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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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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신응조 심순택 이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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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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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문 시대
제44대 제45대·46대 제47대 제48대
허 헌 조봉암 송진우 허 정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공복덕 손원일 김정렬 노신영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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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영 시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61대·62대
이회창 김근태 조영래 이인제

대한국 이인제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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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 부총리 비서실장 궁내청장
이인제 이낙연 민경옥 이회창
중추원의장 경호처장 경찰청장 총무대신
홍문표 염상국 정경택 강석대
노동대신 국토대신 외무대신 과학기술대신
김경수 김문수 김성환 안철수
내무대신 재무대신 보건대신 법무대신
나승일 현오석 이한열 고 건
경제대신 환경대신 방위대신 농업대신
홍종학 조경규 권영호 정황근

삼경 · 부급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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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경

서경 평양부

황성 한성부

남경 부산부

인천부

개성부

원주부

대전부

대구부

포항부

광주부

전주부

군산부

함흥부

원산부

경흥부

의주부

삼화부
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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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대월) → (대남)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동아시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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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大韓國 | Korea
국기[1]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태평양 전쟁 이전 지구통합 이후
대한제국 지구 집정 연합
섹터 대한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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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67년 대한제국 선포
1902년 한러전쟁
1936년 2.26 사건
1937년 한중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1945년 의주•군산 핵폭격
1964년 한성 올림픽
1983년 한국 경제위기
1999년 광영황제 이곤 즉위
지리
수도
한성부
최대도시
한성부
면적
220,748km
위치
지구
동북아시아 한반도 및 부속도서
주변국
대일본제국, 만주민국, 소비에트 연방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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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1억 800만명
공용어
한국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법정 문자)
민족
한국인 97%
그 외 3%
국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종교 분포
무교 54%, 기독교 19%, 불교 15%, 유교 11%, 그 외 1%
군대
없음[2]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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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국가 원수
(황제)
이곤[3]
행정 수반
(총리)
이인제[4]
여당
대한민주당
경제 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통화
한국 원 (圓)
위치
수도 황성 한성부의 전경

남경 부산부의 전경

개요

언덕에 앉아서 멀리 마을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제 부모가 부르는 소리에 하나 둘 사라져가고, 전등은 하나 둘 씩 길거리를 밝히기 시작하였다.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산등성이에 걸려있던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광경은 마음 속 무언가를 채워주었다. 깃대에서 휘날리는 국기는 운치를 더해주었다.
저 멀리서 석양의 노을이 짙은 홍광을 내뿜던 것도 잠시, 곧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밤이 찾아왔지만, 영원치는 않을 것이다.
긴 밤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해는 다시 뜰 것이니까.

- 이벤트 '또 다른 하늘'

대한국 (Korea)


1392년 8월 5일에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의 후신이다. 1867년 고조 이환이 한성에서 환구단을 쌓아 단군조선과 명 제국의 뒤를 이은 적법한 동아시아의 유일한 천자국을 자처하며 건원칭제를 감행하였다. 2017년 기준 광영황제 이곤이 대한의 6대 황제로서 통치하고 있다.

최초의 헌법 흠정대한국헌법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대한국 헌법으로 입헌통치의 기틀이 완전히 다져진 민주주의 국가이다.

역사

개화기

고조 이환의 치세에서 개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 이환은 심중에 강한 왕권을 향한 야망의 불씨를 지폈고, 영특한 머리로 조선을 바로세울 책략을 짜며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해 나아갔다.

성년이 된 후 이환은 세도가의 권세를 완전히 척살하기 위해 조정의 비주류 세력과 이환 본인의 친위세력을 키웠고, 익문사라는 비밀 조직까지 창설하였다. 결국 1852년 이환은 세도가를 몰아내고자 안동 김씨 주도의 국왕 암살 모의 사건, 일명 '한성투서사건'을 만들어 역모죄로 안동 김씨와 세도가를 묶고, '임자사화'를 통해 그 세력을 완전히 일휘소탕하였다. 이환은 이때 세도정치의 일을 교훈삼아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권력구조를 개편하였고, 이는 훗날 국왕 직속 친위세력의 양성으로 이어져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임자사화의 결과는 다른 일을 불러 일으켰는데, 안동 김문과 엮여있던 풍양 조문과 여흥 민문까지 같이 걸려들면서 이들 사이에 암암리 퍼져있던 천주교도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였다. 이전에도 척사윤음 등의 어명을 내린 적이 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임자사화의 불구덩이에서 천주교들은 멀쩡할 수 없었고, 왕권강화와 민심 평정의 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1853년 이뤄진 계축박해로 인해 많은 천주교도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까지 사망하였다.

프랑스 선교사의 사망은 알음알음 퍼져 조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의해 본국까지 도착하였고, 프랑스는 <신앙의 자유>와 <탄압받는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조선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처음 제물포 항에 닿은 프랑스의 군함은 조선 조정에게 신앙의 자유와 개항장의 마련을 요구하였으나, 해안선 가까이 다가온 군함을 공격한 조선군 해안포에 의해 군함이 피해를 입고 후퇴한 후, 프랑스가 다시 더 많은 함대를 이끌고 침공하자 그제서야 신앙의 자유, 항구 지대의 개항 등 여러 조항을 담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조선과 프랑스는 맺게 되었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의 뒤를 이어 조영, 조미 등의 통상조약까지 차례대로 맺은 조선은 비로소 국제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도 무력에 의한 개항에 의해 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임자사화로 권위가 한껏 높아진 이환이 개화던 척사던 일단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진정시킨 후 청, 일본, 그리고 프랑스 및 여러 서방국가들에 시찰단을 보내어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일본 쪽에는 조선통신사의 부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였고,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보내었다. 각지의 외국으로 간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러한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고, 개화를 지지하였으며 이환 또한 자신의 친위세력이자 이들 개화파들의 신문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개화를 결심하였다.

18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무역에서 척사파의 말대로 손해만 무지막지하게 볼 줄 알았던 조선은 뜻 밖에 상품을 얻어내었는데, 홍삼이 아편 치료에 큰 효과를 보인다고 알려지면서 청나라에서 크나큰 수요가 생겼다. 이 덕분에 재원을 마련한 조선은 미국, 프랑스 등에서 방직기계와 총기, 화포 등을 들여오면서 근대화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차근차근 발전하던 중, 1861년 함경도 사냥꾼들이 조선 국경지대 인근 범월인들이 함경 고을을 노략질하자 두만강을 넘어 이들을 토벌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아편전쟁과 내부적으로 불안을 겪고 잇는 와중에 제1의 번국이라 불리는 조선에게 이런 굴욕을 겪자 청은 저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조선에게 강경한 통첩을 날렸고 이를 거절하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는 엎치락 뒤치락 하였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그를 전면적으로 운용한 조선의 승리로 끝나였다. 전후 맺은 조약에서 조선은 중국의 번국에서 독립적인 국가로 상승하였으며 남만주에 그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1863년 공식적으로 통백도, 용강도, 요안도(현재 심요도 남부지역)를 설치한 것은 조선이 반도에만 갇혀있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전 후에 얻은 이득은 이것만은 아니였는데, 청나라에게서 받아온 막대한 자금은 조선의 근대화 자금이 되었으며 이제 걸림거리가 없는 개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쟁 후 칭제의 요청이 빗발같이 쏟아지자 은 3년 뒤 1867년 10월 11일 환구단을 쌓고 연호를 영락으로 하여 즉위를 하였다.

경은군의 즉위

크고 작은 일이 격동기 속에 있었지만, 계속되며 발전되던 대한은 1875년 황제 이환이 과로 및 지병으로 쓰러지자 급해졌다. 한때 있던 태자는 이미 훙한지 오래고 마땅히 왕위를 이을 친척도 없던 때였다. 그러던 1876년 왕족 아이들을 모은 자리에서 황제의 8촌인 경은군의 총명함을 눈에 담은 이환은 그를 후계자로 낙점하였다. 그리고 1877년, 이환이 사망하자 양동생으로 삼은 경은군 이재성은 휘를 천으로 바꾸며 대한의 차대 황제로 즉위를 하였다.

이환의 묘호는 기계문명을 받고 단군과 고구려 이래 잃어버린 한민족의 천명과 주명의 천명을 다시 이어받은 민족사상 유래 없을 업적을 기려 고조로 결정되었다.

새로 즉위한 황제의 혈통이 고조의 8촌이라는 점에서 정통성이 부족함에 따라 황실의 기둥이 흔들리고 한민족의 초인인 고조의 사후 내부 분열로 혼란스러운 지금 대한제국을 공격하는 것이 기회라 여긴 청나라 정부와 서태후는 1880년 군대를 소집해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이는 얼마 전 즉위한, 만 스물의 나이의 광무황제가 친정을 나가며 모범을 보이자 국론이 단결 된 한국에 의해 간단히 격파되었다. 러시아 극동군 또한 청이 무너질 때 독자적으로 개입하여 북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여 천진(톈진)에서 요하-송하 선 이남은 대한에게 할양, 북만주는 러시아에게 관할권을 넘겨준다는 협정을 맺게 되었다.

한편 1877년 일본에서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제국의 운양호가 규슈지방을 정탐하러 갔을 때 세이난 반군들이 운양호를 공격해 제국의 수군 2명 사망 9명 중상이라는 피해를 입었었다. 광무황제는 이에 격분, 곧장 정예군을 조직하여 규슈지역 사세보에 상륙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은 규슈 지방에서의 조선의 이권을 인정하고 사세보 일대를 조차지로 내주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는 동안, 일본 내부에서는 끊이지 않고 일어나던 풍수해와 화재의 피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정토진종을 구심점으로 대대적인 잇키를 일으켰다. 메이지 10년 4월 2일 작게 시작한 봉기는 전 일본으로 퍼져나갔으며 이는 반외세 반서구 열풍을 타고 외국의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결국 1879년 "에도 진군"을 끝으로 일향종의 난은 진압되었으며 미, 영, 프, 러, 한 5개국과 일본을 분할하는 '아와지 조약'을 맺었다.

1883년에는 류큐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쇼타이 국왕이 대한제국에게 망명하였다. 이때 류큐를 보호국으로 삼고 태평양으로의 길을 열어야겠다 생각한 황제는 쇼타이 국왕을 다시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류큐에 신식군 1연대를 파병해 반란군을 쓸어버리고 류큐를 보호국화 하였다.

1899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한인이 피해를 입자 분노한 조정은 서방과 손을 잡고 청나라로 진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1901년 맺은 신축 조약에서 타이완을 식민지로 가져오는 성과를 얻어낸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대한의 성장을 방해하던 세력, 러시아가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는데 결국 1902년 용계북도 가목군에서 러시아와 한국군 간의 소규모 교전을 시작으로 한러전쟁이 발발하였다. 모두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결과는 정 반대로, 대한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는 러시아 극동군의 무능과 비정상적으로 육군에 투자한 한국군의 특성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끝으로 모든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조약은 완전히 청산되었으며, 대한은 북해도와 해삼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대전쟁부터 전간기까지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되었다는 비보가 조선으로 날아왔다. 이 7월 위기는 결국 유럽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고갔으니 바야흐로 훗날 대전쟁이라고 부르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대한은 영국과의 동맹에 의거하여, 독일령 동아시아의 많은 영토들을 공격-점령하였으며 또한 협상국에게 많은 양의 물자를 팔아치우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이득을 취하였다. 결국 1918년 전쟁이 끝나자, 동맹국에 배상금과 남방군도를 받아내게 되었다. 7개조 조약 또한 중국에게 요구하였다.

1917년 부원지쟁 때는 김규흥 차관으로 단기서 정부를 지원하였고, 같은 해 러시아 혁명이 백군의 열세로 흘러가자 제국 내부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치를 떨던 많은 의원들이 반공주의 성전을 위하여 내전에 개입하자 주장, 몽골에서도 공산 혁명이 일어나 적백내전이 시작되니 이에 경각심을 가진 의회에서 개입이 가결되어 백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막대한 물자를 쏟아부어도 백군이 이기지 못하자 한소기본협정을 통해 연해주를 편입하게 되었다. 이 편입 이후 한영동맹이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미국의 압박 하에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결과로 한영동맹은 공식적으로 종료되게 되었다.

미국에서부터 시작한 대호황은 전 세계를 대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전쟁의 직접적인 패해를 받지 않은 대한은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낱 사상누각이었는데,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모든 호황이 한번에 끝이 났다. 주식 대폭락으로 대동강과 한강 파출소에 연일 사망소식이 들려왔으며 모든 국민들은 암울한 시기를 겪기 시작하였다. 이는 극단주의 세력의 발흥을 불러일으켰으니 '조선공산당'과 '신한청년당'이 그 세력 중 대표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대공황 이후에 군에 배정되는 예산이 떨어지자 군의 정부를 향한 불만은 암중 속에서 커져갔다.

당시 총리였던 김희선은 떨어지는 지지율의 회복과 경기부활을 위해 대영제국의 곡물법과 유사한 법안 및 수십가지의 관련 법안을 많은 반발에도 통과시켰다. 이는 1월 12일의 사회주의 일본독립운동 계열의 '강명황제 암살시도'로 멈춰졌다. 강명황제 암살시도의 여파는 엄청났는데, 대한의 지존인 황제를 암살하려는 대역죄에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통치가 불안정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책임을 돌리기 위해, 그리고 군 내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테러를 막지 못하였다고 판단되는(또는 그렇게 몰아붙인) 다수의 군부 내의 황도파 인원에게 돌렸으며 숙청을 감행하였다. 이에 2.26일 황도파 소속 청년장교들의 대대적인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이는 얼마 못 가 통제파의 거두 겸 가까운 종친인 이강 장군에게 진압당하였다.

황도파에 관련된 이병무 참모총장은 해임되었고 군단장 이강은 곧바로 새 참모총장위에 올랐다가 이후 임시군사정부를 수립, 대한제국의 모든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하였다. 군사정부는 쿠데타를 막지 못하였다는 명목으로 내각을 해산하여 자신의 마음대로 '개혁' 이라는 명목의 정적숙청과 권력장악을 시작하였다. 이 작업으로 대한제국의 의회는 사실상 거수기의 역할로 전락하였고 임시군사정부는 이후에 제국주의, 파시즘 정치세력인 신한청년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신한청년당으로 군사정부가 바뀌었을 때는 대략 36년 8월 즈음인데, 이때로 가면 군사정부와 민간 양 계층에서 이강의 권력이 확고해졌다(극단적인 정책이 겉으로 치안유지 및 정치개혁이라는 일부 효과를 보였기 때문).

이로인해 군에서 예편해 신한청년당에 가입한 이강이 뒤에 치뤄진 제국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면서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은 이강을 비롯한 신한청년당 세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을 '육군파의 정권장악과정' 이라고 본 해군이 이에 반발하였으나 서슬퍼런 강명황제 암살시도라는 대역죄에 묶이고 싶지 않은 심리와 이강이 해군에 타협점을 제시(신한청년당 요직에 해군 인사 임명)함으로써 진정되었다.

한중전쟁

대한제국의 권력이 한 곳으로 쏠릴 무렵, 외몽골 출병이 몽골의 수도 후레의 함락과 쉬수정의 죽임이 확임됨으로 북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36년 1월부터 시작된 일본의 '쇼와 유신' 또한 도쿠가와 씨족의 패배와 혁명군의 승리로 끝이 났고, 중국 남부에서 붕괴한 오성연군의 시체 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러던 와중, 중국 산동반도 대한제국 청도 조차지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남에 따라 대한제국의 반전주의 여론과 반민족주의 담론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청도충돌은 직접적인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으나, 이후 베이징 '오패부 방어선' 인근에 대한제국군이 전면적으로 배치되어 한중전쟁의 도화전을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신한청년당 정부 아래 대한제국은 더욱 군국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여가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근본적으로 군 세력이 중추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기에, 군대가 더욱 막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미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군 예산부문이 더욱 늘게 되었으며 안그래도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던 경제는 이제 흔들리기 직전에 다가섰다. 이러던 와중, 7월에 오패부 방어선 노구교 인근에서 한국군의 선제공격으로 중국군과 한국군의 최초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양국군 모두 이 일을 쉬쉬하며 덮어가려 하였지만 한 연대장의 독단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을 수 있던 전쟁은 일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벌어진 한중전쟁은 급작스럽게 일어난 터라 군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으나 이는 준비된 계획에 따라 중국을 공격함으로서 진정되게 되었다.

대한제국군은 오패부의 직예정부가 세워놓은 오패부 방어선을 청도 인근에서 전차 등의 부대를 활용하여 우회, 최종적으로 직예 인근을 전부 포위하는 '뇌격' 작계를 발동, 천진시(市) 점령과 오패부 선 일부 돌파, 동부 산동반도 확보에 성공함으로 일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완전성공을 해내지는 못하였다. 1개월 안에 북경을 점령시킨다는 야심찬 이 계획은 장장 3개월에 걸쳐 북경공방전을 이어감에 따라 중국이 직예에 세워놓은 군수시설을 전부 후방지역인 낙양 인근으로 옮기는데 성공하여 한중전쟁의 장기화를 불러일으켰다.

한편 대한제국은 화북에 중국군의 시선이 몰림에 따라 허를 찌르고자 상해로의 기습 상륙을 감행하였다. 상해는 성공적으로 장악하였으나, 오패부 정부와의 협조를 하기로 결정한 인근 군벌세력과 국민당 연합군은 가흥 인근에서 한국군과 수차례 교전을 치루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었고 결국 남쪽을 통해 북양정부의 빠른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을 포기한 한국군은 목표를 바꾸어 국민당과 군벌세력의 토벌을 위해 남경으로 향하였다.

남경을 쉽게 점령한 한국군은 의양군 이재각의 윤허로 남경에서의 불온한 세력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수십만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남경 대학살)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과의 협조를 고민하고도 있던 군벌세력들을 정부와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군벌 세력들이 중앙정부와 협조하기 시작하자 중국 점령지를 통제하기 위해 한국은 군벌 권력다툼에 패배한 후 한국으로 망명한 제섭원(치셰위안)을 이용하여 남경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설립하였다.

37년 10월이 되어 베이징을 점령한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12월에는 직예 대부분을 점령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부 전선에서 소소한 패전이 있긴 하였지만 대체로 한국군보다 약한 중국군을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진격하는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정도 되었으면 중국 정부에서도 항복선언과 평화협정을 할 수도 있다고 한국 정부는 생각하여 중재를 독일에게 맡기고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한국의 무리한 요구와 중국의 결사항전의지로 결국 파토나고 이강 내각은 전쟁목표를 바꿔, 중국에서의 괴뢰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38년이 되면서 제국군은 중국 중부지역으로 침투하였고, 이때 개봉, 무한, 그리고 남부 상륙작전인 '화려한 여행길'로 광주와 포산, 선전 등을 장악하였다. 광주 지역에서도 한국군정기간동안 많은 잔혹행위를 자행되었다. 이때까지 한국이 중국을 그대로 집어삼킬 줄만 알았으나, 전 중국이 오패부와 조곤의 연립 정부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로 모였고, 공간으로 시간을 벌음에 따라 한국은 중국에서의 전쟁을 소모전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개로 한국의 대륙타통작전을 통한 중국 중부지역 침투, 그 외 주요 항구도시 함락을 제외하면 39년에서 41년까지는 별다른 큰 전황의 변화 없이 지속된 소모전만이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

한국의 이러한 일련의 침략행위를 본 미합중국은 1941년 2월 일어난 파나이 호 침몰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에게 제재를 가하기로 결심하여 전략물자의 대한수출을 금지하였다. 당시 석유 자원의 90%를 미합중국에 의존하던 한국은 이에 격분하였지만 미합중국 정부는 한국의 전면적인 중국 철수를 요구하여 두 국가간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이러던 중 한국을 압박하기 위해 미국은 영국 극동함대와 남중국해에서 공동훈련을 펼쳤고 이를 본 한국 정부는 위협 선제방어, 금수조치 해제를 위해 6월 25일 기습적으로 미영 연합함대와 진주만에 선전포고문이 다 전달되기 전에 공격을 하였다. 당연히 격분을 한 미국 정부는 연합국의 편에 서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미국의 참전 이후 준비해둔 남방작전을 발동해 인도네시아, 말레이, 인도차이나, 필리핀 등을 장악하였으나 과달카날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재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여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였다. 패전이 다가오자 한국은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남자는 군인과 공장으로, 여자 또한 공장과 혹은 우리가 흔히 '위안부'라고 부르는 곳으로 끌고갔다.

한편 41년 8월 대륙에서의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당시 친미세력으로 중국에 물자를 공급하는 비밀기지로 활약하고 있던 일본을 막기 위해 '구주 총격전' 사건을 조작하여 일본에게 굴복하거나 전쟁을 하라는 선택지를 내밀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굴복하겠다 한 일본이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자 한국은 사실상 일본을 괴뢰국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조약을 맺으라 압박을 하자 그제서야 일본 정부는 결사항전을 말하며 한국과의 전쟁을 택하였다.

한국군은 해상봉쇄로 일본으로 가는 모든 전략물자를 차단하기 시작했으며 주고쿠, 시고쿠 등을 장악하여 일본의 수도 쿄토 앞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주 쇼와천황의 친정과 장기전으로 지친 한국군, 그리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의병으로 한국군은 쿄토 점령에 실패하여 중국-일본 양면전선을 치르게 되었다. 미군 또한 일본열도를 통해 들어오면서 한국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하였고, 결정적으로 과달카날 해전에서 대패한 후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미국의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수많은 업을 쌓은 끝에 유구와 대만이 함락되고 독일이 45년 5월 항복하여 미, 영, 프, 소 4개국이 발표한 포츠담 선언에 따라 한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나 이강과 신한청년당 정부는 이를 거절, 결국 8월 6일과 9일 미합중국의 원자폭탄이 의주와 군산에 투하되면서 이강은 자살, 8월 15일 강명황제 이진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한국이 항복하기 직전 소련은 만주작전을 발동시켜 대한제국령 만주와 연해주를 밀고들어갔고, 빠른 속도로 연해주를 장악하였다. 이후 전에 맺었던 약속에 따라 송화-요하 선을 기준으로 북부 만주는 소련이, 남부는 9월에 밀고 들어온 미국에 의해 나뉘어졌다.

대전 이후

대한제국이 항복하게 됨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한반도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 전후에는 영토분배 또한 이루어졌다.

한국이 점거하던 북해도와 구주는 각각 일본령 홋카이도와 규슈로 개칭되었고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하고 있는 대마도 또한 이때 일본 측으로 넘어갔다. 적백내전 당시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와 맺은 아이훈 조약 파기는 무효가 되어 연해주 지방과 사할린, 쿠릴 열도는 소련이 병합하였으며 만주작전으로 소련이 확보한 북만주 지역은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것에 따라 분할통치하게 되었다. 또한 북방군이 통치하던 몽골은 소련으로 피난갔던 '허를러깅 처이발상'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몽골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외에도 한국이 제국주의 시절 얻었던 모든 영토는 무효화되었고, 한국은 1860년대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중국은 원하던 한국령 만주를 다시 점거하기를 바랬으나 한 세기동안의 분단으로 만주 지방의 민족구성이 흔히 말하는 "중국 지역"과 다른 것과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소련이 넘겨주길 원치 않았던 점, 중국 내부에서 내전이 진행되고 있던 점이 만주를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GHQ로 돌아가서, 한국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대놓고 말해 미국은 한국의 군국주의를 완전히 거세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GHQ 최고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한국을 민주적인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한국의 황제를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이전처럼 군주의 권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 토템, 인간 옥새로 변모시킨 것도 있었다. 또한 미국은 태평양전쟁, 한중전쟁 등에 있던 다수의 전범들을 교수대에 올렸으나, 일부 정치인들, 예를들어 박상진과 같은 인물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를 내려 현재 한국의 보수화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GHQ는 전후의 한국을 완전히 탈군국주의, 탈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하였으며 위와 같은 맥락에서 군대 또한 없애버렸다. 물론 이후에 중국에서의 내전이 공산당의 남중국 통일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지자 '전투경찰'이라는 준군사조직을 30만 가량 양성시켰다. 또한 한국은 쓰디 쓴 대전쟁에서의 패배로 수많은 영토를 잃자 외부 영토에서 귀국하려 하는 이들과 참전군인의 귀향으로 잠시 식량난에도 빠지는 등 여러가지 일을 겪었다.

이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함과 동시에 한국은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였고,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의 황제국에서 대한국이라는 입헌군주정의 민주국가로 탈바꿈났다. 이리하여 한반도 격동의 시기는 끝을 맞이하였다.

발전

한반도에서의 격동은 끝을 맞이하였다고 하나 동아시아의 격동은 아직 멈출 줄을 몰랐다. 한국의 침략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이 중국 내부에서 큰 세를 키워 남중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서방권의 영향이 강할 것이 분명한 신생 만주민국에게 북만주를 돌려주는 것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첨예한 대립을 빚기도 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미국은 처음에 한국을 그저 '농사만 지을 수 있는 거지국가'로 만드려는 계획을 수정해 '아시아 반공전선 선봉장'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의 투자와 마셜 플랜은 패전국 한국을 선진국으로 가게 도와주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1964 한성 올림픽'이었다. 1940년대 원래 한성에 유치하기로 결정된 올림픽을 새로 시작할 올림픽에 적용하자는 한국측의 제안에서 시작한 한성 올림픽을 기점으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은 70년대 눈부신 성장을 보여주었으며 3저호황을 타고 80년대에 그 유명한 '한성을 팔아 미국을 산다'는 말이 생길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호황을 누렸다. 이때의 발전은 '원저현상' 때문에 이뤄졌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이라고, 한국 내에서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이들이 제일 많았던 때가 이때였고, 1967년 1월 4일 구시대를 상징하는 강명황제 이진이 죽고 황태자였던 이휼이 헌문제로 즉위하자 보수적인 시각이 점점 사라짐에 따라 각종 사회 문화적인 발전도 이때 크게 이뤄졌다.

그러나 이 성장과 호황은 한국의 성장을 위협으로 본 미국의 '플라자 합의'로 깨지게 되었으며 결국 80년대의 호황을 끝으로 한국은 부동산 거품이 꺼지게 됨으로 '잃어버린 20년'을 시작하게 된다. 극도의 디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상승하지 않고, 청년층은 수도 한성에 내집마련하기가 크게 어려운 시대다. 그리하여 과거 빛나던 시기를 그리워하는 세대들이 있기도 하다.

1991년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선언'으로 끝남에 따라 만주와 소련과의 교류도 시작하였고 마침 시작된 가이후 도시키 일본 총리의 '좋은 한국문화 받아들이자'를 시작으로 한국의 만화를 비롯한 서브컬쳐가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일본에 '오타쿠'들이 주구장창 생겨나게 되기도 하였다.

이 발전하는 냉전기에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전후에 발전하는 사회주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보수파의 후신 대한당과 개화파의 후신인 민주당이 60년 선거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큰 힘을 얻자 합당을 추진하여 '대한민주당'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자유당'이 딱 한번 집권한 적을 제외하고는 쭉 여당으로 집권하고 있다.

대한민주당이 하나의 당이 되었다고 한들 내부적으로는 여러 계파로 이뤄져 사실상 당대표 결정이 한국 총리결정과 다름없다. 이렇게 쭉 정치가 고인물이 되어가자 내부적으로도 '고인물, 귀족과두정'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도 있지만 투표율이 4~50% 대에 머무는 것으로 보아 대한민주당의 질주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황실 또한 발전하는 시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GHQ는 전쟁범죄와 관련된 황족들만 황족작위를 박탈하게 하려 하였으나 기존 황족 직위에 질렸던 창산군 이해창이 황족작위를 포기함으로서 직계 대한국 황제의 후예이거나 고종 광무제 이천의 친아버지, 익평대원군의 궁가를 잇는 이들을 제외한 모든 황족들이 그 직위를 박탈당하는 '황적이탈'을 당하였다.

또한 기존 보수적인 황실을 개혁파인 황제의 두 아들, 황태자와 의친왕은 황실을 현대적이게 개편해나갔다. 황태자는 최초로 명문 양반가가 아닌 평민과 연애로 결혼하였고 의친왕은 기존에 ~~궁이라고 부르던 명칭을 '의친왕가' 라고 간편하게 부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황실의 인기는 대한국 내부에서 드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황실에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1998년 헌문제조 황태자였던 이헌이 부인과 여행을 떠나다 비행기가 사고로 추락하여 사망하게 되는 대형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잠시 황위계승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당시 황제인 헌문제에게는 황태자 이헌과 두 딸 밖에 없어 황태자가 죽으면 황태자의 어린 두 아들들만이 그의 남자 후손이었다.

황실 내부에서는 '어린 황제를 올리기에는 좀 그렇지 않는가?' 라는 의견을 비추었고 이는 전국적으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황제는 자신의 장손을 황태손으로 책봉, 섭정으로 조카 정연군과 두 딸을 임명함으로 논쟁을 마무리지었다.

현대 시대

1999년 헌문제가 사망하고 만 네 살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다. 연호는 빛이 넓게廣 비친다映 하여 광영으로 결정되었다. 새 황제의 즉위는 대한국이 새 시대로 진입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았다. 21세기가 접어들고 팍스 아메리카나가 공고해지면서 미국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운영되게 되었다. 한국은 이때 한창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2000년대에 PC통신이 활성화되면서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옆나라 일본이 90년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전국에 인터넷망 보급과 PC통신을 활성화하였고 한국 또한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추어갔다. 이때 '싸이월드' 나 'DC인사이드'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 또한 만들어지게 되었다. 전국민적으로 유행을 탄 싸이월드는 한국 인터넷의 시작을 알린 것과 다름없었고 다수의 IT 전자기업들 또한 생겨났다.

한편 7080년대에 한창 부흥한 문화산업은 00년대에 절정을 달리기 시작하였는데 수많은 명작 만화나 애니매이션들이 나온 것은 물론 한국의 여러 전통매체를 기반으로 한 문물들이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도 널리 퍼졌기 때문에다. 물론, 흔히 '씹덕' 이라고 부르는 2D 서브컬쳐 또한 널리 퍼져서 대한을 씹덕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4년 황제가 만 19세 성인이 되면서 섭정체제는 형식상 끝이 났다. 물론 황제가 대학 진학을 결심하여 실질적으로는 정연군이 그 직무를 여전히 대리하는 중이다. 황제가 명목상으로나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고 대한국의 한때 논란이었던 황위 계승 문제는 황제가 멀끔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끝이 났나 싶었지만, 이제는 후계자 논쟁이 스멀스멀 나왔다. 황후를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황후의 자리는 황제의 고모들이 대신하였으나 그녀들도 나이가 들었고 현재 헌문제의 직계후손이 황제와 황제의 동생 완친왕(1996.11.16~), 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기도 해서였다.

이 논쟁은 계속 지속되다가 2015년 급작스런 완친왕가 창설로 또 한번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완친왕가가 갑자기 창설된 이유를 사람들이 파고들자, 완친왕과 교제하던 여인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에 또 한번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어 황실은 2001년 있던 '상영군 자살 사건' 이후 큰 곤혹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완친왕가 창설 논쟁과 황위계승 논쟁은 2016년 2월 황제가 황위계승순위를 일단 1순위를 동생 완친왕 이현李炫으로, 2순위를 조카 한성군(2015.9.12~) 이민李旻으로 결정함으로 끝나게 되었다. 아직 결혼 논쟁은 남아있긴 하긴 하나, 황실 관련한 문제가 일단락 된 것은 다행인 일이다.

황실

대한국/황실 참조.

정치

입헌군주제

1891년 고종흠정대한국헌법을 발표하면서 대한국에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가 자리잡혔고, 순종 시절 그마저도 권한이 많아 업무가 과중된다는 명목[5]으로 황제에게는 최종인가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입헌군주제를 마련하였다.

1936년 이강의 신한청년당이 성조를 이용하여 제국을 전쟁에 몰아넣었을 때에도 권력 자체는 꽤나 존재하였다. 몇 보수파들은 성조가 이강에게 놀아났던 피해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절대 옳은 말이 아니고 성조는 전쟁을 허가하거나 최소한 묵인하였다[6].

패전 후 공화정으로 돌아설 수 있었으나, 맥아더 사령부의 결론은 극동의 첨병인 한국의 황제를 민주주의의 수호자반공의 정점으로 이용하는 것을 택, 황제와 황실은 그저 얼굴마담으로만 남게 되었다.

광종을 거쳐 광영제 시대에 이르러는 황실은 전 국민의 통합자 겸 대한의 얼굴 그 자체가 되어있다.

대한민주당 일당체제

정치 무관심층

문화

단일민족

유교 문화권

경제

군사

외교

서방 세계

동구권

동아시아

여담

The Last Empire
Land of the Light and Night TLE [GWR] TLE [Hoi4] The Last Empire For the Future
  1. 태극기
  2. 국방부 소속 전투경찰이 사실상 군대 역할을 대신한다.
  3. 1999년 즉위
  4. 대한민주당, 2009년부터 재임 중
  5. 세계대전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황실이 붕괴하자 후대 황제에서 연산군과 광해군 같은 이가 나오면 황실이 붕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 그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6. GHQ 보고서 및 성조실록에 있는 성조의 발언에 의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