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신한국)

Taegeuk of Korea.svg
대한
大韓
대한제국
大韓帝國
1929년
국가 애국가
국목 오얏나무
국화 오얏꽃
국조
Korean Empire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 한성부 (북위 37° 35′ 00″ 동경 127° 00′ 00″)
면적 1,546,109km2 (아시아 8위, 세계 20위, 아시아의 3.47%)


인문 환경


인구 전체 인구 487,265,530명 (2020)
민족 구성 한국계 68.3%
만주계 11.5%
우크라이나계 6.6%
중국계 3.9%
러시아계 3.2%
기타 6.5%
인구 밀도 315.16명/km2 (2020)
공용어 한국어
지역어 만주어 화어 유구어 일본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문해율 99.2%(2020)
종교 무교 57.5%
개신교 21.4%
불교 9.6%
천주교 3.4%
동방정교 2.9%
기타 5.2%(2020)
군대 대한제국군
세부
군대
육군 대한제국 황립 육군
해군 대한제국 황립 해군
공군 대한제국 황립 공군
기타 대한제국 친위대


하위 행정구역


행정
구역
35개의 도


경제


경제 체제 자본주의
화폐 공식화폐 (KRW,₩) (KRW)


코드와 단위


ccTLD .kr
국가 코드 410, KR, KOR
국제 전화 코드 +82
단위 법정연호 서력기원, 정안
시간대 KST(UTC+9)
도량형 SI 단위
날짜형식 YYYY-MM-DD
운전석
(통행방향)
왼쪽
(오른쪽)


외교


UN UN 가입 1945년 10월 24일
UN 회원국
승인 여부
창립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북서쪽으로는 요하송화강,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북쪽으로는 흑룡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맞닿아 있다. 수도한성부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애국가, 국화오얏꽃이다. 공용어한국어이며, 만주어, 화어, 유구어, 일본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등도 사용된다. 대한제국 국내에선 대한(大韓), (韓), 한국(韓國) 등으로 불린다. 과거에 존재했던 대한제국 (1897-1910)과 구분하기 위해 신대한제국(新大韓帝國), 신한국(新韓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호1929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1993년 6월 18일부터 청천서력기원을 사용한다.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은 1897년 건국된 대한제국부터 사용되었으며, 1928년 독립 이후 공화정인 대한국이 들어섰으나, 대한국 국회 내에서의 대립으로 인하여 민심을 잃었으며, 군부의 한성 쿠데타로 인해 공화정은 붕괴된다. 쿠데타 이후 군부 내에서는 독재파와 왕정복고파가 나뉘어졌으며, 결국 왕정복고파가 승리하여 왕정복고된다. 군부는 영친왕 대신 의친왕을 옹립한다. 신주 황제1929년 1월 18일에 즉위하며, 이 날짜는 독일 제국 건국 51주년으로, 독일 제국의 제도 등을 따라갈 것을 암시한다. 대한제국은 건국 직후부터 대공황의 여파를 받았으나, 제1차 한봉 전쟁에서 승전하면서 어느정도 해결하였다. 이후 남쪽으로는 일본공화 내전이 발생한 사이 대만대마도, 유구국, 남양 군도를 식민화하였고, 본토로도 편입한다. 북쪽으로는 베이징 국민정부와 손을 잡고 제2차 한봉 전쟁제3차 북벌으로 만주를 점령했으며, 한소 전쟁백력 조약으로 연해백력섬 (사할린)을 합병한다. 대마도만주, 연해를 합병한 이후 일본계, 만주계, 러시아계와의 갈등이 발생했으나, 시민권 인정 및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면서 갈등은 어느정도 사그라들었다.

국명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여러 해석이 있다.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광무 황제대한제국 (1897-1910)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조선이라는 이름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한(韓)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이름이며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므로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당하다"고 밝혔다.

대한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구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면서 일본령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뀜과 동시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1928년, 해방으로 인해 대한국이 선포되면서 다시 사용되었다. 이후 1929년 한성 쿠데타 이후 왕정복고되면서 "신대한제국", "대한제국", "신한국"이 선포된다.

일본, 중화민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제국을 간단히 한국(중국어 간체: 韓國, 주음 부호:ㄏㄚㄋㄍㄨㄛ한궈, 일본어: 韓国 간코쿠, 베트남어: Hàn Quốc한 꾸옥)이라 부른다.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불리는데, 이 명칭의 시초는 중세 왕국인 '고려'라는 국명이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전해지면서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진 것이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제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Korean Emprie로서, 약칭 'K.E.'로도 사용된다.

구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 지방이 된 것으로부터 Chosen이라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역사

틀:한국사 (신한국)

조선 독립 전쟁

1928년 6월 16일, 일본 제국에서 내전이 발발한다. 일본 제국에서 내전이 발발함에 따라 식민지와 중국에 대한 감시가 약해짐에 따라 난징 국민정부봉천 군벌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한국 광복군이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심양 전투대련 전투에서 관동군을 궤멸시킨 후, 1928년 8월 16일, 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한다. 8월 31일경성부가 함략당했으며, 9월 1일대한국의 독립이 선포된다. 9월 3일, 부산부에서 부산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독립이 성취되었다.

대한국

부산 조약으로 일본 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결집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부의 여러 사상에 의해 대한국 정부는 분열된다. 1928년 10월 1일, 제1회 대한국 총선이 치뤄졌으나, 헌법 제정은 국회 내 대립으로 인해 1달 동안 지지부진 되었다. 11월 1일이 되어서 드디어 대한국 헌법이 선포되었으나, 국회 내 좌우 대립은 여전했다. 국회 내 좌우 대립으로 인해 문제들이 계속 발생했으며, 국민 또한 분열되었다.

9월 3일 창설된 대한군 군부는 우파의 비중이 압도적이였으며, 조선 공산당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 다수였다. 이에 1929년 1월 16일, 경성부에서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한다. 경성 쿠데타는 성공적이였으며, 국회는 폐회되고 정부는 군부에 의해 점거된다. 쿠데타 성공 이후 군부 내에서는 독재파왕정복고파 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으나, 왕정복고파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1월 18일, "신대한제국"이 선포된다. 군부는 의친왕을 왕으로 옹립하였으며, 의친왕신주 원년 1월 21일 즉위한다.

개혁과 봉천과의 갈등

1929년 1월 23일, 정치, 행정, 제도, 군대, 교육 등 여러 방면의 근현대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무진 개혁안이 발표된다. 대부분의 부분이 독일 제국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일부분에서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월 28일에는 과거 십삼도제에서 여순도를 추가한 십사도제가 발표되었다. 4월 15일에는 구대한제국의 최초의 근대적 군함인 KIS 양무의 이름 딴 해군 증강 계획인 양무 계획이 발표된다.

대한제국은 봉천 군벌과 건국 이전부터 봉천 군벌 붕굉 이후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 독립 전쟁에서 동북역치로 인한 여러 도움을 받았으나, 황고둔 사건 이전까지 일본 제국과 친선을 유지하며 간도 내 한국인을 박해했던 것과 대한제국의 간도의 영유권 주장, 여순항 소유 등이 그 이유였다.

1929년 4월 26일, 경흥군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을 조선 공산당이 봉기를 일으킨다. 봉기는 하루만에 진압되었으나, 다음날인 4월 28일, 조선 공산당을 금지함과 동시에 공산주의 정당 자체를 금지한다. 이후 1929년 5월 1일, 제1회 대한 제국의회 선거가 치뤄졌으며, 5월 4일 제1회 대한 제국의회의 개회가 선포된다.

1929년 3월 23일, 봉천 군벌의 선제 공격으로 인해 여순항에서 봉군대한제국군 간의 교전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은 봉천 군벌에 이를 항의하였으나, 봉천 군벌여순에 대한 대한제국의 불법 점거를 규탄하였다.

제1차 한봉 전쟁

1929년 5월 19일, 봉천 군벌의 수장인 장쭤린이 사망한다. 장쭤린 사망 후 장쉐량봉천 군벌의 수장이 되었다.

1929년 7월 10일, 장쉐량봉천 군벌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소유하던 동청 철도(중동철도)를 회수한다. 봉천 군벌동청 철도를 회수한 다음날, 중화민국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단교를 취한다. 단교 이후 소련봉천 군벌에 대한 군사적 활동을 개시하였고, 두 국가 사이의 무력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봉천 군벌과 건국 이후부터 마찰을 빚고 있던 대한제국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봉천 군벌에 대한 군사적 행동이 진행되고 두 국가 사이의 갈등이 발생할 것으로 보이자, 두 강대국에게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총동원령을 선포해 언제든지 전쟁에 끼어들 수 있게 준비하였다. 이에 봉천 군벌은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소련은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1929년 9월 19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봉천 군벌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게 된다. 9월 26일, 대한제국군의 선공으로 대련에서 봉천군대한제국군의 국경전투가 발생한다. 대한제국은 이를 봉천 군벌의 선제 공격으로 인한 전투라 주장했다.

대련 국경 전투대한제국의 승리로 돌아가자, 봉천 군벌에 대한 승리를 확신한 대한제국은 9월 30일, 간도 내 한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봉천 군벌의 국경을 침범, 이에 봉천 군벌은 대한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10월 4일, 봉천 군벌의 선공으로 압록강 전투가 발생한다. 전투는 숫적으로 우세한 대한제국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으며, 점차 방어전에서 공격전으로 바뀌었다. 대한제국은 단둥10월 8일에 점령함으로써 전투는 대한제국의 승리로 끝난다. 압록강 전투 이후 대한제국은 서부에서 발생한 여러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여 점차 진격하였다. 10월 12일, 대한제국은 연변으로 진격을 개시한다. 산악병과 경보병을 이용하여 산악을 통해 연변으로 침투하였고, 이후 본대를 통해 연변을 점령해 나간다. 이미 침투한 부대들은 봉천군의 후방을 교란했으며, 본대는 그 틈에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1929년 11월 4일, 양면 전선에 부담을 느낀 봉천 군벌은 대한제국과 단동에서 의정서를 체결한다. 단동 의정서에 의해 대한제국은 구대한제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던 간도 일대와 대련만 이남의 대련를 획득하게 된다.

남방 식민지

1930년, 일본민주국의 정치는 점차 불안정해져갔다. 내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었으며, 외부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1930년 4월 1일, 오사카교토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점차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이에 일본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면서 강경하게 진압을 해나갔다. 그러나 봉기는 쉽사리 진압되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지속되었다.

일본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발생하자, 4월 18일오키나와현에서 급진 독립 단체에 의해 유구 독립 전쟁이 발생한다. 이에 일본 정부는 4월 21일유구국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유구국은 쉽게 독립을 쟁취한다. 1931년 6월 13일, 유구국오사카-교토 봉기가 종결된다면 일본이 다시 유구를 재침공할 것이라 생각하여 대한제국과 보호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유구국은 대한제국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군대가 유구 내에 진주하게 된다.

오사카-교토 봉기로 인해 일본민주국일본령 대만을 해체시켰고, 대만은 갑작스럽게 독립을 얻게된다. 그러나 독립 이후 대만 공화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불안정해 점차 민심을 잃어갔다. 제1차 한봉 전쟁의 승리로 팽창주의적 정책을 펼치던 대한제국은 1930년 9월 23일, 대만을 침공한다. 대한제국은 타이베이시에 무혈입성하였으며, 다음날인 9월 25일, 대만 공화국은 대한제국에 항복한다. 대만 공화국의 항복 이후 대만 내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대만인들은 순순히 대한령 대만 정부를 인정한다.

1931년 8월 4일, 국제연맹남양 군도의 수임국인 일본의 국내가 혼란스러워 통치가 제대로 되지 않음을 확인하여 일본에게서 남양 군도의 수임국의 지위를 빼앗고 대한제국을 수임국으로 지정한다.

1933년 10월 3일, 일본나고야에서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는 순식간에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은 대마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대마도를 침공한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항의를 했으나, 군사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했다. 10월 16일, 대마도에 대해 대한제국과 일본민주국이 조약을 체결한다. 대한-일본 협정으로 대마도는 대한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대가로 일본민주국 정부를 일본의 정부로 인정,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