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신질서의 황혼)

Destiny634, 2024 - | CC-0


|-


제2차 세계 대전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
width=100%
기간 1939년 9월 1일 ~1947년 5월 3일[1]
장소 전세계
원인 파시즘의 확산
베르사유 조약의 불공정함
세계 대공황
교전국 연합국 추축국
미국[2]
영국
중화민국
프랑스[3]
자유프랑스[4]
소련[5]
그 외 기타 연합국들
대독일국
이탈리아 왕국
대일본제국[6]
그 외 기타 추축국들
지휘관 연합국 추축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조지 6세폐위
윈스턴 처칠
장제스
마오쩌둥
샤를 드 골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주코프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베니토 무솔리니
쇼와 덴노
도조 히데키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 외 기타 추축국들
결과 추축국의 승리, 연합국의 패망
영향
초강대국 미국, 독일, 일본 등장, 냉전 체제 대두
OFN, 아인하이츠팍트, 대동아공영권 개설
서구 식민제국의 몰락

개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또는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침공부터 1947년 지나사변의 종결까지 약 세계 각지에서 8~10년간 치뤄진 전쟁이다. 1939년 추축국이 일으키고 연합국이 맞서면서 1억명 이상의 민간인/군인이 숨졌고, 수많은 경제 기반 시설과 도시들이 파괴되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불린다. 또한 1990년대까지 세계 패권의 중심이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식민제국에서 미국과 독일, 일본 3극으로 옮겨간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배경

일본: 문민정부의 몰락과 대공황

대일본제국메이지 유신 이후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며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일청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섬을 얻고 일러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일가라후토조센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바쁘던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수출을 하여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오르며 경제적 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는 짧은 민주주의를 맞이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숨을 고르며 다시 생산력을 되찾자 유럽, 미국 등 서방에 비해 열등한 품질을 가진 일본의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올라선 일본 제국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20년간 이어져오던 영일동맹은 깨져버렸고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해군 규모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와중에 닥친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자 경제권인 수도권을 초토화시켜 일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의 쇼와공황과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덮치자 일본 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군부의 입김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층은 국민들의 불만 감정을 앞세워 정부에 대한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켰으며, 관동군은 민간 정부의 통제를 무시한 채 멋대로 날뛰며 만주를 침공하고 청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로 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일본은 산업은 크게 성장했으나 자체적으로 자원은 매우 부족해 해외의 수입으로부터 크게 의존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천연자원이 넘치는 만주의 점령은 일본의 생명줄로서 크게 지지 받았다,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세계의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하였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사실상 고립주의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급진파 장교들에게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가 되어 정당정치를 단절시키자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치를 장악해가던 군부는 크게 두가지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황도파로 이들은 일본의 모든 재벌, 기득권 등을 타파하고 쇼와 덴노에게 전권으로 주어 국가적인 개조를 실시하자는 일명 "쇼와 유신"을 주장하는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제파로 이들은 황도파의 주장에 크게 반대하며 자본주의입헌군주제의 유지-강화를 주장했었다.

황도파가 주장하던 쇼와 유신은 1930년대 극우 사상가들의 목표로, 일본의 부패한 기득권층을 처단하고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자는 매우 국가주의적 사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에 만연하던 빈부격차와 사회불안을 내면에 담고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 악화, 미국의 [이민법]과 동북역치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대폭 상실하는 등 대외상 불안전화로 말미암아 군부 급진 세력이나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한때 좋았던 시절 메이지 유신의 정신 부흥과 천황의 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대외적으로는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통제파는 이러한 황도파의 주장에 반대했다. 이들은 군의 문민통제가 존중되고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은 물론 소련과 중국에 대한 외교적 입장도 정반대로 대립했다. 암살 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이후 집권한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황도파는 통제파에 밀려 서서히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이로 인한 불만이 쌓이자 결국 1936년 2월 26일, 20대 청년 황도파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2.26 사건)

2.26 사건을 일어난 당시는 이미 황도파가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에 상당히 밀려난 때로, 항거한 황도파 장교들은 대게 20대의 소위부터 대위가 중심이 된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초기 도쿄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거하고 사이토 마코토[7], 다카하시 고레키요[8], 스즈키 간타로[9]등 일본 최고위층 인사들을 대거 습격해 대다수를 살해했다. 황도파의 최우선 목표였던 당시 현직 일본 총리인 오카다 게이스케는 겨우 이들을 피해 차량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쇼와 덴노가 황도파가 항거에 매우 격노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당황하던 천황이였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한 쇼와 덴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 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쇼와 덴노의 노여움을 초래하였다.[10] 2월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졌고, 쇼와 유신을 외치던 황도파는 순식간에 명분을 잃고 혼란에 빠져 일부는 자결을 시도했다. 다음날 군부는 병력 2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육군 뿐만 아니라 해군 또한 해군 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살해 당한 것에 분노해 함대를 끌고와 진압에 참여했다.[11]

결국 황도파는 투항하기 시작했다. 2월 29일 오후 2시 무렵 병사들과 하사관들이 먼저 투항했고 오후 5시에는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와 고노 히사시 대위가 자결했다.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파면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현역 총리 암살 사건이었던 5.15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으므로 이들도 그와 비슷한 처분을 기대했으나 앞서와 달리 천황의 이름을 팔아먹은 데다 단순 테러 수준을 넘긴 본격적인 쿠데타였기에 중형이 선고됐다. 그 해 7월 쿠데타에 가담한 현역 육군 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천황 폐하 만세!(天皇陛下万歳!)"를 외치면서 총살되었다.

이렇게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완전히 자멸해버리자 일본 군부 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통제파는 세계의 열강 각국에서의 집산주의 대두, 대공황에 대해 효용성을 나타낸 블록 경제에 대한 선망이 나타나면서 당초의 결성 목적・본분으로부터 천천히 빗나가 합법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자신들과 맞지 않는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통수권 침범"을 방패로 공공연히 비협력적인 태도・행동을 취하는 군 파벌로 변해갔다. 이들을 근대적인 군비나 생산 기구의 정비에 근거하는 총력전에 대응한 고도국방국가를 구상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지나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한 일본은 아시아를 서구 열강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 정책에 기반하여 팽창주의, 군국주의적 행보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후 1940년 대독일국이탈리아 왕국과의 삼국 동맹 조약 체결로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

유럽: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지정학적 지도를 근본에서부터 뒤바꿔놓았다. 동맹국이 패배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사라지고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련이 수립되었다. 한편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루마니아, 그리스와 같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은 영토를 늘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국민 국가들이 등장했다.

미래에 있을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1919년 파리 강화회담 기간에 국제 연맹이 수립되었다. 국제 연맹의 목표는 집단안전보장, 육해군 군축, 평화적인 협상과 중재를 통한 국제 분쟁 해결로 무력 분쟁을 막는 일이었다.[1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강력한 평화주의적 정서가 퍼졌음에도 불구하고[13] 동시기 유럽 여러 국가에서 민족통일주의보복주의내셔널리즘이 대두되었다. 이런 정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에게 부과된 상당한 영토, 식민지, 재정적 손실이 다가오며 독일에 두드러지게 발생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자국 본토 영토의 13%와 모든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독일과 타국과의 합병도 금지되었으며 배상금이 부과되었고 독일군의 규모와 전쟁능력도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14]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해체하고 민주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간기 기간 새 공화국의 지지층과 이를 반대하는 우익좌익 강경 반대파가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전후 영토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대신 보장했던 여러 약속이 평화 협상에서 전혀 이행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은 내셔널리즘, 전체주의, 계급협조론적 의제를 가지고 대의민주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좌파,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며 이탈리아를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고 "신로마 제국"을 세우겠다는 공격적인 확장주의적 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이탈리아의 정권을 장악했다.[15]

파일:무솔리니와 히틀러.jpg
베니토 무솔리니(왼쪽)과 아돌프 히틀러(오른쪽)

아돌프 히틀러는 1923년 독일 정부 전복 시도는 실패하였으나 결국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라이히스탁(의회)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독일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인종주의적 배경을 가진 세계 질서의 전환을 부르짖으면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대규모 재무장에 들어갔다.[16] 한편 프랑스는 동맹국을 잡아두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가 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협정을 맺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두길 원했다. 1935년 초에는 자르 분지 지역이 합법적으로 독일과 병합되고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며 재무장 계획을 가속화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17]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935년 4월 군사 세계화의 중요한 단계를 밟고 있는 독일을 막기 위해 스트레사 전선을 결성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영국이 독일과 독자적인 해군 협정을 맺어 독일의 제한을 완화시켜 버렸다. 동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러는 독일을 우려한 소련은 프랑스에게 접근해 상호 원조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조약 발효 직전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국제 연맹의 관료제 체계를 거치도록 요구하면서 본질적인 조약 약속 자체가 무력화되었다.[18]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우려한 미국은 같은 해 8월 중립법을 제정했다.[19]

1936년 3월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주시켜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무력화시켰다.[20] 1936년 10월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로마-베를린 추축국을 결성했다. 한달 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에 서명했고 다음 해에는 이탈리아도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전개

만주사변과 나치 집권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 2만여 명이 상부의 통제를 무시한 채, 중국의 만주를 공격, 탈취한 것이었다.이는 1918년 유럽에서의 대전쟁이 끝난 이래로 15년도 지나지 않아 지구에 다시한번 드리운 전운이었다.

1933년,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졌고,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며 나치 정권이 들어섰다. 나치는 집권하자마자 독일 민족의 부흥을 외쳤고, 군대를 재건하고 전 유럽에 위협을 가하며 다시한번 유럽에 전운을 감돌게 했다.

지나 전쟁

1937년 7월 7일, 흔히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 부르는 중국과 일본의 접경지대 루거우차오에서 한 병사의 실수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던 전쟁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1937년 7월 29일,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되고 1937년 11월 상하이가, 1937년 12월에 난징이 함락되었고, 중국은 그대로 전쟁에서 패배할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충칭으로 후퇴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일본을 향한 처절한 저항의 기치를 1938년 1월, 들어올리게 됩니다.

고조

그러는 동안, 서방의 히틀러는 자신의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1936년,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비무장지대 라인란트를 무력화 시킨 그는, 1938년 2월, 오스트리아를 무혈 합병하며 "대독일"의 부활을 알렸다.

이어서 히틀러는 1938년 말 주데텐란트를 합병하고, 1939년 3월 체코를 병합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일본을 향한 중화민족의 처절한 저항이, 점차 일본의 발목을 잡아가고 있었다. 1938년 10월, 일본군은 수만명의 피로 우한을 함락했고, 이곳에는 피로 물든 일장기가 휘날렸다.

그리고 1938년 12월까지, 일본은 중국의 남방 해안을 공격하여, 중국의 해외 지원 루트를 차단함은 물론, 해양을 봉쇄하게 되었다.

동아시아가 점점 참화로 물들어갈 즈음, 유럽에서도 포성이 울렸다.

개전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독일군은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어 히틀러와 비밀 불가침 협정을 맺은 스탈린 역시 동쪽에서부터 폴란드를 공격했다. 1939년 9월 폴란드는 항복하였고,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며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1940년 5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장악한 독일은 프랑스를 향한 회심의 공세를 개시했고, 1940년 6월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점령하였고, 곧 프랑스 식민당국을 일본군 휘하로 격하시키며 이곳을 사실상 장악했다.

이에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그는 일본을 규탄하는 한편, 일본에 대한 제재까지 가하기 시작했다.

독소전쟁

1941년 5월 15일, 독일군은 전격적으로 소련과의 경계선을 넘었고, 독-소전쟁의 시작점이 울렸다.

대숙청으로 혼란의 도가니에 있던 소련 독일의 전격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1941년 8월에 모스크바가 함락되면서 사실상 소련은 붕괴했다.

모스크바가 함락되자, 일본군 또한 소련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극동을 침공했다.. 그리고 1942년 3월 21일, 레닌의 사망 18년이 되는 해 봄에, 소련은 짫은 역사를 끝마쳤다.

한편, 미국은 1941년 7월 더이상 참지 않고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했다. 석유의 80%를 미국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았고, 일본은 미국에게 제재를 풀어달라며 일본의 중국과 인도차이나 이익을 보장받는 쪽으로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고,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행위를 멈추기만을 요구했다. 결국 일본의 수상 도조 히데키와 천황 히로히토는 미국을 공격하기류 결정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1941년 12월 8일, 소련의 숨통이 거의 끊어져 가던 날, 일본 해군 항공대는 타이완에서 날아올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로 진격했다.

그리고 곧,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진주만은 일본의 공격을 받았고, 이와 함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주만공습의 결과는 그야말로 일본에게 쾌거였다. 일본은 3차례에 걸친 공격으로 미 항공모함 3척을 손실시켰으며, 항공기 320기를 파괴하고, 유류 저장고를 대파했다.

그렇게 미국은 일본에게 뜻밖의 일격을 당한 채,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9일 미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을 시작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하며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다.

1941년 12월 10일, 말레이 앞바다에서 일본 전투기들은 영국 해군의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망망대해의 태평양에 가라앉혔다.

이어 1942년 4월까지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해전과 실론 해전 등에서 서구 연합군의 함대를 대파하며, 전 동남아로 진출하였으며 홍콩과 마카오 등 서구 식민지도 점령했다.

진주만에서 회심의 타격을 입은 미국은, 비틀거리며 일본 해군이 태평양을 유린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1942년 6월, 일본군은 하와이의 미드웨이 제도를 점령하고, 장기적으로 하와이에 대한 통상파괴전 및 점령에 나서는 계획을 입안했다.

이미 수차례의 참패로 태평양 중부까지 밀려난 미군은, 미드웨이에서의 결전에 목숨을 걸었다. 항모 3척이 투입되는 등 무시할수 없는 전력이 미드웨이 제도로 집결했다.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연합함대 특유의 기동전을 발동하였고, 마침내 2일에 걸친 해전 끝에 그리고 1942년 6월 7일, 미드웨이 해전에서 투입된 미 항모 3척이 모두 침몰했고, 니미츠 제독은 전사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대승이었으며 이제 미국은 더이상 일본이 태평양을 유린하는 것을 막을 힘이 남지 않게 되었고, 1942년 8월, 하와이가 함락되었다. 일본은 이어서 1942년 8월부터 하와이를 요새화하는 한편, 호주와 뉴질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10월까지 마쳤다.

1942년 9월, 일본 연합함대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침공을 시도했으나 영미연합군의 방어가 탄탄하자 포기했고, 이어서 연합군은 호주와 뉴질랜드로 일괄 후퇴했다. 이곳의 영국군과 미군은 종전 시까지 일본에 농성했고, 1942년 11월 일본은 사실상 잔존 연합군을 오세아니아로 축출함으로서 태평양의 대한 압도적, 독점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서 연합군의 해군력은 1942년 11월까지 약 11개월간의 전투로 완전무결하게 궤멸되었다. 일본은 점령한 태평양 섬들의 요새화를 1942년 12월까지 마쳤고, 1943년 1월, 마침내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기 위한 임팔 작전이 승인되었다.

1943년 2월 15일, 일본군은 미얀마의 임팔지역을 넘어 영국령 인도에 들이닥쳤고, 당시 독일에게 본토가 유린당해 식민지에 신경쓸 겨를이 없던 영국 군대는 1943년 4월, 단 2개월만에 인도를 완전히 내주고 항복할수밖에 없었다.

1943년 5월, 막강한 생산력으로 해군력을 어느정도 재건한 미국은 일본을 향해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3년 6월 북동태평양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미 해군이 참패하며, 미국의 하와이 탈환은 먼 일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다시 한번 1943년 6월에 일본 해군을 케스케이디아 해전에서 격파하고, 이어 1944년까지 일본이 점령한 섬들에 지상군을 투입하여 축출하는 "도약 작전"을 벌이지만, 1944년 5월 과달카날에서 미 해병대 10만 명이 전멸한 과달카날 전투는 일본이 밀려가던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본은 1944년 6월부터 다시 연합함대의 총공격을 개시하고, 1944년 7월 콜론 해전에서 미 해군을 격멸하며 하와이를 사수했다.

전쟁의 피날레와 종전

한편 유럽에서 오래간 버티던 영국은 1944년 9월에 화염방사기 등을 내세운 저항에도 불구하고 본토가 함락되었다. 이후 영국은 독일의 괴뢰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은, 1944년 12월 베를린에서 독일이 일본의 승전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며 양국의 우호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미일간의 대치와 미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계속되던 1945년 7월 4일, 미국 플로리다의 잭슨빌에는 하켄크로이츠 문양을 한 독일 폭격기가 등장했다.

폭격기는 그대로 잭슨빌을 가격했고, 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은 14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독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서 1945년 7월 8일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한 필라델피아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약 2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항복을 선언했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공모함 아카기 갑판에서 맺어진 미일강화조약은 굴욕적이었다.

미국은 하와이를 비롯한 태평양의 속령들을 일본에 양도했고, 서부의 최대도시 샌프란시스코를 일본의 조차지로 내어주어야 했다.(일본령 상항) 또한 2000억 달러의 배상금이 독일과 일본에 지급되어 양국은 이를 800억 달러씩 나눠가졌다.[21]

이로서,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주인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은듯 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중국은, 1947년 9월 2일 , 일본군이 충칭을 함락시키고 한때 충징이었던 잔해 위에서 "아시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포함으로서 완전히 잿가루가 되었고,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다.

결과와 영향

약 8년이나 지속된 대전쟁의 승자는 추축국이었다. 연합국 중 국체를 유지나마 한 것은 미국과 독일에 항복하여 왕실을 보존한 영국 뿐이었고 프랑스, 중국, 소련 등은 해체되거나 괴뢰국화 되며 멸망했다.

전후, 독일과 일본은 승리하여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올라섰다. 두 나라는 각각 대동아공영권과 아인하이츠팍트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얻고 그를 기반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하며 매우 강대해졌다.

18세기부터 100년이 넘도록 시대를 풍미하던 서구 식민제국은 모두 붕괴 및 몰락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를 반납하고 독일의 종속국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이제 두 나라의 식민지들은 새로운 주인 일본과 독일로 넘어갔다.

그리고 세계는 다극 체제에서 미국 / 일본 / 독일 세 나라의 3극 체제로 전환되게 되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1947년부터 일본이 태평양 자결권 선언을 발표하고 대일본제국 붕괴에 이르는 1989년까지 이것이 이어졌다. 이를 바로 냉전(冷戦, Cold War)이라고 하는 시대이다.

대체로 현재 국제질서의 근간을 만들었다. 동남아의 국가들도 일단은 일본에 의해 독립됐던 것이며, 아프리카 대륙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된 경계가 대체로 그대로 이어졌다. 거기다 독일과 일본은 현재까지도 당시에 쌓아올린 국력으로 강력한 끝발을 가지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냉전 종료 후에도 다시는 세계 강대국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이 외에 콩고물을 얻어먹은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신흥 강국에 올라섰으며, 현재도 G7에 속할만큼 나름 강력하다.

러시아의 경우 이 전쟁으로 파괴된 뒤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는 단일 국가 자체가 해체를 맞이했다. 군벌 내전으로 인하여 황폐화된 러시아는 냉전 종식 이후엔 일본과 독일의 간섭에서 벗어났으나 분열된 채였다.

  1. 1945년 8월 15일에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이 종료되어 굵직한 전투는 끝났으나 아직 장개석 정권의 저항이 남았었다.
  2. 1941 ~ 1945
  3. ~ 1940
  4. 1940 ~ 1945
  5. 1941 ~ 1942
  6. 1940 ~
  7. 제3대, 5대 조선 총독, 제30대 일본 총리. 사건 당시에는 내대신(內大臣)이라는 천황을 보좌하는 직책이었다.
  8. 제20대 일본 총리.
  9. 15년 가까이 궁내성의 시종장을 지내며, 쇼와 덴노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책임자로써 황도파로부터 간신으로 찍힌 인물이었다.
  10. 위에 황도파가 습격한 인물들을 잘보면, 하나 같이 전부 쇼와 덴노와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11. 나가토 등 도쿄 앞바다에 있던 제1함대 예하 함정들이 2월 27일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전투배치지시와 함께 함포를 주요 육군 주둔지에 조준하고 여차하면 발포할 준비를 했다.
  12. 틀:뉴스 인용
  13. Ingram 2006, 76–78쪽.
  14. Kantowicz 1999, 149쪽.
  15. Shaw 2000, 35쪽.
  16. Brody 1999, 4쪽.
  17. Zalampas 1989, 62쪽.
  18. Mandelbaum 1988, 96쪽; Record 2005, 50쪽.
  19. Schmitz 2000, 124쪽.
  20. Adamthwaite 1992, 52쪽.
  21. 나머지 400억 달러는 기타 추축국들의 콩고물로 던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