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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이전 시대 대왜제국
1598 ~ 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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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시대 대일본제국 (라 파트리아)

태합동기 1598~1868

개요

전국 시대의 후신이자,  라 파트리아 대일본제국의 전신.

대왜제국(大歪帝国 일본어:ダイイビツテイコク, 다이이비츠 테코쿠) (1598년 ~ 1868년)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정유재란무술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해전을 통해 선포한 제국이다. 사할린 섬과 가까워 요국과 동맹을 유지하였다.[1]

역사

배경 및 건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의 패배에 대해 이를 갈았다. 그러던 도중 자신을 축출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쫓아내고, 교토에서 다시 권력을 되찾는다.[2] 권력을 되찾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스스로 일왕 작위를 박탈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왜군 사령부는 부산에, 시마즈 요시히로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사천에, 아리마 하루노부오무라 요시아키는 순천에 주둔했다. 이순신의 압박이 강해지자 아리마 하루노부가 부산으로 지원요청을 나간 사이 오무라 요시아키가 고립되었고, 울산에 먼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 역시 권율에 의해 고립되는 신세가 된다. 이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가토 기요마사를 구해주지만, 이순신이 여수 앞바다까지 진격하면서 사천, 부산 일대의 왜군들이 위기에 처한다. 동시에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용병들이 부산에 들어오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아리마 하루노부, 데라자와 마사시게를 보내어 이순신을 방어토록 한다. 도도의 부대가 난전을 겪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몸소 지원을 나서고, 이순신의 함대를 서해안까지 몰아낸다.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역시 이때 지원을 나가 대승을 거두고, 오무라 요시아키를 구출한다.(여수 해전)

왜군은 이때 한양으로 진격하여 조선 왕 선조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는데,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가 금세 또 위기를 겪는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부대는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부산으로 퇴각시키고 직접 권율의 부대를 쳐 승리를 거둔다. 왜군들은 순식간에 한양을 점거, 선조를 시해하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무술왜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직접 군을 나누어 산둥 반도요동 반도를 각각 치는 이로병진 작전을 펼치고, 그 결과 자금성을 포위 점령하며 만력제를 처형하였다. 후방에 있던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부대가 자금성으로 향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부대를 이끌고 사막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사마르칸트 대첩)

하지만 본국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다.(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는데, 시마즈 요시히로를 내세워 가토 기요마사와 가토 요시아키의 반란 유언비어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참수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소문내는 등 계략을 꾸미었다.[3] 하지만 이때는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야음을 틈타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터라 늦은 상황이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지막 방법으로 후지산 분화를 선택했다. 자폭병들을 따로 꾸려 오오즈츠를 분화구에 발포하여 분화를 했는데, 이때의 후지산 분화로 수호신 장달프를 비롯한 기존 오대로와 오봉행이 모두 죽었다. 이때 제주도로 후퇴한 이순신이 병력을 수습하고 오사카를 총공격한다.

오사카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시마즈 요시히로가 전사하면서 쵸주인 모리아츠가 시마즈의 역할을 대신 하게 된다. 결국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열도를 내어주고 대륙을 먹는 초강수를 둔다.

오사카를 함락한 이순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쿄고요제이 천황을 처형하고, 곧장 진격준비를 하였다. 이때 자금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황[4]의 자리에 오르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쵸주인 모리아츠, 구루지마 미치후사, 다테 마사무네를 새 오대로에 임명하면서 대왜제국이 선포된다. 그리고 오대로의 집결지로 둔황칠전 왜성이 건축된다.

반란 진압과 전성기

이 무렵, 명나라의 환관이였던 연우(延宇)는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고 있었다. 진린의 부대를 처음 보냈지만 고바야카와 부대에 의해 저지당하였고, 연우는 직접 전투에 임하게 된다. 갑작스런 기습에 데라자와 마사시게가 전사하고, 동시에 조선에서도 이배(李拜)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초반에는 몇번 승리했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적진 깊숙히 들어간 와중에 낙마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5] 칠전 왜성의 총대장이였던 쵸주인 모리아츠는 사츠마로 후퇴를 결정했고, 후일을 도모하게 된다.

삿포로 섬아이누족을 경계하던 다테 마사무네가 칠전성에 입성하게 되고, 곧장 조선으로 출정하게 된다. 투항하여 상해왜성 총대장직을 얻은 이순신은 적진에 잠복해 있다가 공격을 퍼부었고, 다테 마사무네, 와키자카 야스하루, 쵸주인 모리아츠가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을 퍼붓는다. 이때 신요의 지원군들과 왜군들이 힘을 합쳐 이배의 조선군에 대사군전[6]을 퍼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여진족의 추장 완안노추(完眼奴酋)[7]는 연우의 명군을 대패시키고 대륙을 먹으면서 금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이 또한 나중에 대왜제국에 의해 진압당하고 만다.[8] 이때 대왜제국은 심각한 난전을 겪었는데, 구루지마 미치후사쵸주인 모리아츠가 전사하면서 그 자리를 하타 치카시, 미야모토 무사시가 잇게 된다.

중원을 다시 차지한 대왜제국은 칠전왜성을 사마르칸트로 이전하고 태황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정 하에 유럽을 정벌하고 곧장 지방개혁[9]을 실시한다.[10] 개혁에 반발한 다이묘들을 추방시키는 등[11] 오대로의 권력은 어마어마했다. 이때 원로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사가 사망하면서 2차 개혁[12]이 실행되는데, 이에 반발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아와지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이 거세지자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군대가 나섰으나 대패했고, 다테 마사무네는 칠전성에서 할복하였다. 가메이 고레노리하타 치카시는 탈영한 터라 더는 군사도 없었고, 한반도 남해안의 왜군들이 나서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대를 이끌고 발해만으로 진격하는 반면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몽골인으로 변장한 상태로 자금성의 다이묘들을 탈출시켜 함락된 칠전왜성을 다롄에 재건한다. 이때 미야모토 무사시가 기리시탄 다이묘임이 들통나 처형당했는데, 이 일로 왜군들은 자멸 직전까지 갔다.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톈진의 반란군들을 해안봉쇄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대가 산해관을 넘으면서 바린 좌기[13]의 대하왜성[14]으로 진격한다. 후쿠시마의 군대는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전사하고, 와키자카는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동시에 가토 기요마사는 반란군의 강행돌파 작전으로 사망하였고,[15] 와키자카는 탈출에 성공하여 규슈 지역의 불순분자들과 접촉한다. 이후 칠전성은 시안에 재건된다.

규슈에 도착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구로다 칸베에와 합류하여 평소 오대로에 불만이 많았던 안코쿠지 에케이나츠카 마사이에, 오타니 요시츠구 등과 접촉하여 반격을 준비하지만 영웅왜성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이이 나오마사, 시마 사콘 등이 모두 진압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이 나오마사가 전사하게 된다.(이키시마 해전) 그리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한 반란 주동자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이후 광주왜성 인근의 도적과 대전왜성 인근의 도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마 사콘의 부대를 공격하지만 다케다 노부요시마츠시타 가헤에, 사타케 요시노부가 모두 진압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 난전을 겪는 바람에 시마 사콘마츠시타 가헤에, 사타케 요시노부가 전사하게 된다. 반란군들이 모두 진압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반란을 진압한 다케다 노부요시와 영웅왜성에서 자신을 수행했던 쵸소카베 모토치카, 사나다 마사유키, 오다 히데노부, 킷카와 히로이에를 새 오대로에 임명하였으며,[16] 수군 기지로 단동 왜성을 건축했다.

그리고, 대왜제국은 200년동안 전성기를 맞게 된다.

멸망

고요제이 덴노의 뒤를 이은 고미즈노오 덴노는 선황의 죽음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으로 인식, 고니시 유키나가의 도움을 받고 조용히 세력을 넓혔다. 그렇게 칼을 갈아오던 중 1868년, 메이지 덴노도요토미 히데슌의 폭정으로 인한 쇠퇴를 기회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순식간에 메이지 덴노는 혼슈를 장악, 사츠마의 시마즈 다다요시에게 항복을 받아내어 규슈까지 점령한다. 이어서 단동왜성의 사이고 다카모리, 영웅왜성의 이토 히로부미, 칠전왜성의 산조 사네토미, 상해왜성의 데라지마 무네노리구로다 기요타카,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항복을 받아내어 자금성을 포위한다. 자금성이 함락 직전에 다다르자 태황 도요토미 히데코레와 그 일족은 자살하였고, 메이지 덴노가 자금성을 점령하자 대왜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라 파트리아 대일본제국이 선포되었다. 라 파트리아 대일본제국은 서구 문물들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였으며, 그렇게 대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종교

수화기의 신, 장달프.

사츠마 번에 출현하여 수화기로 전국을 통일시키고, 후지산 분화 당시 승천한 장달프를 수호신으로 뫼시었다.

장달프의 수화기는 그 당시 귀중한 물건이였다. 함부로 썼다가 사형당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다.

장달프의 수화기는 소리가 매우 커 적들을 교란시키는 활약을 한다.

수도

  • 자금성(수도): 대왜제국 200년 역사의 수도.
  • 칠전 왜성(정치 행성): 오대로, 오봉행이 모여 정치를 총괄한 행성이였다. 둔황 - 사츠마 - 사마르칸트 - 다롄 - 시안 등지로 옮겨 다녔으며, 멸망 이후에도 후신 국가가 정치 기구로 사용하였다. "칠전"이란, 일곱 명의 전사들을 뜻하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쵸주인 모리아츠, 구루지마 미치후사, 다테 마사무네, 타치바나 무네시게, 데라자와 마사시게를 가리킨다.
  • 상해 왜성(국방 행성 겸 육군 기지): 전쟁 관련 일은 모두 이곳에서 총괄하였으며, 동시에 대왜제국의 육군 기지로 활용하였다.
  • 단동 행성(수군 기지): 상해 왜성을 육군 기지로 활용했다면, 단동 왜성은 대왜제국의 수군 기지로 활용한 곳이다.
  • 영웅 왜성(여름 수도): 연해주에 위치한 대왜제국의 여름 수도였다.
  • 교토 니조성(겨울 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되찾은 이후 수도로 삼았으나, 대왜제국 건국 이후 자금성을 수도로 삼고 나서는 겨울 수도로 활용하였다.

외교

  • 신요 - 신요와 대왜제국은 동맹관계가 좋은 편이였다. 신요는 원래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다가 임진왜란 이후부터 명나라의 요구에 반발, 대왜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서로 도울일이 있으면 도우는 등 교류를 열심히 하였다.
  • 포르투갈 - 대왜제국 건국 이전부터 포르투갈은 일본과 교류하였는데, 유럽 정벌 당시 무력충돌 없이 할지를 약속했기 때문에 두 나라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역대 태황

같이 보기

각주

  1. 이는 군사,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2. 이후 고니시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다카야마 우콘을 비롯한 키리시탄 동맹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오사카고니시 막부를 선포, 오사카 지역을 다스렸다.
  3.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금성에 피신했다.
  4. 태합과 황제를 합친 직위이다.
  5.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뒷자리는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잇게 된다.
  6. 수화기 안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신무기.
  7.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후손이다.
  8. 완안노추의 여진반군은 패배 이후 사할린으로 도피하지만, 신요에게 모두 소탕당한다. 자신들의 조상인 요나라를 무너뜨린 여진족이였으니, 이에 대해 복수한 것.
  9. 각 지역의 영주였던 토호들을 경계하려고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에서 절도사를 뽑아 파견했다.
  10. 이때 오대로들이 개혁에 앞장섰는데, 이 일로 다이묘들은 오대로를 점점 경계하기 시작했다.
  11. 대표적으로 지바 토시부로가 있다.
  12. 부패 다이묘 추방 등.
  13. 옛날의 요나라 수도.
  14. 반란군의 집결지.
  15. 가토와 같이 해안봉쇄를 했던 오무라 요시아키아리마 하루노부, 시마즈 토요히사, 구키 요시타카 등이 군사들의 피로를 이유로 해안봉쇄에 소극적으로 임하였기 때문에 와키자카 군의 강행동파는 더욱 쉬워졌다. 이때문에 홀로 방어하던 가토가 난전을 겪다 사망했던 것. 반란 진압 이후, 히데요시는 이 일의 책임을 물어 오무라 외 3인을 모두 파직했다.
  16. 기존에 있던 다테 마사무네미야모토 무사시가 죽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반란 혐의로 처형당하였으며, 타치바나 무네시게하타 치카시 등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파직당했기 때문에 오대로 자리는 이때 당시 공석이였다.
  17. 히데요리의 아들인 쿠니마츠가 요절하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어 히데요시의 양자인 토시츠구가 태황에 즉위한 것이다. 여담으로 토시츠구의 원래 성씨는 기노시타 씨다.
  18. 토시츠구의 자식들이 모두 요절해서 동생인 토시카치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19. 히데미츠의 아들이 평소 몽골족과 어울리며 사냥을 즐겨 히데미츠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에 불안감이 생긴 히데미츠의 아들이 반란을 꾀하자 히데미츠는 아들을 숙청하고 동생인 히데나리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
  20. 토시이에게는 자녀가 딸밖에 없어 할수없이 동생인 토시츠네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
  21. 히데슌의 동생. 히데슌의 폭정에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켜 태황이 되었지만 이후 메이지 덴노의 반란으로 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