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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의정대신
희종시대
1844-1856
역대 영의정
1대 2대 3대 4대
박규수 김좌근 유홍기 윤자승
역대 의정대신 (헌종시대)

조선국의 개화공신

개화공신 수훈자
開化功臣 受勳者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강위 윤자승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탁정식 이동인
유정수 김양한 신헌 이범윤 조병세

역대 조선국 의정대신
歷代 朝鮮國 議政大臣
수구 정권
개화 정권
개화 정권
제2대
김좌근(金左根)
제3대
유홍기(劉鴻基)
제4대
윤자승(尹滋承)
개화 정권
개화 정권
보수 정권
제4대
윤자승(尹滋承)[1]
제5대
유홍기(劉鴻基)
제6대
김병학(金炳學)
유홍기
劉鴻基
파일:유홍기.jpg
인물 정보
성규(聖逵)
대치(大致)
본관 한양(漢陽)
추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재임 기간 1847년 6월 18일-1850년 5월 9일[2]
1856년 7월 13일-1858년 4월 3일[3]

유홍기(중국어: 劉鴻基, 1826년 ~ 1884년)는 조선국개화사상가이자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의정대신을 비롯한 주요 관료 직을 두루 거쳤다. 박규수오경석과 함께 개항기의 대표적인 북화개항파 중 한 명으로서 이후에 윤치호, 서재필, 김옥균 등의 인재들을 배출하는데 공헌하였다.

생애

유홍기는 1826년(순조 31년) 한성(漢城)의 무관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과(武科)의 유익소(劉益召)이고, 할아버지는 경희궁 오위장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 유흥오(劉興五)이다. 또한 그의 형 유한기(劉翰基)는 대호군(大護軍)이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역관들이 다수 배출되었고, 의업에도 종사하였다. 그의 출신은 중인이었다고 한다. 본명은 홍기(鴻基)이고 호가 대치(大致)인데 흔히 유대치로 많이 알려졌다. 그의 가문에서는 역관 46명, 의관10명, 음양과(16명), 율과20명을 배출했다. 모두 합하면 잡과 합격자를 92명을 배출한 집안이다. 그의 집안을 역관의 집안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것이다. 그리고 진사 1명, 무과 2명이 합격하였다. 그의 직업은 한의사이었다.

윤치호,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등의 편지와 서신을 보면 대치장(大致丈, 대치 어르신)이라는 칭호로 많이 쓰인탓에 그것이 그의 이름보다 널리 알려져 있다. 한의사였던 그는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와 조선국을 오가며 가져다 준 신문물을 일찍이 접하였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 났으므로 신분상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무관이었으므로, 그는 한의업에 종사한 양반 출신 유의였다.

그의 유년기나 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데 이유는 현재 학계에서도 분분하다. 그에 대한 자료들도 대부분 인멸, 실전되어 있는 상태이다.

청년 시절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그로부터 금석문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吳慶錫)과 함께 박규수가 가져온 서구 서적을 탐독하면서 서구화에 눈을 떴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이 그의 무하에 출입하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함께 지식인들을 길러냈다. 그뒤 유홍기는 북화개항파 인사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국 고금의 역사 지식도 해박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

이웃에 살던 친구이자 역관 개화사상가 오경석이 박규수가 서구에서 가져온 개화 서적인 《서국도지 西國圖志》, 《영환지략 瀛環志略》, 《박물신편 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이를 보고 탐독,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阿片戰爭)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청나라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점차 청나라에게서 자주권을 지켜내자는 반청 사상을 갖추게 되었다.

1차 의정대신 임명

그는 1847년의 김좌근(金左根)이 희종(熙宗)과의 지방 수령의 뇌물 문제를 두고 의견이 충돌하여 내각해산을 주도하자 후임 내각을 지휘할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서 지목되었으며, 이에따라 3대 내각을 수립하게 되었다.

희종과 함께 형식적인 모습을 갖춘 채 여전히 6조 체계가 기반되었던 아문 체제를 8개의 아문(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으로 중앙 행정 체계를 개편하였으며, 이를 내각(內角)의 직속으로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 개화 및 서구화 정책을 전담하던 사무아문(事務衙門)을 폐지하였다. 또한, 왕실 재정을 제외한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혼잡한 재정 체계를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일원화하였다.

1850년 5월, 연호 사용 및 궁내부(宮內府) 설치 문제를 두고 결국 희종(熙宗)의 강요하에 스스로 의정대신 사임을 선택하고 내각해산하였다.

병진반정

후임 의정대신으로 일본(日本)과 수교 관계를 재정립하여 맺고 조선의 외부 개항 교섭의 실무진으로 활약했던 윤자승(尹滋承)이 발탁되었으나, 그는 개화당(開化黨) 내에서도 보수적 위치를 고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윤자승은 박규수(朴珪壽) 재임기부터 이어진 궁내부(宮內府) 설치 노력을 무산하는 한편, 희종(熙宗)의 뜻대로 입헌군주정의 모습을 한 전제정을 확고히 다지려고 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기존 수구파(守舊派) 인사들을 등용코자 하였다. 이에 유홍기 본인과 오경석(吳慶錫) 등의 북화개항파들은 진보 개화 성격이 퇴색되고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될 위기에 처하자 무력 정변, 즉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했다.

희종이 숨을 거두고 헌종(憲宗)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정계 내 어수선한 상황을 기회로 여긴 북화개항파(北和開港波)들은 1856년, 7월 12일에 관보국(官報局) 낙성식에서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병진반정, 丙辰反正) 이에 윤자승과 결탁했거나 희종 재위기에 척족, 수구파들을 다수 처형시켰으며, 다음날 헌종 내외와 왕비를 확보하였고, 헌종이 이들 정변을 윤허하면서 유홍기는 다시끔 의정대신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2차 의정대신 재위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유홍기는 병진반정 당시에 발표했던 속국 지위 배제, 문벌 및 신분제 타파, 조세 제도 개혁 등의 정책안을 내놓았다. 이후 희종 시기에 설치되어 왕권을 강화하던 어용 단체였던 군국협회(君國協會)와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해체 및 폐지하였으며, 그외 불필요한 관제 및 관청들을 정리하는 등 중앙행정제도를 개편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기존 아문 체제는 곧 부서(部署) 체제로 완비되었으며, 병진반정 당시 갖추어진 8부 체제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유홍기는 어용단체를 해체하는 과정과 함께 왕권을 견제하는 궁내부를 설치하면서 사실상 헌종 이후로 전제 왕권 체제는 무너지고 입헌 군주정이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 속국 지위를 배제하는 격에서 헌종에게 대군주(大君主) 칭호를 사용할 것과 개국기년(開國紀年) 도입을 건의함에 따라 조선은 청나라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적 성격을 갖추려고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외에 근대적 경찰 제도인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하고 경무청관제직장(警務廳官制職掌)이라는 근대 경찰조직법을 시행하면서 기존 포도청(捕盜廳)은 폐지되었다.

각주

  1. 병진반정(丙辰反正) 이후 헌종에 의해 내각 해산 선언.
  2. 1차 재임 기간
  3. 2차 재임 기간