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江以南開発事業

개요

냉전 초기, 194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입안되어, 1952년 내지편입 이후 일본 정부의 주도로 본격화된 대일본제국게이조 간가와 이남의 평야지대(미나미가와)를 시가지로 개발하기 위해 1953년부터 1967년까지[1]진행된 대규모 사업.

1953년 4월 10일, 전격적으로 미나미가와 지역을 게이조부에 편입해, 가와미나미시, 마츠사카군, 미즈쿠사군, 가와히가시시, 아카가네군, 간가쿠군 등 2개시 4개 군을 전격 설치하고 이곳의 체계적 개발을 천명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게이조부의 면적도 크게 커지게 된다. 또한 당시 개통을 앞두고 있던 게이조 지하철의 노선도 연결토록 하였다.

이 사업은 장장 20년을 기한으로 두고 당시 갈대밭과 농지만 있던 농촌이었던 미나미가와 지역을 게이조시의 시역으로 편입해, 게이조부 내의 도쿄 시부야 수준의 대 시가지이자 부유 지역으로 만든다는 일종의 대 도시계획이었다.

당시 승전 이래로 조센반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을 시작하며 게이진 지역을 게이조시로 편입하고 기타가와 지역을 게이조부 부역에 편입하는 등 게이조를 공격적으로 확장하며 대게이조계획(大京城計画)이 진행되는 와중 미나미가와 평야지대에 주목한 정부의 고려에 따른 것이었다.

이 동안 조센의 농촌에서도 초가집을 허물고 일본식이나 양식 가옥을 짓고, 농업을 자동화하고 농촌에 교육을 보급, 일본어 보급하는 등의 내용인 신농촌운동(新農村運動)가 있었고, 여타 도시지역에서도 게이조와 흡사한 형태의 대대적 재개발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이 사업으로 조센반도의 경제적 중심지가 미나미가와로 이전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조테이쥬리 게이조시는 미나미가와, 게이진 지역에 점차로 밀려 행정적 중심지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전개

1940년, 현 다이지구 지역의 모습.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승리하고 나서, 1944년에 이미 인구 100만 명으로 제국 5대 도시에 들어섰던 게이조는 더욱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더군다나 승전 이후 참전병들이 대거 유입되며 1948년 조테이쥬리에만 인구가 168만 명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1940년, 1936년의 1차 대확장에 이어 제2차 게이조 대확장(第2次京城大拡張)을 단행하고 게이진 지역을 새로 편입하여 시역을 기존의 2배 가까이로 늘리고 생활공간의 트임을 기도했다.

이어 앞서 1948년에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서무과에서 미나미가와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가 최초로 제시되었다. 미나미가와의 평야는 당시 농촌지대에 불과했으나, 광활히 평야가 펼쳐진 특성상 개발의 가능상이 무한했다. 당시 본국 정부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1950년부터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내외일체로 조센과 다이완, 기타가라후토가 내지로 편입되게 되었다. 이때 폐도치현(廃道置県)을 통하여 조센에 도도부현 제도가 실시되었다.[2]

다만 게이조와 다이완의 다이호쿠는 그 상징성을 고려하여 현 대신 제국의 부로 승격되게 됐고, 게이조 도시계획의 공은 조선총독부에서 일본 중앙정부로 넘어간다.

이 외에 기타가와의 미아세 지역도 게이조부로 편입되면서, 게이조는 엄청난 확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애초부터 일정한 인구가 거주 중이었고,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게이조시의 인구를 많이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서 48년 조선총독부가 제시한 미나미가와 편입 및 개발이 떠오르게 된다. 당시 도쿄는 게이조의 영역이 서쪽으로, 북쪽으로도 확장되었으니 이번에는 남쪽의 평야지대로 확장하여 미나미가와 신시가지 조성으로 인구를 분산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고, 1952년 12월 26일 제국 건설성 휘하 국토청이 정식 정책으로 추진하게되었다.

1953년 4월 14일, 미나미가와를 게이조 부역에 편입하고 4군 2시를 새로 설치한다는 칙령이 공식으로 반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나미가와 편입 또는 최종적인 게이조부 부역이 확립된 제3차 게이조 대확장(第3次京城大拡張)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1950년대

1960년대: 완성

1970년대: 일본 최대의 시가지로

  1. 최대 시가지로의 팽창은 70년대에 이루어졌으나 공식적인 시가지 조성사업은 67년에 종료 선언됐다.
  2. 당연하지만 다이완의 경우 주제를 실시했기에 폐주치현(廃州置県)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