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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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tonia
Jamatonia
大和国
야마토니아
Flag of Yamatonia.png Seal of Yamatonia.png
국기 국장
표어 "東方のローマ"
"동방의 로마"
국가 "大和の賛歌"
"대화찬가"
Japan on the globe (de-facto) (Japan centered).png
지구상의 야마토니아의 위치
수도 교토(京都) 북위 35° 0′ 42″ 동경 135° 46′ 6″ / 북위 35.01167° 동경 135.76833° / 35.01167; 135.76833
최대도시 도쿄(東京)
정치
공용어 야마토니아어 (Yamatonian)
지역어 오키나와어 (Okinawan)
아이누어 (Ainu Itak)
정부 형태 입헌군주 내각제
황제 고니시 7세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역사
성립  
 • 로마 가톨릭 전파 1549년 8월 15일
 • 다이묘 개종 1550년대 ~ 1580년대
 • 바테렌 추방령 1587년 7월 24일
 • 키리시탄 동맹 1587년 8월 27일
 • 고니시 막부 1603년 5월 7일
 • 대화 열도 개종 1600년대 ~ 1620년대
 • 황제 선언 1868년 1월 12일
 • 헌법 제정 1890년 11월 14일
 • 대동아 성전 1910년 8월 29일
 • 샌프란시스코 조약 1951년 9월 8일
지리
면적 377,944km² (61 위)
내수면 비율 0.8%
시간대 YST (UTC+9)
DST 없음
인구
2011년 어림 125,470,000명
2017년 조사 126,748,930명 (10위)
인구 밀도 337.1명/km² (40위)
경제
GDP(PPP) 2017년 어림값
 • 전체 54,324억$ (4위)
 • 일인당 42,860$ (24위)
명목 4,852,075,789,330$ (3위)
HDI 0.903 (17위, 2016년 조사)
통화 엔(YMY, ¥) (YMY)
기타
ISO 3166-1 392, YM, YMA
도메인 .ym
국제 전화 +81

야마토니아 또는 대화국(大和国, 영어: Yamatonia, 독일어: Jamatonia 야마토니아[*]) 약칭 대화(大和)는 동아시아에 있는 국가다. 국토는 태평양에 위치한 대화 열도의 네 개의 섬인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와 오키나와 제도 및 그 부속도서로 구성되어있다. 총 6,85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이며, 이 중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주요 네 개 섬이 전체 국토의 97%를 차지하고 있다. 야마토니아의 국토를 이루고 있는 섬 중 대다수가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섬이다. 총면적은 377,944㎢로 이는 한반도의 약 1.7배이고 말레이시아와 독일보다는 크며 스발바르 제도를 포함한 노르웨이보다는 작다. 면적순으로는 세계 61위다.

야마토니아의 인구는 약 1억 2,700만 명으로, 세계에서 10번째로 많다. 이중 교토 시와 수도권인 교토 도, 간사이 지방 경제 중심지인 오사카 시를 비롯한 오사카 부 일대, 최대 도시인 도쿄 부와 그 주변 현들로 이루어진 대도시권에만 5,70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수도인 교토는 야마토니아의 대일본제국으로서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황제 고니시 2세가 제국주의의 잔재인 도쿄에서 다시 교토 어소로 돌아오면서 수도가 되었다. 교토와 오사카, 도쿄는 각각 서 야마토니아와 동 야마토니아의 문화, 경제, 정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야마토니아는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인간개발지수는 2016년 기준 세계 17위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1위 이다. 야마토니아는 또한 아시아 에 위치한 국가 중에서는 러시아를 제외하고 G8에 들어가는 유일한 국가이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유엔 및 세계 보건 기구에 따르면 야마토니아는 영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낮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수명을 기록하고 있다. 구매력 평가 기준 세계 4위, 명목 기준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며, 애니메이션,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를 선도하는 강대국이다.

국명

공식 국명인 대화국(大和国, 야마토코쿠)는 1868년 고니시 1세의 황제 선언 이전부터 대화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부를때 사용해왔던 비공식적인 국명이었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야마토니아를 일본(日本, 니혼)으로 불렸으며, 이 점 때문에 대화 역시 외교 시에는 일본이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유럽을 비롯한 서양 국가에선 고니시 막부가 교황청에 서신을 보낼 때마다 사용해온 국명인 '야마토인의 나라'라는 뜻의 야마토니아(영어: Yamatonia, 독일어: Jamatonia)라 불리고 있다. 이후 고니시 1세가 황제 선언 당시 국명을 대일본제국(大日本帝国, 다이닛폰테이코쿠)으로 결정하며 일본이 공식 명칭이 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일본이라는 이름을 기피하게 되었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꾸준히 사용해오던 '대화'를 공식 국명으로 채택, 법제화했다. 하지만 올림픽 대회나 월드컵과 같은 국제 행사에선 수 백년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름인 야마토니아라는 국명을 사용한다.

역사

로마 가톨릭의 전파

야마토니아는 동아시아 최초의 가톨릭 국가이다.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신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대화인 무사 야지로를 포함한 7명의 일행과 큐슈 남부의 사츠마 국과 오스미 국(현재 가고시마 현)에 상륙하여 선교를 시작하면서 로마 가톨릭이 대화 열도에 전해졌다. 하비에르 일행은 1549년 9월 29일,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의 초대로 그의 성을 방문했고, 화승총을 선물했다. 크게 기뻐한 다카히사는 가톨릭 전도를 허용했고 종교의 자유까지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의 길"이라는 가톨릭 관련 책을 대화어로 발간했다. 하비에르 신부는 "공교요리"(公敎要理)라는 가톨릭 교리 해설서도 썼다. 이를 읽고 감명 받은 베르나르도라는 무사가 하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미켈이라는 농부를 포함한 15명이 신자가 되었다. 그 후 1년간의 가톨릭 선교로 신자가 100명~150명까지 늘었다.

하지만 대화 열도의 지배적인 종교였던 신토와 불교 신자들의 반발로 시마즈 다카히사가 가톨릭에 다시 냉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1550년 성탄절 전, 하비에르 신부는 야지로에게 교인들을 맡기고 교토로 향했다. 히라도 섬(현재 나가사키 현), 나가토 국과 스오 국(현재 야마구치 현)을 거쳐 교토에 갔지만 고나라 덴노는 하비에르 신부를 만나주지 않았고 1551년 3월, 별다른 성과 없이 다시 스오 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예수회와 하비에르 신부는 당시 스오 국을 통치하던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과 기타 서양 물품을 선물했고 크게 기뻐한 요시타카는 '대도사'라는 빈 절을 교회 건물로 내줄 정도로 하비에르의 전도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몇 개월 간의 전도 활동 후 하비에르 신부는 중국 전도를 위해 명나라로 떠났다. 그 후 큐슈에서는 가톨릭이 성행했고 다이묘들 역시 미리 대화에 도착해있던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화승총과 같은 신식 무기들과 선진 문화들을 수용하면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가톨릭 선교를 허용했다.

다이묘 개종

사실 당시 다이묘들은 순수하게 신앙을 목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에스파냐 같은 서양 국가들의 상인들로부터 들여오는 각종 사치품들과 무기들은 다이묘 자신의 세력 과시와 전장에서의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었고, 이러한 서양 문물의 지속적인 수입을 위해서라도 상인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다이묘들에게는 가톨릭은 그저 서양 국가들과의 무역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에스파냐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코스메 데 토레스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오무라 스미타다(바르톨로메오)를 시작으로, 아리마 하루노부(돈 프로타시오), 오토모 소린(돈 프란시스코), 구로다 요시타카(시메온), 고니시 유키나가(아우구스티노), 타카야마 우콘(유스토), 나이토 조안(돈 주앙), 가모 우지사토(레온), 츠츠이 사다츠구 등의 다이묘들이 세례를 받거나 가톨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을 키리시탄(キリシタン) 다이묘라고 불렀다. 특히 타카야마 우콘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에스파냐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자신이 다이묘가 되면서 하사받은 영지인 쇼도 섬에 초빙하여 주민들을 모두 가톨릭 신자로 개종시킬만큼 독실한 신자였다.

이에 예수회는 대화에서 커지는 가톨릭에 대한 관심을 기회로 대화에 관구를 설치하고 초대 관구장으로 가스파르 코엘료를 임명했다. 예수회는 적극적으로 선교에 나섰고 코엘료는 1586년 5월, 오사카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해 대환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코엘료에게 큐슈 정복과 조선에 출병해 명나라가 있는 중국 대륙을 침공할 계획을 털어 놓았으며, 예수회의 협력도 요청했다. 그리고 만약 중국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가톨릭 선교사들과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전쟁의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표면적으로는 코엘료에게 무장한 포르투갈 선박의 지원을 의뢰했지만, 사실 큐슈에는 예수회의 대화 선교의 본거지가 있었고 대다수의 유력한 키리시탄 다이묘들도 있었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을 포섭하여 큐슈를 손쉽게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자했다.

코엘료는 이런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큐슈의 다이묘들과 합동 작전을 하는 것은 어떤지 역으로 제안하기까지 했다. 사실 예수회는 선교를 우위에 서서 실시하기 위해 키리시탄 다이묘들을 지원하고자 1585년부터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함대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코엘료 뿐만 아니라 당시에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코엘료로서는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히데요시의 계획을 듣게 되어서 히데요시를 기쁘게 하면서도 자신들이 계획 중이었던 더 좋은 제안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 화가 되었다. 코엘료의 대답을 들은 히데요시는 큐슈의 키리시탄 다이묘들의 군대는 자신이 아닌 코엘료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큐슈 정벌 후 지쿠젠 국(현재 후쿠오카 현)의 하코자키궁에 체류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예수회령이었던 나가사키가 요새화 되어있는 것을 알게됐다. 히데요시는 이 때문에 예수회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코엘료의 실책은 계속되었다. 그는 한 척의 푸스타 선(Fusta 船)을 건조하고 대포를 구입했다. 게다가 코엘료는 그 함선을 타고 대화 열도 각지를 돌아다녔다. 히데요시가 큐슈 정벌을 위해 하카타(현재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에 왔을 때 코엘료는 마치 대제독과 같은 행색을 하고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했다. 1587년 6월 큐슈 평정을 끝마친 히데요시는 하카타 근처에 개선해 와서 같은 달 10일에 코엘료의 함선에 탑승해 하카타 만 위에서 매우 사이 좋게 대화를 나눴다. 히데요시는 선내를 상세하게 관찰하고 많이 칭찬하면서도 이것은 틀림없이 군함이라고 말했다. 히데요시가 본 코엘료의 포르투갈 군함은 매우 훌륭하고 압도적인 화력을 지니고 있었고,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과 키리시탄 다이묘들을 거느린 예수회에게 더욱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바테렌 추방령

1587년 7월 23일, 히데요시는 코엘료를 시험해보고자 4개 항목으로 되어있는 힐문서를 보냈다. 그러나 코엘료는 이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고, 바로 다음날인 7월 25일 히데요시는 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천하의 군(君)이 정한 바의 규칙'으로 불리는 바테렌 추방령을 반포한다. 바테렌은(Padre)는 신부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 고어로 바테렌 추방령은 사실상 가톨릭 선교의 전면 금지를 의미했다. 추방령이 반포되고나서 히데요시는 예수회가 소유하고 있던 나가사키와 같은 영지들을 전부 몰수해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이에 반발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타카야마 우콘은 자신의 영지, 관직과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스스로 추방자가 되어 같은 키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에 은거했다.

코엘료는 추방령 반포 직후 키리시탄 다이묘들에게 히데요시의 가톨릭 박해를 이유로 힘을 합쳐 대항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언제 대화를 떠날지 모를 예수회만 믿고 대화 열도의 통일을 목전에 둔 히데요시와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없는 무모한 행동이었고,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오직 타카야마 우콘만이 히데요시에게 권력의 포기를 통해 대항했다. 이에 우콘을 못마땅하게 여긴 히데요시는 자신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를 들어 본보기로 우콘의 영지였던 셋츠 국 미시마 군(현재 오사카 부 미시마 군)의 모든 교회를 불태우고 가톨릭 신자와 신부, 선교사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크게 분노했고 우콘과 자신이 초빙했던 예수회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를 자신의 성으로 불러 히데요시에게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예수회 신부들로 하여금 키리시탄 다이묘들과 신자들을 모아 군대를 결성하고자 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식스토 5세는 세스페데스 신부의 서신을 읽고 "스스로를 일본이라 칭하는 극동의 야마토 민족의 땅에서 형제자매들이 박해당하고 있다 합니다. 그들이 군대를 결성하여 군주의 폭정에 맞서고자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모든 가톨릭의 형제자매들은 즉시 함대를 꾸려 이들을 구원해주십시오."라고 가톨릭 왕국들에게 호소했다. 또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왕인 펠리페 2세(포르투갈에서는 필리피 1세)에게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비롯한 극동 국가들과의 독점적인 무역을 허용할테니 최선을 다해 싸워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는 가톨릭의 맹주를 자처한 펠리페 2세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기회였다. 자국의 선교사와 신부들이 히데요시의 가톨릭 박해로 인해 처형 당한 복수를 위해서라도, 또한 동아시아 무역의 패권을 교황청으로부터 보장받았기에 교황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펠리페 2세는 교황의 제안을 받자마자 즉시 필리핀에 있던 일부 군함들과 상선들을 징집해 대화로 출정시켰다. 거기다 에스파냐 본토에서도 정예 군인들과 화포로 무장한 함대를 추가로 출정시켰다.

키리시탄 동맹

1587년 8월 26일, 에스파냐의 필리핀 원정 함대가 나가사키 항에 정박했다. 에스파냐 군대는 히데요시의 감시 아래 숨죽이고 있던 가톨릭 신자들의 보호를 선언했고, 히데요시의 군대와 대치하기 시작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에스파냐 함대의 도착 소식을 들은 후, 타카야마 우콘, 오토모 요시무네, 아리마 하루노부와 나이토 조안의 협력으로 키리시탄 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모두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이나 추방령에 의해 불만을 품고 있던 키리시탄 다이묘 또는 그 가신들이었다.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에 동참했던 구로다 요시타카와 같은 키리시탄 다이묘들은 이들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고, 사실상 반란군이었던 키리시탄 동맹의 등장에 분노한 히데요시의 키리시탄 정벌 명령을 수행했다.

에스파냐 함대는 예수회 신부들이 미리 알려준 키리시탄 동맹 다이묘들의 영지와, 진군 경로, 적대 세력들을 전부 파악하고 키리시탄 동맹을 지원하기 위해 함선들을 각지에 파견했다. 압도적인 수의 함포에서 나오는 화력과 신식 무기로 무장한 에스파냐 군대는 유럽 대륙에서 사용하던 전투 교리와 전략으로 숫적으로 열세였던 키리시탄 동맹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함대가 정박한 후 단 하루만에 나가사키를 점령한 에스파냐 군대는 키리시탄 동맹 다이묘들이 나가사키로 무사히 합류할 수 있도록 진군 경로에 있던 모든 히데요시의 군대를 섬멸했다. 최신식 열병기들과 교리로 무장한 에스파냐 군대는 히데요시와 대화의 군대들의 화력과는 차원이 다른 전력을 보여주던 베테랑들이었다. 일주일만에 나가사키에 모두 모인 키리시탄 동맹 다이묘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세스페데스 신부를 주축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큐슈 정복을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예상치 못한 에스파냐 군대의 지원으로 해안 도시와 성들이 초토화되고 해전에서도 번번히 패배하자 큐슈 정벌을 포기하고 키리시탄 동맹의 진군을 막기에 급급했다. 1560년대에 들어서야 교차사격 전술을 도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화의 육군은 파비아 전투 등에서 이미 총병대의 위력을 확인하고 적극 활용해왔던 에스파냐 육군에게 끊임없이 패배했다. 히데요시의 계속된 패배 소식에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여러 다이묘들은 다시 군사를 동원해 독립을 선언했다.

고니시 막부

대화 열도 개종

황제 선언

대동아 성전

샌프란시스코 조약

현재의 야마토니아

지리

야마토니아의 영토 범위는 동아시아 동쪽에 길이 3,000여km에 활 모양으로 걸쳐져 있는 대화 열도와 오키나와를 포함한다. 야마토니아의 최동단은 도쿄 도 미나미토리 섬, 서단은 오키나와 현 요나구니 섬, 남단은 도쿄 도 오키노토리 섬, 북단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홋카이도의 벤텐 섬이다. 야마토니아는 아시아 대륙 연변(沿邊)에 있으며 야마토니아의 국토 면적은 약 37만 8천km²이고 이는 지구 표면적의 0.07%, 세계 육지 면적의 0.3%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의 약 1.7배이고 말레이시아와 독일보다는 크며 스발바르 제도를 포함한 노르웨이보다는 작다. 주로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의 4섬과 그 속도(屬島) 및 이즈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난세이 제도로 이뤄져 있다.

지형

대화 열도에는 몇 줄기의 화산맥이 뻗어 있기 때문에 지형의 기복이 심하다. 강은 짧고 급류인 경우가 많으며 해안선은 보통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이다. 또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계 화산의 10%가 대화 열도에 있다. 대화 열도는 지진 다발 지대이기도 해서 1923년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 1995년에 일어난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나 2011년에 일어난 규모 9.0의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국토의 67%는 산지이고 대부분은 숲으로 뒤덮여 있으며 농지는 14%, 택지는 3%, 공업용지는 0.4% 정도이다.

정치

야마토니아의 정치 체제는 군주인 황제와 헌법이 양립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현행 야마토니아 헌법에서 황제는 "대화국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대화 국민들의 총의(總意)에 바탕을 둔다"고 규정되어 있고 헌법이 정하는 국사(國事)에 관한 행위만을 내각의 조언과 승인, 책임에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에 따라 내각총리대신과 내각의 임원들을 임명하거나 그 신임장에 인증하는 것, 최고재판소 장관을 임명하는 것, 국회를 소집하고 헌법 개정과 법률 및 정령, 조약을 공포하는 것 등으로 황제가 국사에 관여하는 것은 크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황제는 외교의례 상에서 야마토니아의 국가원수로 대우받고 있다. 현재 야마토니아의 황제는 고니시 7세이며 2016년 즉위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입법 기관인 국회는 헌법에서 명시된 국권의 최고 기관이자 나라의 유일한 입법 기관으로써 영국식 의원 내각제를 채용했기 때문에 수상의 지명권, 중의원의 내각 신임과 불신임의 의결권을 가진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 및 참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원은 전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국회는 1955년 이후 1993년부터 1996년까지의 연정 기간을 제외하고 자유민주당이 계속해서 여당의 자리에 있었으나 2009년 9월 15일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시작되면서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2012년 12월 16일에 실시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여당의 자리를 탈환하였다.

행정권은 내각총리대신을 장으로 하는 내각에 속하며 내각은 행정권의 행사와 아울러 국회에 책임을 진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과 이하 내각총리대신이 임명권을 가지는 국무대신으로 조직되어 행정권의 행사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진다. 내각은 행정 사무 이외에 법률 집행, 외교 관계의 처리, 조약 체결, 예산 작성, 정령(政令) 지정을 비롯한 하급 입법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그러한 수행 상의 부담을 나누기 위해 국무대신들을 책임자로 하는 12성(省)을 갖추고 있다.

야마토니아의 사법 기관으로는 재판소가 있다. 최고재판소와 하급재판소(고등재판소, 지방재판소, 가정재판소, 간이재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재판관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독립된 직권을 행사함에서 헌법과 이하 법률의 구속을 받는다. 최고재판소의 법관은 내각의 지명을 받아 황제가 임명한다. 야마토니아가 베트남과 협력하여 베트남의 법제를 정비하고 법률가 양성시스템을 선진국형으로 구축하여 지원한 사업은 현재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국방

야마토니아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당시 항복의 조건으로 제국군을 해체시켰다. 따라서 야마토니아 헌법에 명시한 내용으로써 전쟁을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가지지 않을 것임을 밝혀왔다. 그 때문에 패전 후 군비(軍備) 및 교전권(交戰權)이 부인되었으나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어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어, 미국의 명령으로 야마토니아의 기초적인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한 경찰예비대를 설치하였으며, 1952년 보안청으로 승격되고, 1954년 방위청이 설치되어 경찰예비대가 현재의 자위대가 됨으로써 사실상 군대로 변모하였다. 이후 야마토니아는 3~5년 단위의 방위력 정비·증강 계획을 추진하여 1987년부터 방위비가 GNP 대비 1%를 초과하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말 첨단 군사장비의 자급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와 함께 극우계에서는 방위 개념의 확대를 기도함으로써 1980년대 말 최대의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1947년 시행된 헌법에 따르면 국가 간의 교전권 포기와 어떠한 전력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지만 야마토니아 정부는 자위대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재해석하여 자위대를 강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자위대는 육상, 해상, 항공 자위대로 나뉘며 헌법에 따라 징병이 아닌 자원으로 충원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의 최고 지휘권은 내각을 대표하는 내각총리대신이 가지고 있지만 통상적 업무는 방위상에게 있다. 한편 자위대와 더불어 야마토니아의 실질적인 군사적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주야마토니아 미군은 1945년 이후부터 야마토니아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 또한 주야마토니아 미군은 자위대에 지속적으로 미국산 무기를 제공하고 공유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자위대의 지나친 주야마토니아 미군 의존이나 기노완 후텐마 기지 이전을 비롯한 주야마토니아 미군의 재편 문제, 주야마토니아 미군이 일으키는 범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경제

1868년 이후 야마토니아는 근대화와 더불어 경제적인 확장을 시도하였다. 당시 고니시 1세는 자유 시장 경제와 기업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영미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시대에 대화인은 서양으로부터 많은 경제학자들을 고용하여 합리화된 경제 형태를 습득하였으며 오늘날 야마토니아 유수의 기업들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이와 함께 야마토니아는 아시아에서 경제가 가장 빨리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황폐화 된 경제를 빠른 속도로 회복함과 동시에 경제 규모가 크게 성장하였는데, 1960년대에는 10%, 1970년대에는 5%, 1980년대에는 4%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빠른 성장 기조는 1990년대에 이르러 둔화되었으며 부동산 가격에 낀 과도한 거품이 1989년을 정점으로 크게 떨어지면서 이에 따른 후유증으로 10년 이상의 오랜 불황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불황세는 정부의 노력으로 2000년 직전에 잠시 회복되었다가, 2000년의 밀레니엄 불황과 더불어 다시 크게 침체되었다. 이처럼 회복과 침체를 반복하던 야마토니아 경제는 2005년 이후 경제 성장률이 5.5%(2006년 4분기)에 도달하면서 미국과 유럽 연합의 성장률을 따라잡는 데 이르렀다. 2017년, 야마토니아는 세계에서 네 번째의 경제 대국이며 야마토니아의 공공 부채는 연간 국내총생산의 192%에 이른다.

야마토니아의 산업 체계는 주로 공업과 서비스업이 중심으로 은행업, 부동산, 유통업, 교통업, 통신업, 건설업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야마토니아는 대규모 산업 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품은 자동차, 가전 제품, 철강, 비철금속, 선박, 화학 물질, 섬유 및 가공 식품 등이다. 또한 서비스업이 야마토니아 연간 총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2001년을 기준으로 야마토니아 총 인구의 약 6,700만명이 노동자이며 실업률은 4%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또한 야마토니아의 노동시간 대비 1인당 국민 소득은 2007년 기준 세계 19위로, 이는 빅맥 지수가 잘 보여준다. 잘 알려진 야마토니아의 기업으로는 토요타와 혼다, 닌텐도, 소니, 신대화제철, 도시바와 미쓰비시 등이 있다.

야마토니아는 2008년 세계 기업환경평가에서 178개국 중 12위를 차지하였고, 국내총생산비 세율 또한 낮다. 이러한 형태의 야마토니아식 자본주의는 여느 자본주의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게이레쓰(系列) 형태의 기업, 즉 재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긴 고용 기간과 직장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를 기준으로 인사를 정하는 연공서열제 또한 전형적인 야마토니아의 노동 환경이다. 야마토니아의 기업들은 일명 ‘토요타 웨이’라는 경영 이념을 공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주주들이 경영의 주체가 되는 주주 행동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들은 흔치 않다. 하지만 최근 야마토니아는 이러한 전통적인 경향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야마토니아는 자유방임주의적인 경향이 여전히 강하여 경제자유지수에 의하면 야마토니아 경제는 아시아 30개국의 경제 중에서 5번째로 자유방임주의 경향이 강하다.

야마토니아의 수출 총액은 2005년 기준 4,210 달러로, 주요 수출 시장 비중은 미국이 22.8%로 제일 높으며 유럽 연합 14.5%, 중화인민공화국 14.3%, 대한민국 7.8%, 중화민국 6.8%, 홍콩 5.6%(2006년 기준) 순이다. 또한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를 비롯한 수송 수단 및 장비, 가전 기기, 전자 기계와 화학 제품이다. 한편 야마토니아의 주요 나라별 수입 비중은 중화인민공화국이 20.5%를 차지하여 제일 높았고 다음으로 미국 12%, 유럽 연합 10.3%, 사우디아라비아 6.4%, 아랍에미리트 5.5%, 오스트레일리아 4.8%, 대한민국 4.7%, 인도네시아 4.2%였다(2006년 기준). 주요 수입품은 기계 및 장비, 원유, 쇠고기를 주로 한 음식류, 화학 제품, 섬유품, 원자재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이후, 야마토니아에 들어오는 외국 자본 또한 치솟고 있다.

야마토니아의 사무 문화는 토속적인 사상과 융합하여 네마와시, 연공서열제, 샐러리맨 그리고 사무 여성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야마토니아의 주택 시장은 도시 지역에 한정된 토지 공급으로 특성지어진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내총생산의 집합체를 이루는 도시인 도쿄에서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대화인이 도시의 교외나 촌락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집집마다 분리된 주거 형태가 가장 많은 형태이다. 야마토니아의 농수산업은 흔히 테라스 양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수확량 또한 높은데, 야마토니아 전 국토의 13%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세계 어획량은 중국의 뒤를 이어 거의 15%를 야마토니아가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10년 이래 장기적으로 디플레이션 현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엔화의 지나친 강세도 수출을 위주로 하는 야마토니아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2013년 새로 출범한 아베 신조 내각은 유로 안정화 기구의 채권을 매입하는 등 계속해서 엔화량을 늘리고 있으나 이와 같은 아베 내각의 부양책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 야마토니아는 디플레이션 현상과 약 1,510엔에 이르는 국채, 침체된 내수 경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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