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大韓
대한제국
大韓帝國
1929년-현재
국가 애국가
愛國歌
국목 오얏나무
국화 오얏꽃
국조
100%
수도 한성 (북위 37° 35′ 00″ 동경 127° 00′ 00″ / 북위 37.58333° 동경 127.00000° / 37.58333; 127.00000)
최대 도시
면적 1,546,109 km²
(아시아 8위, 세계 20위, 아시아의 3.47%)
대한 황제
1929년 - 1955년 신주 황제
1955년 - 1993년 정안 황제
1993년 - 현재 청천 황제
의정대신
부의정대신
독립 선언 1928년 9월 1일
부산 조약 1928년 9월 3일
한성 쿠데타 1929년 1월 16일
신대한제국 선포 1929년 1월 18일
신주 선포 1929년 1월 21일
정안 선포 1955년 8월 19일
청천 선포 1993년 6월 18일
인문 환경
인구 전체 인구 487,265,530명(2020년)
민족 구성 한국계 68.3%
만주계 11.5%
우크라이나계 6.6%
중국계 3.9%
러시아계 3.2%
기타 6.5%
인구 밀도 315.16명/km2(2020년)
출산률 ()
출생 인구 ()
사망률 ()
사망 인구 ()
기대 수명 ()
성비
GDI
HDI
공용어 한국어
지역어 만주어 화어 유구어 일본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공용 문자 한글
문해율 99.2%(2020년)
종교 무교 57.5%
개신교 21.4%
불교 9.6%
천주교 3.4%
동방정교 2.9%
기타 5.2%
군대 대한군
세부 군대 육군 대한 육군
해군 대한 해군
공군 대한 공군
기타군 대한 시위대
행정구역
행정
구역
34개의 도
--개의 부
---개의 시
----개의 군
정치
경제
경제 체제 혼합경제
명목
GDP
전체 GDP
1인당 GDP
GDP
(PPP)
전체 GDP
1인당 GDP
수출
입액
수출
수입
화폐 공식 화폐 대한제국 원
국가
예산
1년 세입
1년 세출
통계
자료
경제성장률
고용률
실업률
지니계수
코드와 단위
ccTLD .kr
국가 코드 410, KR, KOR
국제 전화 코드 +82
단위 법정연호 서력기원, 정안
시간대 KST (UTC+9)
도량형 SI 단위
날짜형식 YYYY-MM-DD
운전석
(통행방향)
왼쪽
(우측 통행)
외교
UN UN 가입 1945년 10월 24일
UN 회원국
승인 여부
창립국
수교국
무비자
입국
180일
90일
60일
30일
15일
여행 경보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대한국
봉천 군벌
대만 공화국
남양 군도
일본
소련
유구국

대한제국(大韓帝國, 영어: Korean Empire 코리안 엠파이어[*], 일본어: 大韓帝国 (だいかんていこく) 다이칸데이코쿠[*], 중국어: 大韓帝國 다한디궈[*]) 혹은 대한(大韓, 영어: Korea 코리아[*], 일본어: 大韓 (だいかん) 다이칸[*], 중국어: 大韓 다한[*])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써, 서쪽으로는 중화민국이, 동쪽으로는 일본,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필리핀 등과 접하고 있다. 수도는 한성이며, 부산, 평양, 대련, 봉천, 장춘, 회령, 염포, 대북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한국어가 공용어이며, 북부에서는 만주어중국어가 북동쪽에서는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남쪽에서는 유구어 등이 지역어로써 사용된다. 서력기원을 사용하는 동시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 공식적인 국명은 대한제국대한이나, 국내에서는 한국(韓國), (韓) 등으로도 사용되며, 일본령 조선 이전 존속하였던 대한제국 (1897-1910)과 구별하기 위해 신대한제국(新大韓帝國) 혹은 신한국(新韓國)이라 불리기도 한다.

약 3만에서 4만년전, 한반도에 고대 인류가 출현한 뒤로, 기원전 2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건국한 조선을 시작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삼국시대남북국 시대, 고려를 거치며, 1392년, 태조에 의해 대조선국이 건국된다. 대조선국은 약 500년 동안 단일의 왕조이 존속해왔으며, 17세기에 들어 열강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1897년에는 27대 국왕이던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로 바꾸며 대한제국 (1897년-1910년)이 선포되었다. 광무개혁과 같이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음에도,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에 대한 다른 열강들의 영향력을 걷어낸 일본 제국에 의해 합병당하였다. 1929년, 관동군의 독단적 행위로 인해 봉천 군벌과의 사이가 파탄에 이른 일본 제국 내부에서는 관동군에 대한 처벌을 두고 분열되었고, 이는 내전으로 치닫는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난징 국민정부봉천 군벌과 손을 잡고 조선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여 독립을 이룬다. 그러나 독립 이후 건국된 대한국은 국내의 분열으로 인해 '국가 안정'을 명분으로 한 한성 진군에 의해 문민 정부는 붕괴된다. 한성 진군 이후 군부는 황정복고를 선언하고 의친왕대한 황제로 옹립한다. 건국 이후 신주개혁을 시행하며 광무개혁의 후신 개혁을 진행하였고, 봉천 군벌과의 전쟁을 통해 개혁의 필요를 증명하였다. 신주 개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신주 북벌이나 신주남정 등의 팽창 정책을 채택하며, 주변국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 인해 서양 세력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왔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함으로써 동맹을 체결하였고, 이후에는 팽창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국제에 의해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국가이다. 대한제국의 국가원수는 대한 황제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대한제국군을 통솔한다. 전주 이씨가의 청천 황제가 즉위 중에 있으며, 가 법적 계승자로 있다. 대한제국 의정대신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한제국의회에 의해 선출되어 궁내부원수부를 제외한 내각을 이끈다. 대한제국의회는 대한제국의 입법부로써 대한제국 중추원대한제국 추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제국 중추원은 도 단위의 대선거구제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6년의 임기를 지니며, 대한제국 추민원소선구제 선거를 통해 4년의 임기를 지닌다. 추민원에서 가결된 법안은 중추원에서 다시 논의되어 법안을 부결시킨후 추민원으로 되돌려보네거나 통과시킨후 대한 황제의 승인을 받아 공표된다. 대한제국 대법원은 대한제국의 최고 사법부로 1명의 대법원 대법관과 --명의 대법원 법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3심제에 의해 항소상고를 거친 사건을 판결하거나, 대한제국 국제에 반하는 법안을 판단하고 법안을 무효화시킨다.

국명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여러 해석이 있다.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광무 황제대한제국 (1897-1910)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조선이라는 이름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한(韓)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이름이며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므로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당하다"고 밝혔다.

대한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구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면서 일본령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뀜과 동시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1928년, 해방으로 인해 대한국이 선포되면서 다시 사용되었다. 이후 1929년 한성 진군 이후 왕정복고되면서 "신대한제국", "대한제국", "신한국"이 선포된다.

일본, 중화민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제국을 간단히 한국(중국어 간체: 韓國, 주음 부호:ㄏㄚㄋˊㄍㄨㄛˊ한궈, 일본어: 韓国 (かんこく) 칸코쿠[*], 베트남어: Hàn Quốc한 꾸옥)이라 부른다.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불리는데, 이 명칭의 시초는 중세 왕국인 '고려'라는 국명이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전해지면서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진 것이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제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Korean Emprie로서, 약칭 'K.E.'로도 사용된다.

구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 지방이 된 것으로부터 Chosen이라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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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역사

조선 독립 전쟁

1928년 6월 4일, 관동군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에 의해 황고둔 사건이 발생한다. 봉천 군벌의 수장인 장쭤린은 암살을 피해갔으나, 이로 인해 봉천 군벌일본 제국과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화하였다. 일본 제국 군부 내에서는 해당 사건을 일으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의 처분을 놓고 통제파황도파로 분열되어 6월 15일, 통제파의 쿠데타가 발생한다. 쿠데타는 곧바로 내전으로 번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이용하여 독립을 쟁취하기로 한다. 황고둔 사건으로 봉천 군벌난징 국민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면서(동북역치) 대한민국 임시 정부국민정부 뿐 아니라 봉천 군벌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28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조선 독립 전쟁을 선포한다. 8월 13일, 봉천에 주둔한 관동군을 공격함으로써 봉천 전투를 개시하였으며, 관동군 수적 열세로 인해 봉천역에서 열차를 통한 후퇴 작전을 진행하였다. 후퇴한 관동군은 상당한 양의 무기를 두고 탈출하였고, 독립군은 이로 무장한다. 이후 8월 19일, 관동주보란점에서 대련 전투가 시작되어, 독립군 측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군대를 둘로 나눠 공격적인 작전을 취한다. 8월 22일, 보란점은 점령되었으며, 대흑산을 사이에 두고 금주에 전선을 형성하였다. 독립군은 계속해서 대련 끝자락으로 공격해나갔고, 관동군은 본토의 지원을 원할하게 얻지 못함에 따라 계속해서 패퇴해나갔고, 결국 8월 26일, 대련관동군은 항복하였다.

요동에서의 두번의 전투 끝에 관동군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일본령 조선의 영토에는 100여명의 주둔군 밖에 남지 않았다. 8월 28일, 단동에 있던 독립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한다. 십만의 병력이 한반도 주요 대도시로 철도를 통해 이동하였으며, 8월 31일에는 이틀간의 교전 끝에 경성이 함략된다. 1928년 9월 1일, 조선 총독부 청사에서 대한국이 선포된다. 9월 3일, 부산에서 제4대 조선 총독야마나시 한조부산 조약이 체결된다. 부산 조약에 의해 일본령 조선은 해체되었고, 배상금과 관동주의 일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한성 진군

부산 조약의 체결 이후 10월 1일, 제1회 대한국 총선이 실시되어 제헌의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전까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로 다른 이념의 집합체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국은 새로운 국가의 정치 이념과 관련되어 분열되었다. 반년 가까이 헌법은 채택되지 못하고 1장에서 논의가 벗어나지 못하였고, 결국 1929년 1월 16일, 군부는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의회를 점거한다. 김원봉 등의 좌익 장교들은 이에 대항하여 한성으로 진격하였으나 저지당한다. 한성 진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됨에 따라 군부 내부에서는 군사독재를 옹호하는 자들과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자들으로 나뉘어졌다. 하루 동안의 논의 끝에 왕정복고로 그 의견이 모아졌으며, 이범석대한 황제 임시 권한대행으로써 1월 18일 대한제국이 선포된다. 군부는 광무 황제의 삼남인 의친왕대한 황제로 추대하였고, 의친왕은 이를 수락하며 1월 21일 즉위한다.

신주개혁

1929년 2월 17일, 경제, 교육, 제도, 군사 등 다방면의 분야에 대한 개혁인 신주개혁이 발표되고 실행된다. 프로이센의 여러 제도를 참고로 작성된 신주개혁은 수 십년전 광무개혁의 여러 개혁안들이 다시 등장했으며, 조세와 같은 몇몇 항목은 수정·보완되었다. 4월 15일에는 KIS 양무호의 이름을 딴 해군 계획인 양무 계획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1929년 4월 24일, 경흥의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수십명의 광부가 수장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광부들은 항의하며 안전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신주개혁으로 인해 광업 대부분이 개인으로부터 몰수당해 정부의 인수인계가 진행되던 상태였고 광부의 요구는 무시당한다. 이 과정에서 광부에 대해 폭행이 가해짐에 따라 4월 26일, 광부들은 파업을 일으킨다. 초기 며칠 동안은 평화적인 상황으로 흘러갔으나, 소련의 지원을 받은 조선 공산당이 광부들과 주변 노동자들을 부추기며 무력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무력 사태에 대해 진위대는 무력으로 진압을 개시하였고, 결국 5월 4일, 백여명의 사상자를 낸체 사건은 종료되었다.

제1차 한봉 전쟁

황고둔 사건 이전까지 봉천 군벌일본과 손을 잡고 간도 내 조선인과 독립군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황고둔 사건으로 봉천 군벌일본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고, 동북역치함으로써 난징 국민정부에게 복종한다. 이는 조선 독립 전쟁에 큰 힘이 되었으나, 대한국 때부터 봉천 군벌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한제국이 한국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간도에 대해 대한제국 (1897-1910)과 같이 영유권을 주장하는것에 더해, 부산 조약에서 대련의 일부를 봉천 군벌에게 반환하지 않고 여순도라는 이름으로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시키면서 갈등은 더욱 커졌다.

1929년 3월 23일, 봉천 군벌대련에 주둔하는 여순 진위대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제1차 대련 전투가 발생한다. 대련 전투로 인해 남아있는 민간인이 적었다고 해도 봉천 군벌은 시가지로 진입하였고, 여러 차례의 교전 동안 십 여명 정도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여순 진위대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을 이용하여 유리한 교전을 여러차례 진행하여 승리하였으며, 결국 3월 28일, 봉천군은 퇴각한다.

1929년 7월 10일, 봉천 군벌장쉐량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소련이 소유권을 지니고 있던 중동로를 무력으로 회수한다. 이에 대해 소련은 초기에는 외교적으로 해결을 원하였으나, 난징 국민정부봉천 군벌중동로에 대해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9월 19일, 봉소 전쟁이 발발한다. 9월 26일, 이를 틈타 대한제국 대련 진위대봉천 군벌이 선제 공격을 취했다 주장하며 제2차 대련 전투를 일으킨다. 제2차 대련 전투까지 대한제국이 승리하였고, 자신감을 얻은 대한제국은 간도 내 한국인 보호를 명분으로 도하한다. 이에 봉천 군벌은 항의하며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9월 30일, 제1차 한봉 전쟁이 발발한다.

10월 4일, 단둥에서 봉천 군벌의 선제 공격으로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는 안동이 점령당한 10월 8일까지 지속된다. 안동을 점령한 제1 진위연대안산을 향해 북상하였고, 여순 진위대 또한 금주를 점령하고 안산으로 진군하였다. 동부의 제1 진위연대두만강을 건너 10월 12일, 연길을 점령하였고, 연길의 간도인들을 징집하여 봉천군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1929년 11월 4일, 봉천 군벌안동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에게 관동주 전역과 대한제국 (1897년-1910년)이 주장하던 간도의 지배를 인정한다.

신주남정

제1차 한봉 전쟁의 승리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는 팽창 정책을 지지하는 여론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여론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1929년 5월 20일 개회된 제1회 대한 의회의 원내 정당들 또한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다. 정부 또한 예외는 아니여서 --- 내각은 기존의 소극적인 외교 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신주 북벌 개획을 작성하였다.

그러던 1930년 4월 18일,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구에서 4월 1일 일어났던 오사카-교토 봉기의 혼란을 이용해 독립 전쟁이 발발한다. 유구 독립군은 빠른 속도로 오키나와현 전역을 장악해나갔으며, 뒤늦게 위험성을 깨닳은 일본 정부는 4월 19일, 유구로 진압군을 보낸다. 이에 유구의 독립 운동에 예의 주시하고 있던 대한제국은 유구 독립 정부를 인정함과 동시에 일본에게 군대를 물리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강행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는다. 오사카-교토 봉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던 일본은 어쩔 수 없이 4월 18일, 도쿄에서 유구국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도쿄 협정을 체결한다. 도쿄 협정 이후로도 일본일본령 대만까지 해방하여 사실상 해외 영토를 잃고 다시 일본 열도에 고립되었다.

대만 공화국이라는 신생 공화국이 수립되자 대한제국은 반년 동안 증가한 영토 확장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고자 1930년 5월 8일, 남쪽에 대한 침략 계획인 신주남정 계획이 수립되었다. 대만 공화국유구국에 대한 강한 야욕을 지닌 신주남정 계획은 2차 대전이 종전되기 전까지 기밀 문서로써 존재하였다. 해당 계획에서 대만유구는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로 나가기 위한 관문에 불과하였고, 최종적으로 해당 계획은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까지를 목표로 삼았다.

1930년 6월 13일, 대한제국은 신주남정 계획에 따라 유구국과 외교권과 통행권·정박권을 대가로 국방과 독립을 보장하는 대한-유구 협정을 체결하였다. 9월 23일, 대한제국은 대만 공화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대만 공화국을 침공한다. 하루만에 대북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령한 대한제국은 25일, 항복 협정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고, 9월 28일, 대한령 대만을 수립함에 이른다.

제2차 한봉 전쟁

한중 전쟁

한소 전쟁

지리

지형

기후

정치

틀:대한의 정치

대한 황제

대한 황제
大韓皇帝
신주 황제
新主皇帝

1929년 - 1955년
정안 황제
正安皇帝

1955년 - 1993년
청천 황제
淸天皇帝

1993년 - 현재

대한 정부

틀:대한 정부

대한 의회

틀:대한 의회

대한 법원

행정 구역

틀:대한의 행정 구역

국방

경제

사회

인구

민족

종교

언어

교육

언론

복지

교통

문화

대외 관계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