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지휘관

프랑스 최고사령부 필리프 페탱
프랑스 최고사령부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최고사령부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최고사령부 페르디낭 포슈
프랑스 공화국 샤를 드골
프랑스 공화국 조제프 조프르
프랑스 공화국 조제프 갈리에니
프랑스 공화국 프랑수아 아실 바젠


파리 코뮌 피에르 보스케
파리 코뮌 베르나르 피에르
프랑스 왕국 필리프 8세
프랑스 왕국 토마 로베르 뷔고
프랑스 왕국 그루시 후작 에마누엘
프랑스 왕국 클로드 빅토르
프랑스 왕국 니콜라 우디노
프랑스 왕국 루이 가브리엘 쉬셰
프랑스 왕국 오귀스트 마르몽

8월 군사 반란(프랑스어: Révolte militaire d'août)은 필리프 페텡을 주축으로 하여금 프랑스 최고사령부의 최고사령관 4인이 불법으로 수도방위군을 움직여 파리 전역을 점거한 사건이다. 파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코뮌 폭동을 진압했으며 프랑스 전역에 잔존하는 왕당파들을 군사재판을 통해 전부 제거함으로써 프랑스 왕국을 전복시키고 4인의 최고사령관의 프랑스 군부가 통치하는 8월 체제가 실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배경

앞서 유럽에 불어닥친 경제대공황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경제는 급속도로 감소하였고 날마다 인플레이션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며 인민들의 생활고는 극에 달했다. 이후 프랑스 왕국 의회에서 발의된 구제법의 법안이 국왕에의해 최종적으로 기각되면서 반정부 시위가 과격해졌고, 민중당 사건이 밝혀지자 이내 공화정을 주장하는 공화주의자,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의 코뮌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의 대혁명이 발발하자 임시적으로 프랑스 전역을 통치하기 위한 프랑스 국민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서 최고사령부가 움직였다.

전개 과정

본래 국민 정부를 지원하고 파리의 주도권 확보, 프랑스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고사령부측에서 움직인 것이지만 페탱의 생각은 전혀 달랐고 부정 부패와 군 기강 및 인민 지지도 하락, 약탈과 같은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국민 정부를 대신해서 최고사령부와 군부가 공화국을 안정시키고 국민 정부를 해산시키기 위해, 각 최고사령관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음모했고 이후 파리를 장악하자마자 국민군 수뇌부를 전부 체포했으며 국민 정부의 중심이었던 드골을 제압하고 국민 정부와 연정하는 조건으로 국민군을 운용하며 협력을 받아내면서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파리를 장악한 뒤 국민들에 의해서 운용되는 국민 정부가 아닌 권위주의적인 군부가 장악한 소식을 들은 여러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군사 독재를 부정하고 좌익 정당들을 포섭한뒤 파리 코뮌 정부를 선포했다. 코뮌 정부가 국민 정부나 군부 정권 보다 더 많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반정부 투쟁에 나섰으나, 코뮌의 민병대인 국민방위대는 수도방위군보다 현저히 약했으며, 민병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게릴라 투쟁이나 바리케이트 뒤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것 뿐이었다. 이에 내부적 존속과 저항을 위해 공안위원회를 설치하고 인민 재판을 열어 반혁명 분자들을 색출, 이내 파리를 탈출 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던 필리프 8세를 체포하고 사형 판결을 내리는 등 급진적인 행보를 보이며 항복하지않자 수도방위군은 시내에 전차를 통한 대대적인 소탕에 나섰고 이후 파리 코뮌 정부는 일주일 만에 제압되었다.

코뮌 정부의 왕가 말살

페탱의 군부 정권은 오를레앙 왕가를 교화시키고 프랑스를 빠르게 안정화 시키기 위한 선전용으로 삼으려 했다. 절대로 처형할 생각은 없었으나, 코뮌 정부가 필리프 8세는 물론이고 그 일가를 말살시키고 능욕한 뒤 하수도에 버리자 군부 정권과 국민 정부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외에도 파리 시장의 사지를 반토막내고 그것을 시내에 전시하는 등 코뮌 정부는 매우 과격했다.

반란 이후

군부 정권은 코뮌 정부까지 제압을 한뒤, 전국적인 안정화 작업에 돌입했다. 이때, 군부의 영향력이 강력해지자 일부 군에서는 최고사령부와 수도방위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지방을 장악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노르망디 모반 페탱이 대대적인 군부 숙청을 감행해 15명 가까이 되었던 비대한 원수진들을 모두 숙청하였다. 군부 정권에 협조 하지 않는 자는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 정부의 수장이었던 드골도 원수에서 해임당하고 군부 정권 내의 국방위원으로 이직되었다. 또한 군사 반란을 함께일으켰던 최고사령관인 레몽 푸앵카레는 험난한 시국에 민정 이양을 요청한 반란 분자라는 죄목으로 최고사령관에서 해임당하고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되기까지하였다. 같은 최고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는 암살당하였고 조르주 클레망소는 자진해 최고사령관 직책에서 퇴임했다.

8월 체제의 선포

군부 숙청을 성공적으로 감행한 페탱은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새로운 프랑스를 열기위해 과도 정부였던 군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통령 선거를 진행, 국방위원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4년제 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된 직후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 페탱을 저격하려다 실패하자(검은 일요일) 페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당과 국회를 해산, 새로운 헌법을 개정하여 종신 통령에 새롭게 취임하는 8월 체제가 전국적으로 선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