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민주화 운동
Deutsche demokratische Revolution
1962 German Democratic Revolution
시위하는 군중들과 합류하는 독일군 군인들
Garantiert freie Abstimmung!, Garantiert Frauenwahlrecht!, Garantiert Meinungsfreiheit!, Auf geht's zurück nach Weimar!
자유 투표을 보장하라!,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라!, 표현의 자유을 보장하라!, 바이마르로 돌아가자!
기간
1962년 4월 19일 ~ 6월 4일
지역
베를린, 프랑크푸르트등 독일 전역
원인
독일 군부의 국가보안령 선포, 베노 오네소르그 사망 사건
충돌 새력
제국 정부 시위대
제국 정부

군부

학생 시위대

독일 노동조합
제국군 반란군

주요 인물
제국 정부 시위대
빌헬름 3세

알프레드 요들
빌헬름 리스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루디 두치케

빌헬름 피크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

결과

개요

독일 민주 혁명(Deutsche demokratische Revolution)은 천군: 1962 세계관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1962년 4월 19일 ~ 6월 4일까지 벌어진 내전, 혁명으로 독일의 군주정이 복고된지 30년도 안되서 다시 독일을 공화국으로 바꿔버린 역사적인 사건이다.

배경

1936년 반나치 국방군 장교단과 융커, 민주주의 지지자들이 힘을 합쳐 나치를 몰아낸 이후 민주주의자들은 복원된 독일 제국은 당연히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민주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쿠데타로 복위된 빌헬름 2세는 권위있고 효율적인 제국을 만들고싶어했고 이는 쿠데타의 주역인 군부와 융커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독일의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엔 국민들도 황제의 결정에 불만을 품었지만 독일이 이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러시아 해방 전쟁에서 승리하며 범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초강대국이 되자 이런 불만들은 점차 사그라져갔다.

전쟁 이후 빌헬름 2세는 승전으로 강력해진 권력으로 군부와 귀족 계급을 견제하며 군부와 귀족들이 권력을 남용하는걸 막았고 국민들에게 어느정도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보장하며 국민들의 불만도 어느정도 잠재우는 정책으로 본인의 황권을 지키면서 국민들의 요구도 어느정도 수용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사용했지만 1950년 빌헬름 2세가 승하하고 황태자였던 빌헬름 3세가 황위에 오르자 문제가 터진다.

철권을 휘둘렀던 빌헬름 2세가 죽고 빌헬름 3세가 황제가 되자 군부는 빌헬름 3세를 압박하였고 황위에 오른지 얼마 안되어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빌헬름 3세는 결국 군부에게 권력의 상당수를 넘겨주고 만다. 이후 권력을 잡은 군부는 국가보안령을 반포해 빌헬름 2세 시절 허용됬던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대대적으로 제한하고 국영방송국 히나를 제외한 언론사들을 모두 해체하여 독재의 기반을 다졌다.

군부의 이런 행위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 특히 빌헬름 3세와 군부독재 이후에 출생한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펼쳐지며 독일은 혼란에 휩싸인다. 그러던 중 군대의 과격진압으로 시위에 참여한 학생 중 하나였던 베노 오네소르그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시위는 점차 과격화된다.

전개

과격화된 시위대가 군대의 진압작전에 대응할 수단이 필요하다며 경찰서를 습격해 볼트액션 소총과 경기관총등을 약탈해 무장하게 되고 진압을 위해 출동한 헌병대와 교전하며 더 이상 '시위'라고 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정부는 정규 보병과 기계화 사단을 투입하여 이들을 진압하게 된다. 특히 수도인 베를린에서는 거의 시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진압 과정에서 무장한 학생 민병대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창문으로 밖을 살펴보던 사람 등 시위와 관련 없는 민간인들의 피해 억시 커졌고 정부군이 전차포의 사용을 허가하면서 재산피해 또한 커졌다.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놀란 학생 민병대는 대부분 해산하며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첫번째 폭동 이후 정부군의 진압에 피해를 입은 시민들은 정부에게 보상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전부 학생 민병대가 저지른 일"이라며 보상을 거부했다. 심지어 보상을 요구한 피해자들이 학생 민병대와 연루됬다며 국가보안령 위반으로 체포하는 막장 행위까지 저지르자 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분노도 극의 달하며 많은 국민들이 학생 민병대에 지지를 보내는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당시 정부의 대한 불만은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군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청년파로 불리던 군 내부에 젊은 장교들과 전차 장교들은 보병과 포병 중심의 보수적인 전략, 전술만을 지지하던 군 고위인사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특히 급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하인츠 구데리안의 아들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을 필두로 한 전차 지지자들은 이번 혼란을 자신들이 실권을 잡을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구데리안은 학생 민병대와 민병대와 협력하고 있던 노동조합과 접촉하여 혁명 이후의 군부의 이권 보장을 대가로 협력을 제안하고 민병대의 수장 루디 두치케가 이를 승낙하며 1960년 6월 2일 '늑대 사냥 작전'으로 명명된 쿠데타 작전이 실행한다.

6월 3일 새벽 베를린에 주둔중이던 구데리안 휘하의 제19 전차대대와 제60 전차대대가 국가의회, 국방부, 육군참모본부, 황궁등 주요 시설을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했고 진압의 불만을 지닌 누군가가 반란을 일으킬걸 어느정도 예상했던 군부는 나름 주요 시설의 방어에 신경을 써놨었지만 전차부대가, 그것도 제국에서 최정예 기갑사단으로 취급되던 구데리안의 기갑사단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고 결국 대부분의 주요 시설을 상실하고 알프레드 요들 수상을 포함 군부 주요 인사들이 체포당하면서 구데리안은 쿠데타에 성공한다.

하지만 황실근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황제 빌헬름 3세가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면서 계획은 틀어지게된다. 학생 민병대와 노동조합은 이참에 바이마르 체제를 복원해 공화국을 만들어야된다고 주장하고 구데리안은 황제를 설득하여 불러내 입헌군주국을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등 두 새력의 갈등까지 생기며 상황은 안좋게 돌아간다.

다행히 구데리안이 입장을 철회하고 민병대와 타협해 정권을 학생 운동가들과 노동조합이 연합한 좌파 연립 내각에 이양하여 독일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혁명은 성공으로 끝난다.

영향

유럽의 맹주였던 독일이 붕괴하면서 유럽의 판도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특히 독일의 괴뢰국이였던 프랑스가 사실상 독일의 통제를 벋어나면서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렇게 쿠데타를 성공시킨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은 이후 단검의 밤 사건으로 다른 구 군부 지휘관들과 함께 토사구팽 당하면서 체포되었고 독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 군주정이 복원될 때까지 옥살이를 하게된다.

또한 독일 민주 혁명 + 단검의 밤으로 독일군 장교 중 80%가 해임되며 독일 국가군은 지휘 공백으로 막대한 혼란과 질적 저하가 발생하였고 이는 독불전쟁에서 독일이 패전하는 큰 사유가 된다.

또한 원래 빌헬름 3세의 친이탈리아 왕국 정책으로 사이가 틀어지던 독일-오스트리아 관계는 오스트리아가 빌헬름 3세의 망명을 허용하면서 완전히 틀어져 독불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선언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상황이던 이탈리아 왕국은 이 혁명으로 자국의 시위대가 자극받을 것을 우려해 민주주의자들과 교섭하여, 움베르토 2세를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하게 된다. 독불전쟁 패전 이후 군주정이 복원된 독일과 다르게 이탈리아는 패전 이후에도 공화국이 유지되게 된다.

대한제국은 의외로 혁명군이 아닌 제국 정부를 지원했고[1] 이 덕에 독일 군주정 복원 이후 독일과 대한제국의 관계가 점차 게선되게된다.

  1. 한국 또한 민주주의지만 거의 반 독재식으로 운영된 국가라 자신들도 혁명 터지면 좋은게 없기도 했고 냉전의 라이벌인 미국이 혁명군을 지원해 그런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