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마지막 제국


북중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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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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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계임) 제2대
위안스카이 리위안훙 펑궈장 쉬스창
(계임) (복임) (계임) 제3대
저우쯔치 리위안훙 가오링웨이 차오쿤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8대
우페이푸 옌시산 푸쭤이 후쭈왕
제9대 제10대·11대 제12대 제13대
하오보춘 리덩후이 자오쯔양 샤오완창
제14대·15대 제16대·17대 제18대 제19대
리위안추 우윈첸 왕치산 한정
제20대
차이잉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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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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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
국기[1] 국장
오족공화
五族共和
신해혁명 이전 통일 이후
대청제국 중화민국
상징
국가
경운가
국화
모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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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신해혁명
1915년 홍헌제제
1917년 호법전쟁
1926년 북벌전쟁 승전
1933년 탕산 격전
1937년 한중전쟁
1951년 중국내전
1968년 민주혁명
지리
수도
베이징
최대도시
베이징
위치
지구
동북아시아 중국 북부
주변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만주민국, 몽골,
동튀르키스탄, 티베트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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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6억 2800만명
공용어
중국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한자 (법정 문자)
민족
한족 97%
그 외 3%
국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군대
중화민국 국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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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이원집정부제, 양원제
대총통
차이잉원
부총통
마잉주
여당
인민민주당
경제 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통화
중화민국 위안 (元)
위치
수도 베이징의 전경

개요

중화민국 (Republic of China)


중화민국, 또는 중화민국 북경전민정부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국가로, 남쪽에 있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대조시키기 위해 북중국, 혹은 자유중국으로 불린다.

1915년 홍헌제제를 반포한 위안스카이를 끌어내린 후 차오쿤-우페이푸 연립정부가 설립된 이후 꾸준한 개발독재를 이어갔으며, 1968년 6.8 혁명을 통해 민주화에 성공, 현재 동아시아에서 대한국, 대일본제국의 뒤를 잇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역사

신해혁명

아편전쟁과 조청전쟁, 그리고 의화단의 난까지 혁명 직전 당시의 청조는 기둥만 남은 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남은 기둥까지 뽑게된 사건은 1911년 간선 철도 국유화였다. 국유화에에 반대하여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가 쓰촨에서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며, 10월 10일에는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니, 거의 모든 성이 이에 호응하여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12년 혁명파는 독립한 17개성의 대표를 소집하여, 난징을 수도로 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여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청조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화북 군벌인 위안스카이를 기용하여 중화민국이라 칭하는 반란군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혁명 정부와 내통하여 자신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는 것을 조건으로 선통제를 퇴위시키니 청조는 결국 붕괴하였다. 이후 수도를 베이징으로 돌린 그는 국회를 해산하여 독재를 강화하니, 혁명파는 그의 타도를 꾀하였으나, 오히려 쑨원이 위안스카이의 정치적 공세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쑨원도 사라지면서 강력해보이는 반대세력이 없어보인 위안스카이는 1915년 홍헌제제를 발표하여 연호를 정하여 태산에 오르나 수많은 반발 끝에 이를 무르고 1916년 병사한다.

1917년, 부원지쟁 과정에서 돤치루이가 대한제국 정부와 결탁하고, 김규흥의 흥화실업은행을 통해 대규모 차관을 도입하려다 폭로된 '김규흥 차관' 사건이 발생한다. 1918년 대한제국 정부의 7개조 요구가 전달되고 이가 폭로되자 반한감정이 폭발하여 5.4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으나, 바로 진압 당하였다. 쉬수정의 외몽골 출병은 성공적으로 끝나 외몽골이 사실상 그의 영지가 되었고, 이는 후일의 안직전쟁에서 그가 개입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20년의 제1차 안직전쟁에서 바오딩에 이어 제2의 근거지인 뤄양마저 상실한 직예군벌은 격멸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중국의 내전 상태를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길 원했던 대한제국 정부는 돤치루이 정권에 김규흥 차관의 빠른 상환을 무기로 삼아 압박하면서 양측의 정전을 요구, 돤치루이가 굴복하면서 직예군벌은 가까스로 허난, 후베이, 후난, 장시 4개 성을 건사하게 된다. 환계와 직계의 타협을 통해 후난의 지배자로 인정받은 자오헝티에게 축출된 탄옌카이는 천저우로 후퇴하였고, 국민당의 후원을 받으며 재기를 노리게 되었다.

제2차 안직전쟁은 그로부터 2년 뒤에 발발하였다. 제1차 안직전쟁 때와는 달리 복수의 칼을 갈아온 직예군벌은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안휘군을 몰아붙이고, 쑨촨팡이 이끄는 남직예군이 허페이를 함락하고 난징으로 진입하는 등 안휘군벌의 근거지인 안후이성을 노략질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안휘군벌은 계파 내에서 '문치적 인사'[2]로 여겨지던 쉬스창의 임기를 연장하는 대가로 직예군벌의 점령지를 모두 인정하였다.

1923년에는 1년 남짓 연장된 쉬스창의 임기가 종료되자 차오쿤이 대총통 후보로 출마하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뇌물을 살포한 것이 발각되면서 안휘군벌과 공화주의자들의 공분을 사게 되는 차오쿤 회선사건이 일어나면서 북양정부는 부도덕하지만 정통정부로 등극하게 되었다. 같은 해 담조전쟁에서 자오헝티가 다시 한 번 승리하나, 이 과정에서 직예군벌이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공동의 적을 둔 안휘군벌과 국민당이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24년의 강절전쟁에선 쑨촨팡이 대승을 거두어 쉬수정을 외몽골로 내쫒았으며, 곧 안휘와 국민당은 합치하여 북벌을 추진하였다. 국민당의 공세는 맹렬하였으나, 정예화된 북양군을 타파할 수는 없었다. 25년 동계 공세는 국민당에게 이점을 제공하였으나,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게 되어 북양군과 국민혁명군은 지안 근교에서 구축된 전선을 기준으로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1926년, 1차 북벌 당시 국부군에 호응해 쓰촨성에서 난을 일으킨 양썬이 류원후이에게 토벌되었고, 뒤이어 쓰촨 남동부의 부유한 지역들을 다스리고 있던 류샹마저 격멸한 류원후이는 쓰촨성장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국민당에선 쑨원 사후 왕징웨이가 이끄는 국민정부 내각이 국민당의 '좌익적' 정책 강령을 천명하였고, 서산회의파, 태자파, 광서파 등이 이에 반발하지만, 군부의 수장인 장제스가 왕징웨이에게 적극 협조할 것을 선언하면서 국민당의 분열 위기는 억제되었다.

1년 후 1927년에는 룽윈이 쿤밍에서 정변을 일으켜 탕지야오를 축출하였고, 기존에 탕지야오가 후원하던 왕자례가 다스리는 구이저우가 무주공산이 되자, 신광서군벌은 객군 잔당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주페이더와 함께 독자적으로 출병해 왕자례의 항복을 받아내고 구이저우를 서남정무위원회의 휘하에 두었다.

산터우 일대에서 하이루펑 개혁운동으로 명망을 얻은 펑파이가 마오쩌둥 등의 게릴라 혁명가들과 협력해 싼밍, 난핑 등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고 '푸젠 소비에트'를 선언하였다. 쑨촨팡의 토벌군이 푸젠 내륙으로 진입하는 족족 격파되고, 기회를 노린 안휘군벌이 푸젠 동부 해안지대를 실효지배하게 되면서 쑨촨팡의 오성연군은 북직예를 고깝게 여기면서도 군사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종속되어 자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기, '산서왕' 옌시산은 본격적으로 직예에 합류하기로 결심하였다. 차오쿤이 우페이푸를 견제하기 위해 부른 옌시산은 능수능란한 수완을 이용하여 직예 내에서 그 세력을 키워나갔고, 오히려 차오쿤의 세력기반을 전부 내치고 직예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1933년에는 한국 하급 장교들의 일탈로 발발한 '친황다오 전투'의 책임소재가 총통에게 전가되면서 차오쿤은 말 그대로 허수아비로 전락하였다. 허수아비가 된 차오쿤은 1936년 직노예순열사에 머무르던 우페이푸는 공식적으로 부총통에 임명하였다.

한중전쟁

1936년 9월 한국에서 조작한 청도사건을 시작으로 여러 명분쌓기를 통해 한국은 군을 국경지대로 파견하였고, 1937년 2월부터 간간히 있던 도발사건은 한국과 중국 간의 불길한 전운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결국 7월, 오패부 방어선 노구교 인근에서 한국군의 선제공격으로 중국군과 한국군의 최초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양국군 모두 이 일을 쉬쉬하며 덮어가려 하였지만 한 연대장의 독단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을 수 있던 전쟁은 일어나게 되었다.

대한제국군은 우페이푸가 세워놓은 우페이푸 선을 뚫는 것은 당연히 무리라고 판단하여 조차지인 청도 인근에서 전차 등의 부대를 활용하여 우회, 최종적으로 직예 인근을 전부 포위하는 '뇌격' 작계를 발동, 천진시(市) 점령과 오패부 선 일부 돌파, 동부 산동반도 확보에 성공함으로 일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완전성공을 해내지는 못하였다. 1개월 안에 북경을 점령시킨다는 야심찬 이 계획은 장장 3개월에 걸쳐 북경공방전을 이어감에 따라 중국이 직예에 세워놓은 군수시설을 전부 후방지역인 낙양 인근으로 옮기는데 성공하여 한중전쟁의 장기화를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우페이푸 선으로 시간을 번 북양정부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들은 바오딩, 톈진, 베이징 등 화북지역에 있는 군수시설과 산업시설, 정부 기관을 후방지대인 뤄양으로 옮겨가며 전쟁을 이어갔으며, 결정적으로 베이징과 지난 학살 이후 혐한감정이 극에 달하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리하여 우페이푸와 차오쿤 정부는 각지의 군벌들에게 중국 연합전선의 창설을 제안하였고, 신강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군벌이 동의하면서 8년간 이어질 항쟁이 막을 올렸다.

한편 대한제국은 화북에 중국군의 시선이 몰림에 따라 허를 찌르고자 상하이로의 기습 상륙을 감행하였다. 상하이는 성공적으로 장악하였으나, 우페이푸 정부와의 협조를 하기로 결정한 인근 군벌세력과 국민당 연합군은 자싱시 인근에서 한국군과 수차례 교전을 치루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었고 결국 남쪽을 통해 북양정부의 빠른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을 포기한 한국군은 목표를 바꾸어 국민당과 군벌세력의 토벌을 위해 난징으로 향하였다.

37년 10월이 되어 베이징을 점령한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12월에는 직예 대부분을 점령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부 전선에서 소소한 패전이 있긴 하였지만 대체로 한국군보다 약한 중국군을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진격하는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중국 정부에서도 항복선언과 평화협정을 할 수도 있다고 한국 정부는 생각하여 중재를 독일에게 맡기고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한국의 무리한 요구와 중국의 결사항전 의지로 결국 파토나고 이강 내각은 전쟁목표를 바꿔, 중국에서의 괴뢰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38년이 되면서 제국군은 중국 중부지역으로 침투하였고, 이때 카이펑, 우한, 그리고 남부 상륙작전인 '화려한 여행길'로 광저우와 포산, 선전 등을 장악하였다. 광저우 지역을 한국군이 점령하면서 많은 잔혹행위 역시 진행되었다. 이때까지 한국이 중국을 그대로 집어삼킬 줄만 알았으나, 전 중국이 오패부와 조곤의 연립 정부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로 모였고, 공간으로 시간을 벌음에 따라 한국은 중국에서의 전쟁을 소모전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개로 한국의 대륙타통작전을 통한 중국 중부지역 침투, 그 외 주요 항구도시 함락을 제외하면 39년에서 41년까지는 별다른 큰 전황의 변화 없이 지속된 소모전만이 이어졌다.

결국 한국이 1941년 미국과의 전쟁을 택하고, 일본까지 공격하게 되면서 세가 점점 약해졌고, 1943년에 전선에서 대대적인 역공격을 감행하며 뤄양을 되찾는 등의 성과를 내었다. 1944년이 되면서 광저우와 선전 등의 주요 항구도시를 되찾았고, 45년 3월달에는 황하를 넘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대한제국이 항복하게 되면서 전쟁은 끝이나게 된다.

중국 내전

전쟁 후에는 내부 군벌문제가 서서히 튀어나오고 있었다. 차오쿤이 전후 급사하면서 총통직에 오른 우페이푸는 군벌들을 정리할 때가 지금이 아니면 없으리라 생각하여 중앙군 확보에 치중하였고, 경제 회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북양정부와 직예군을 노렸다. 왕징웨이와 장제스는 유능한데다가 항한전쟁 때 전국적인 항전을 하면서 '중화의 영웅'이 되었고, 지난 북벌에서의 사실상 패전을 교훈삼아 칼날을 예리하게 갈았다. 결국에는 1950년 전쟁이 끝난지 5년만에 국민당의 선습으로 장장 3년에 걸친 중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난징에서의 포격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국민혁명군의 장강 도하는 당시 전투준비가 안되어 있던 북양군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The Last Empire
Land of the Light and Night TLE [GWR] TLE [Hoi4] The Last Empire For the Future
  1. 오색기
  2. 사실상 바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